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1
451화. 진교천
숲 속에서 밤을 보낸 한립은 이튿날 바로 묻어둔 천절마시를 회수하여 만령산맥으로 날아갔다.
어제 자령 수사를 만나기전 남롱후를 찾으려 하였으나 성 내에 천극문 제자들이 없어 만나지 못했다. 보아하니 천극문 수사들은 다른 곳에 머물고 있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한립은 조급해 하지 않고 만령산맥 인근에 머물며 그들이 오기 전까지 결단기 수준의 꾹두각시들을 제련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양의환이 그의 손에 있으니 남롱후 쪽에서도 그를 찾고 있을 것이다.
한립은 그들의 말하던 북극원광이 추마골 외곽으로 통하는 입구가 아니라 중심부로 통하는 통로에 위치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령문이 무슨 수를 써서 수백 명의 수사들을 동시에 추마골로 들어가게 하겠는가.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며 푸른 빛줄기로 날아갔다. 그의 속도로 가면 엽화성(葉樺城)에서 만령산맥 인근까지는 겨우 반나절 거리였다.
일단 만령산맥 인근에있는 시장을 몇 군데 들려 꼭두각시 제련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할 계획이었다.
모란족과의 전쟁 중에 얻은 재료들과 원명등을 돌려주는 대신 받은 재료들을 합치면 웬만한 중소 문파의 재산과 맞먹었다.
이제 고계 꼭두각시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도 가능해졌으니 시장에서는 보조 재료들을 충분히 구입하기만 하면 되었다.
다만 상고시대 원영기급 꼭두각시의 경우에는 주 재료를 몇 가지 건졌을 뿐 아직 필요한 재료가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혈풍목(血風木)이라는 주재료는 경정보다는 아니지만 시장에서 흔히 거래되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한립은 이미 낙운종 제자들에게 관련 재료를 보거나 소식을 접하면 즉시 통보하라는 명을 내려놓았기에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언젠가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며 속도를 늦추었다.
전방에서 몇몇 수사들이 격렬히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립은 미간을 좁혔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지금 이곳에는 온갖 세력들이 섞여 있는데다 누군가 관리도 하지도 않으니 당연히 크고 작은 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내 넷에 여인 하나가 둘로 나뉘어 싸우는데 모두 결단 초기의 수행으로 보였다. 보아하니 서로 원한이 맺힌 일이 있는지 법보며 부적 등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내 둘에 여인 하나로 이뤄진 쪽이 다른 사내 둘에게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사내 둘의 법력이 심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수백 마리의 거대한 나방 요수를 풀어 상대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만 한 나방들이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독이 깃든 분말이 날려 세 수사들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 명의 수사들도 밀리고 있지만 서로 비슷한 경지를 지녀 당장 승부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 쓰는 법보들 중 금포를 입은 문사 차림의 사내가 사용하는 은색 거대 붓과 금색 두루마리가 눈에 띄어 한립은 자세히 봐두었다.
그들이 어느 문파인 줄 모르나 괜한 일에 끼어 들 마음은 없었다. 막 그대로 조용히 지나치려는데 한립이 문사의 소매에서 노란색 단풍잎 표식을 발견했다.
‘황풍곡? ’
한립이 멈칫하며 멈추었다. 이어 다시 문사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던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러는 동안 상대를 제압하고 있던 두 명의 수사가 백여 장 밖의 한립을 발견했다. 그들은 의식으로 상대를 훑고는 대번에 안색이 변했다
“선배님께 어령종 제자들이 인사 올립니다.”
두 수사가 급히 법보를 회수하고 독나방만을 풀어둔 채 한립을 향해 날아와 포권을 취했다.
“어령종이면 마도 수사들이더냐?”
한립이 그들의 소개를 듣고 푸른빛을 거두어 모습을 드러냈다.
“낙운종 한 선배님 아니신지요!”
“나를 알더냐?”
“모란족과의 전쟁에 참전해 한 선배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일이 있습니다.”
어령종 수사가 불안한 마음으로 더욱 공손히 답했다.
“나를 알아봤다니 다행이구나. 본래 남의 일에 끼어드는 성품은 아니지만 황풍곡과는 오랜 정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줬으면 좋겠구나.”
한립의 거침없는 말에 두 수사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눈치를 살폈다.
“어찌?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당연히 선배님의 분부에 따라야지요.”
키가 큰 쪽이 한립의 표정 변화를 보고 영민하게 답했다. 동시에 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대가 이 일에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미 결과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옆 수사에게 눈짓을 하며 수결을 맺자 법결들이 영수대 두 개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세 수사를 괴롭히던 독나방들도 영수대로 돌아가 버렸다.
독나방이 사라지자 그들을 상대하고 있던 세 남녀 수사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곤 기뻐하며 서둘러 한립을 향해 날아왔다.
그들이 날아오는 모습을 본 두 어령종 수사는 그들과 마주칠 마음이 없는지 조심스럽게 한립에게 물었다.
“다른 분부가 있으신지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따를 것입니다.”
“없다. 이제 가 보거라.”
한립이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손을 휘저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두 수사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안심하더니 황급히 두 줄기의 녹색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어령종 수사들이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드디어 세 수사가 한립 앞에 도착했다.
“저희 형제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의 존함을 알 수 있을 지요?”
문사가 한립의 외모를 보고 놀라면서도 희미하게 익숙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다.
“황풍곡 수사더냐?”
한립이 상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물었다.
“예, 전 황풍곡 진교인이라 하옵고, 이쪽은 저의 결의형제들인 화도오 제자들입니다. 혹시 령호 사조님을 아시는지요?”
한립이 자신이 아는 육파의 고위층이 아니면서도 그들을 도와주자 령호 사조와 친분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진교인! 진 씨 집안사람이겠구나.”
“저희 집안을 아십니까?”
문사의 질문에도 한립은 침묵하며 다시 자세히 그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본 결단기 수사 셋은 그저 초조할 뿐이었다.
“황풍곡의 3대 수도 가문 중 하나인 진 씨 가문을 모를 리가. 이름이 진교인이라면 진교천과는 무슨 관계더냐.”
“누이를 아십니까?”
“네 누이라고?”
닮은 얼굴에 비슷한 이름이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
한립이 한참 만에 한결 온화한 말투로 물었다.
“누이는 결단을 이루지 못하고 벌써 백여 년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립은 아름다웠던 진교천의 모습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눴던 날을 떠올렸다.
“……선배님께서 누이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진교인이 그의 표정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곧 혼인을 한다 들었었다. 곧 마도가 침입해와 어찌 되었는지 소식이 끊겼지만.”
“누이는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저희와 혼약을 맺었던 가문이 마도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혼사가 어그러졌죠. 이후 누이는 평생 홀로 지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진교인이 머뭇거리다 진교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곤 상대의 수행과 용모를 살피다 요즘 소문이 자자한 누군가를 떠올렸다.
“평생 홀로?”
한립은 안타까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누군지는 네 표정을 보니 알아차린 것 같구나. 지금 이곳에는 많은 세력들이 모여 있으니 더욱 조심히 다니거라.”
말을 마친 그가 다시 세 수사를 쳐다보지 않고 빛줄기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
“저 선배님과 진 가가 무슨 인연이 있는 건가요?”
“인연? 우리 진가가 저런 분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겠느냐. 내 예상이 맞다면 저 선배님은 황풍곡 출신으로 전쟁 중에 모란족 성조를 없애고 최근 진국 마도 수사인 장로를 격살했다는 그 분일 것이다. 아마 세상을 떠난 일곱째 누이와 아는 사이였던 듯한데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더냐.”
여 수사의 물음에 진교인이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곤혹스럽다는 듯 답했다.
“네? 저 분이 바로 그 분이라고요? 어쩐지 너무 젊더라니. 듣자니 연배는 저희 또래라던데요.”
“그래, 황풍곡에 있을 때만해도 축기기에 불과했지. 이후 나와 누이랑 함께 혈금시련에 참여하기도 했었는데, 그때는 천남 삼대 수사들과도 나란히 일컬어지는 인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진교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령호 사백께서 저 분을 황풍곡으로 회유하려다가 실패하셨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남색 장포를 입은 수사가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
진교인이 머뭇거리다가 얼버무렸다. 결의형제를 맺은 둘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내용인 듯했다.
이에 남색 장포의 수사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이번엔 운이 좋았습니다. 형님이 막 제련해낸 법보들로 독나방을 대부분 막아내는 동안 한 선배님께서 와주시다니요. 아마 형님의 법보가 완성되면 더는 운 씨 형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맞아요. 진 씨 가문에 금서은필(金書銀筆) 법보가 전해 내려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비슷한 모양의 법보를 제련해낼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우리 진 씨 가문 수사들이 사용하는 두루마리와 붓 법보는 진품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예전부터 한 벌로 된 법보를 제련하고 싶었지만 재료를 모으지 못해 비검을 사용했었지. 그런데 올해 드디어 제련에 성공한 거야. 아마 추마골에 들어가도 큰 도움이 되겠지.”
진교인이 웃으며 설명하다 신중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으로는 더욱 주의를 기울이자꾸나. 한 선배님 말씀대로 추마골에 들어가려는 수사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육파 출신 사형제들을 찾아 함께 하는 것도 좋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진 형 말씀대로 따를게요.”
세 수사는 그 자리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 * *
세 수사와 헤어지고 한참을 날아간 한립은 희미하게 만령산맥을 볼 수 있었다. 산맥의 장독이 옅어져서 빽빽하게 들어찬 수풀과 험준한 산봉우리들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규모가 얼마나 방대한지 광활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한립은 둔술의 속도를 줄이며 다른 수도자들의 흔적을 쫓았다. 그가 천천히 두 눈을 감자, 원영 후기 수사의 의식과도 비슷한 강력한 의식이 방원 백 리로 뻗어나가 살폈다.
잠시 후, 조용히 눈을 뜬 그는 속도를 높이고 정확히 목표한 곳으로 향했다.
일다경 후 어느 산 정상 위에서 노인과 어린 수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부신 푸른 빛줄기는 두 수사의 머리를 선회해 허공에서 멈추었다.
“헛!”
두 수사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두 수사의 수행은 높지 않아 노인은 축기 중기였고, 소년은 연기기 5성 정도로 보였다.
노인은 한립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자 서둘러 예를 갖추고 인사를 했다.
“물을 것이 있으니 당황할 것 없다! 가장 가까운 시장이 어느 방향이더냐.”
“서쪽으로 4백리 정도를 가시면 새로 열린 시장이 있습니다.”
“4백리? 알겠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립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를 보며 노인과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 * *
4백리 밖, 돌로 급조해 만든 초라한 시장이 나타났다.
안에서 거래를 하는 수사들도 손에 꼽히는 작은 규모의 시장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개의치 않고 필요한 재료를 대량으로 구매하고는 바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십 여리를 더 날아가 산맥의 장독이 짙어질 때쯤 어느 이름 모를 언덕 위에 내려섰다. 이제 그에게 임시 동굴을 만드는 일은 너무 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