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450화 (207/2,000)

# 450

450화. 상고마계(上古魔界)

잠시 후, 머릿속에 노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을 이루고 수도계의 정상에 섰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원영 후기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던 것이지.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겨우 이백 년 만에 화신기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쓸데없이 괴뢰술이나 공법을 창립하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진작 화신기에 들어 영계(靈界)로 올라갔겠지. 만 년이나 꼭두각시에 갇혀 있었겠느냐.”

대연 신군은 갑자기 풀이 죽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질투심에 입을 비죽였다.

보통의 수사들은 결단을 맺고 원영을 응결하는 것도 어려운데 화신기에 드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니.

“화신기에 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괴로웠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물론 내세가 있지만 노부에게 현생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내세는 의미가 없었지. 게다가 내생에서 범인으로 태어나 영근조차 지니지 못할 가능성도 컸고. 그래서 내생에서도 현생의 의식과 보존하는 술법을 연구하다 만들어낸 것이 대연결과 기신술(寄神術)이었다.”

대연 신군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냉소했다.

“그렇게 엄청난 수행을 잃고 의식만이 꼭두각시에 깃들어 거의 만년을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군요.”

한립이 갑자기 끼어들어 결론을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미완성의 기신술을 펼칠 수밖에 없던 것이 큰 실수였다. 꼭두각시에 깃든 후에야 일신의 수행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지. 의식과 관련된 능력은 간신히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밀실 주변을 강력한 진법과 백여 개의 꼭두각시로 지키게 하였으니 육신과 법력을 잃은 나로서는 탈출한 방법이 없었다.

또 혹시 내게 원한을 가진 이가 기습을 할까 싶어 밀실의 위치를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만년이나 흐르고 만 거지. 밀실 안에 영성을 쌓아두지 않았다면 벌써 죽고 말았을 것이다.”

말을 잇던 대연 신군의 목소리가 갑자기 냉랭해졌다.

“늙은이가 오늘따라 왜 이리 말이 많은 것이오?  예전에는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더니.”

“흥! 네게 떠들지 않으면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떠들겠느냐?  네가 대연결을 수련했으니 절반쯤은 노부의 제자나 마찬가지 아니더냐. 게다가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던 나를 천죽교 밀실에서 찾아낸 것도 네 녀석이지.

그러고 보니 네 녀석이 눈썰미가 좋더구나. 그 많은 꼭두각시들 중에서 날 찾아내다니. 게다가 즉시 노부를 공격해 그 자리에서 죽일 뻔하지 않았더냐!”

노인은 마지막에서 조금 울분을 토해내는 듯했다.

“당신이 칠정결로 먼저 기습하지 않았으면 나라고 먼저 공격을 했겠소?  결국 방심한 사이 내 두 번째 원영을 장악해버렸지 않소. 그러나 나도 주(主) 원영으로 두 번째 원영을 조종해 당신의 혼백과 원영을 동시에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오.”

“나도 젊은 나이에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해둔 괴물 같은 녀석이 있을 줄 몰랐다. 게다가 그때의 난 의식을 제외하면 법력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느니라.”

대연 신군이 적반하장으로 소리쳤으나 한립은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도 네가 양혼목을 지니고 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다. 안 그랬다면 너를 제압했더라도 길어야 1년 쯤 살다 세상을 떠났겠지. 전화위복인 셈이랄까?”

대연 신군은 한립이 대답이 없자 홀로 중얼거렸다.

“양혼목을 빌려 준 것은 당신이 대연결의 마지막 세 구결과 괴뢰술을 전수해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오. 우린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를 한 것뿐이오.”

한립이 걸음을 멈추고 담담히 말했다.

“하하하! 녀석,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구나! 노부는 예전부터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겉으로만 순종하는 놈들을 가장 싫어했지. 네 자질이 조금만 뛰어나 노부의 공법을 익힐 수 있었더라면. 정말 제자로 받아들여 필생의 깨달음을 전수해 주었을 것을…….”

“전 이미 지금까지 익힌 공법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비술에는 흥미가 가는군요.”

한립이 대연 신군의 뜻밖의 말에 멈칫하며 입 꼬리를 올렸다.

“원하는 것이 비술이라면 실망하겠구나. 노부의 비술들은 수련한 공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말이다. 내 공법을 익히지 않으면 노부의 비술은 하나도 익히지 못할 것이다.”

“그럼 되었소. 대연결과 괴뢰술만으로도 만족하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제자들에게는 대연결의 마지막 구결을 전수하지 않고 가짜 구결만을 남겨 둔 것이오?”

“제자들은 수백 년 동안 단 한 명도 원영기에 이르지 못했다. 원영기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그들에게 대연결의 마지막 구결을 남겨주었다면 도리어 화가 되었겠지. 그런데 천죽교 제자도 아닌 네가 대연결을 익혀 나를 찾아오다니 노부가 선경지명이 있었구나.”

“대연결은 내가 극서 지방에 가서 강탈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가져다 바친 것이오.”

한립이 눈을 빛내며 불필요한 오해를 풀려했다.

“걱정 말거라! 천죽교에는 내가 거둔 제자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니 정말 강탈했다 해도 노부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우리의 거래에 영향을 미치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도 상관없소. 그런데 마지막으로 묻겠소. 정말 봉혼주를 풀 방법을 모르시오?”

“풀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지 않다면 겨우 저주 따위는 문제도 아니겠지.”

대연 신군의 대답에 한립은 크게 낙담했다.

“당신도 봉혼주를 해결할 수 없다면 추마골은 반드시 다녀와야겠군요.”

한립이 평정을 되찾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대연 신군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다가 한참 만에 말을 이었다.

“이 녀석아, 추마골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노부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추마골에 들어갈 생각을 해보았지만 기신술을 만들어내고 마음을 접었다. 그곳은 수많은 상고 시대 금제는 말할 것도 없고, 공간균열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공간균열에서는 가끔…….”

“가끔 어떻단 말이오?”

“가끔… 몇몇 공간균열은 다른 세계로 연결되어 요괴나 마귀와 같은 생명체를 불러낸단 말이다. 그것들과 마주쳤다가는 끝이라고 봐야겠지.”

“다른 세계라는 게 무슨 뜻이오?  영계와 저승을 제외하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뜻이오?”

한립이 흠칫 놀라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고 시대의 기이한 일을 담은 서책에서 몇몇 이계(異界)에 대해 언급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선계는 근본적으로 인계과 연결 될 일이 없고, 영계 또한 승천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다. 그리고 저승인 음사계는 강력한 악귀와 혼백들이 가득하지만 인계로 넘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인계와 비슷한 상고마계(上古魔界)에는 고마(古魔)들이 인계로 넘어오고 싶어 안달한다지. 그 중 강력한 고마들은 분신만 넘어와도 너는 적수가 되지 못 할 게다.”

“고마가 무엇이오?  그런 것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고마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구나. 우리와 같은 인류도 요수도 아닌데다 형태도 다양하니까.

듣기로는 상고 시대에 상고마계와 인계가 연결되어 대량의 고마들이 인간계로 넘어와 살육을 벌였다던데, 당시 상고수사들이 그들과 오랜 세월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수적으로 우세한 상고수사들이 고마들을 하나씩 없애기는 했지만 상고수사들 중에서도 무수히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많은 상고 시대 공법과 영수들이 그때를 기점으로 사라졌다 한다. 상고수사들의 몰락도 그 전쟁 때문일지도 모르지.”

대연 신군은 한립이 생전 처음 듣는 상고 시대의 비사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상고 수사들이 고마를 상대로 투쟁을 했었단 말이오?”

한립의 안색이 변했다.

고마의 위력은 모르겠으나 상고 수사들의 능력은 그들이 남긴 유적만 보아도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고마는 그 이상이 분명하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현재 마도 수사들이 수련하는 몇몇 상고마공(魔功)은 상고마계의 존재를 알게 된 수도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고마의 능력을 모방해 만들어낸 공법이란 뜻이지.

심지어 비술을 통해 고마의 마기를 빌려 스스로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키기도 하고, 듣기로는 이런 마공을 극한으로 익히면 영계로 승천하는 것이 아니라 상고 마계로 가서 고마의 일원이 된다고도 하더구나.

물론 그저 떠도는 이야기에 불과하니 입증할 방법도 없고 화신기에 이르지 않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지. 또한 네가 들어간 동안에는 아무 일도 없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노인은 차분히 설명했지만 듣고 있는 한립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도 직접 마공을 펼치는 마수들이 요마로 변이하거나 악귀의 형상을 한 기이한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을 보았기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정말 공간 균열을 통해 고마가 인간계로 넘어올 수 있다면, 천남 수도계는 벌써 위기를 겪었어야 하는 게 아니요?”

“네가 뭘 알겠느냐! 공간 균열은 진정한 이계와의 통로가 아니니 그곳을 통과해 넘어 올 수 있는 것들은 요마의 화신이거나 아니면 저계 요마에 불과하다. 그 정도 수준으로는 인간계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육신이 폭발하거나 스스로 공간 균열을 통해 달아나지.”

“그나마 다행이군요. 저계 요마나 화신만이 넘어 올 수 있고, 시간 제약이 있다니.”

한립이 긴장한 얼굴을 풀며 모란 법사들이 불러냈던 성조도 그와 비슷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너무 안심하지 말거라. 추측일 뿐이지만 만약 추마골에 고마와 같은 괴물이 나타난다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할 테니.”

“당신도 추마골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어차피 다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오?”

“난 들어가지 않았지만 교분이 깊던 몇몇 수사들이 추마골에 들어갔었다. 운이 안 좋아 들어가자마자 이계에서 넘어온 고마와 마주쳐 그 중 한 명 만이 겨우 분신으로 달아났지. 그들은 모두 노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수행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자는 극소수다.

그만 됐다! 내 해줄 말은 다 해주었으니 추마골에 가서 보물을 찾든 말든 알아서 하거라! 그리고 이건 대연결 5성 공법의 구결과 결단기 꼭두각시를 제련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다. 네게 약속한 것들 중 일부이니 일단 받아 두거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얀 옥간이 한립의 등 뒤 죽통에서 튀어나와 떨어져 내렸다.

“당신이 약조를 까먹고 있는 줄 알았소.”

한립은 기뻐하며 상대가 넘겨준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이제 노부는 휴식을 취하며 동복천 안에서 괴뢰술 연구를 계속할 터이니 괜히 성가시게 찾지 말거라.”

대연 신군이 귀찮다는 듯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한립이 즉시 등 뒤의 대나무통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노괴가 분명 무언가를 더 숨기고 있었지만 상대가 말하지 않으면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동복천이란 것은 그가 메고 있는 죽통으로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없이 귀한 보물이었다.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었는데 대연 신군이 깃든 꼭두각시의 본체가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저물대에 넣어 두었을 것이다.

* * *

날이 저물어 하늘이 어둑해지자 한립이 옥간을 거두고 날아올랐다. 한참을 날아간 그는 성 밖의 숲 속에 내려 커다란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놀랍게도 나무 밑에는 머리를 산발한 커다란 머리통이 놓여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발견했다면 잘린 머린 줄 알고 기겁 했겠지만 사실은 몸은 땅 속에 묻히고 머리만 밖으로 나온 것에 불과했다.

그의 기이한 녹색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한립이 다가가자 음산한 눈빛을 보냈다. 그것을 확인한 한립은 애써 미소 지으며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벌써 간단한 의식을 차리다니 추마골에서도 써먹을 수 있겠구나.”

한립이 중얼거리다가 묻어놓은 강시 주변에 결계를 치고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러나 바로 수련에 들어가지 않고 저물대에서 노란 영패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천극문(天極門)이라 적힌 영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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