# 454
454화. 추마골로 들어가다
귀령문 종주의 말에 누군가는 기뻐했고 또 누군가는 믿기지 않아 했다.
“그럼 수사 분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제 자식과 종 장로를 먼저 들여보낼 테니 나머지 분들은 알아서 결정하시면 됩니다.”
왕천성의 말이 끝나자 은색 가면을 쓴 왕선과 연여언이 전송진 중심으로 이동했고 원영 중기의 노인이 무표정하게 그들 곁에 섰다.
왕천성의 명령에 따라 귀령종 수사들이 깃발에서 오색찬란한 빛기둥을 발사해 진법에 주입했다. 그러자 진법 자체가 진동을 하며 영석들이 대량의 빛을 발산했고 세 수사가 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본 다른 수사들이 동요했다.
진법은 거대했지만 한 번에 3명밖에 보낼 수 없어 귀령문 수사들은 3명씩 무리지어 이동했다.
이렇게 되면 귀령문 수사들이 먼저 추마골에 진입하게 되지만 다들 하나같이 간교한 늙은이들이라 함부로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립도 일어나 언덕 위에 서 있었지만 벌써 나설 마음은 없었다. 왕천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냉소하고는 허공에 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순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모란인들이었다. 열댓 명의 법사들이 악 여인과 중 문사의 인도 아래 전송진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왕천성의 얼굴에 순간 검은 기운이 스쳤다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늘만 쳐다보던 위무애도 천천히 고개를 숙여 중 문사를 바라보았다.
중 문사가 소매를 털어 거침없이 열댓 개의 추마령을 던지자 왕천성이 푸른빛을 뿜어 추마령들을 회수했다.
“수량이 맞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왕천성도 상대의 신분을 알았기에 일부러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허공의 귀령문 수사들이 술법을 펼칠 때마다 법사들이 3명씩 전송되었는데 중 문사가 전송진에 들어서는 순간 위무애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무작위로 전송 된다던데. 나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런 우연이 있을까요. 만일 정말 마주친다면 그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요.”
모란 신사가 전혀 두려움 없이 받아쳤다.
“하늘의 뜻이요? 그렇다고 칩시다.”
이 말을 끝으로 중 문사는 다른 두 법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전송진을 바라보는 왕천성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수사들은 모란인들까지 무사히 전송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하나둘 나서기 시작했다.
전송진은 쉼 없이 번쩍였고 거의 300여 명의 수사들이 전송되었다. 그럴수록 진법 중간의 고계 영석은 어두워지며 영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한립이 상황을 지켜보며 주의를 기울여야할 수사들을 기억해 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녹색 장포를 입은 여섯 수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 맨 앞에 선 이가 바로 어령종 대장로 동문도였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곡쌍포의 일도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동문도를 제외한 다섯 수사들은 전송진으로 향하다가 동시에 한립이 있는 곳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거의 동화되었던 한립의 두 번째 원영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한립이 신속하게 원영을 억누르지 않았다면 지목영령으로 만든 두 번째 원영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빠져나갔을 지도 모른다.
‘오행영령!’
두 번째 원영의 반응에 한립은 다섯 수사들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녹색 장포를 입은 수사들의 이상 행동에 동문도도 한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동문도는 놀란 기색을 순식간에 지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전송진으로 걸어갔다.
본래 태연하기 그지없던 왕천성은 그가 대동한 다섯 원영기 수사들을 보고 표정이 달라졌다.
“동문 형, 이분들은 처음 뵈는 것 같은데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추마골 일이 일단락되면 그리 하겠습니다.”
동문도가 간사하게 왕천성의 제안을 거절했고 곧 전송진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사라지기 전에 한립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목영령의 동화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앞으로 추마골에서 저 자를 마주치면 더욱 조심해야겠구나!’
그러던 와중에 한립은 그 다음으로 나선 세 수사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세 노인들 중 한명이 바로 낙운종의 정 사형이었던 것이다. 세 노인들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을 보니 다들 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 듯했다.
한립이 탄식하며 그들이 전송되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계 영석이 거의 빛을 잃어가자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려 수중의 추마령을 왕천성에게 던져주었다.
“한 수사, 나이도 어린데 이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겠소.”
위무애가 한립을 알아보고 돌연 추마골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권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추마골에 꼭 들어가 봐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을 정했다면 더는 말하지 않겠소. 그저 추마골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나와 같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왕천고는 위무애가 젊은 청년 수사에게 정중히 대하는 것을 보고 바로 한립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도 한립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전송진 중간에 서서 두 눈을 감았다. 왕천성은 자신의 시선에도 흔들림 없는 한립의 태도에 더욱 경계심이 일었다.
곧 한립 역시 전송진의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 * *
한립은 전송 후, 바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대량의 돌 더미가 쌓여 있는 돌무지였는데 곳곳에 길게 자란 누런 풀들이 이어져 있을 뿐 다른 수사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추마골이 백만 리 정도 크기라면 무작위로 전송된 수사들끼리 마주치지 않을 확률이 더욱 높았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다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의 뒤쪽으로 움푹 들어간 지형이 백여 장 정도 퍼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풀 한 포기조차 없었다. 한립이 바로 의식을 퍼트려 2, 30리 정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돌무지를 걷던 한립은 이곳이 단순히 분지라기보다는 구덩이에 가깝다는 사실에 의아해졌다. 조용히 생각에 잠기던 그가 두 손에 수결을 맺어 펼치자 십여 장 높이의 돌풍이 일어났다.
“가라.”
돌풍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거대한 구덩이를 휩쓸었다. 흙과 모래가 날아가자 구덩이가 본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가 검붉은 용암이 굳은 것처럼 이상한 광채를 내며 번들거렸다.
“이건…….”
엄청난 고온으로 형성된 지형이 틀림없었다.
‘설마 화탄술과 유사한 수법으로 만들어진 구덩이인가? 하지만 백여 장이 넘는데 말도 안 돼.’
상고 수사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한낮이었는데 작열하는 태양대신 누리끼리한 빛이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금제로 뒤덮인 하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아마 이곳의 하늘은 온갖 금제로 가득 차 조금만 높이 날아도 금제를 건드릴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한립은 손끝을 튕겨 서금충 한 마리를 하늘 위로 올려 보냈다. 서금충이 겨우 5, 60장 정도 올라갔을 때 갑자기 남색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공격을 받은 듯 중심을 잃고 떨어져 내리다가 다시 날개를 펄럭이며 한립에게 돌아왔다.
그가 방향을 가늠해 온 몸을 보호막으로 두르고는 서쪽 방향으로 서서히 날아갔다. 이런 괴이한 곳에서는 전속력을 낼 수 없었다. 잘못하다 공간 균열이라도 마주치면 죽은 목숨이었다.
한립은 자령과 남롱후 모두에게 약속을 하였으니 하나씩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영촉과는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남롱후와 힘을 합쳐 화섬을 멸하기로 했다.
귀령문 쪽에서 먼저 추마골에 들어와 영촉과를 찾고는 있겠지만 원영으로 달아난 수사의 애매한 기억으로 단시간에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도 영촉과를 찾으면 바로 단약을 만들어야 할 테니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다.
한립은 정신력을 소모해 의식을 완전히 개방했다. 또한 공간 균열을 피하기 위해 명청영안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비록 지금은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어도 다른 수사들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전송진이 아무리 무작위로 전송해도 분명 전송 범위에 한계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한립은 다른 수사들과 마주치지 않으면서 추마골 가장 서쪽으로 날아가 남롱후 등과 만날 생각이었다.
한립이 쉼 없이 좌우를 쳐다보며 날아가다가 갑자기 신형을 멈추었다.
미간을 좁힌 그가 더욱 느리게 날아가며 백여 장을 지나자 허공에 하얀 빛이 호선형을 그리며 둥둥 떠 있었다.
그 빛은 영기의 파동도 전혀 발산하지 않고 그저 허공에 걸려 있었다. 한립은 그것을 자세히 살피다가 한 팔을 들어 앞쪽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검기가 멀리 있는 호선 위에 떨어졌다.
쿵!
푸른빛이 터졌고 검기는 호선과 마주친 순간 사라져 완전히 잡아 먹혀 버렸다.
‘이게 공간 균열이라는 것이구나.’
저렇게 분명한 것들은 피해가면 그만이었지만 투명한 공간 균열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립은 몰랐지만 그와 백 여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노인도 호선의 공간 균열을 바라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휴! 공간 균열 바로 옆으로 전송되다니.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그 후, 주위를 살피며 다른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날아가기 시작했는데 돌연 허공에서 하얀 빛이 반짝였다.
그 순간 노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몸이 두 동강이 나서 핏줄기를 뿜어내며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방금 모습을 드러냈던 공간 균열은 다시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추마골 외곽 어느 곳, 금포를 입은 세 수사가 미친 듯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방 수십 여 장이 일곱 빛깔의 막으로 막혀있음을 확인했다.
“이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귀령문 자식들 우리를 금제 속으로 전송시키다니! 나가기만 해봐라 그냥!”
얼굴에 흉터가 있는 거한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가면 어쩌려고요? 귀령문이 우리 같은 작은 문파의 수사들을 신경 쓰기라도 한답니까? 게다가 무작위로 전송된다고 미리 경고까지 했으니 공간 균열에 떨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입니다.”
또 다른 바짝 마른 수사가 냉소했다.
“그렇지만 금제를 푸는 동안 추마골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보물들은 다른 수사들이 다 가져갈게 아닙니까.”
흉터 거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강제로 금제를 부수고 나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보기에는 기묘해 보여도 외곽에 있는 금제들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시 주저하던 바짝 마른 수사가 제안했다.
“그래요. 공격형 법보를 가진 수사가 나서주시면 우리가 보조하겠습니다.”
또 다른 새까만 피부의 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정도 금제를 부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죠!”
거한이 말을 마치고 입에서 노란 빛을 뿜어내니 돌로 만든 도장이 나타났다. 그가 수결을 맺어 도장을 가리키자 도장이 미친 듯이 불어났다.
그리고 거한 옆의 두 수사도 각각 붉은 빛과 하얀 빛을 뿜어냈다.
“가라!”
흉터 거한이 낮게 소리치자 돌로 만든 도장이 빙글빙글 돌며 일곱 빛깔의 장막으로 쇄도했다.
나머지 수사들의 붉은빛과 하얀빛을 머금은 비검들도 그 뒤를 따랐다.
꽈쾅!
도장 법보는 과연 평범한 보물이 아닌지 빛의 장막이 진동을 하며 흔들거렸다.
수사들이 기뻐하며 웃음을 보이려다가 급속도로 얼굴이 굳어졌다. 갑자기 장막에서 크게 빛이 번지며 세 개의 법보가 튕겨 나온 것이다.
세 수사가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사방에 빛이 반짝이고 새빨간 빛을 뿜어내며 무수히 많은 불 구름들이 모여들었다.
“이런! 공격형 금제는 아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불 구름에 흉터 거한이 소리쳤다. 다들 각자의 법보를 발동해 급히 보호막을 쳤지만 붉은 구름이 지나간 자리에는 참혹한 비명 밖에 남지 않았다.
잠시 후, 붉은 빛이 사라지자 금제 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세 개의 법보만이 땅에 떨어져 빛을 잃고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