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9
449화. 대연신군(大衍神君)
“한 사숙님을 뵙습니다.”
송 여인이 즉시 앞으로 나서 예를 취했다.
“한 형, 드디어 오셨군요. 제 시간에 못 오시는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자령도 옥 같은 얼굴로 일어나 그를 맞이했는데 뺨이 붉었다. 상대가 없을 때 혼인이나 할 것을 그랬다며 농담을 했으니 민망했던 것이다.
“약조한 바가 있으니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지.”
한립이 의미심장하게 자령을 한번 보고는 방 안으로 걸어들어 왔다. 매응도 그를 향해 예를 취했다.
한립이 탁자로 걸어가 자리를 앉자 자령도 평정을 회복하고 의자에 앉았고 송 여인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극서 지방에 가신 일은 잘되셨는지요?”
자령이 바로 추마골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한립의 일을 물었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한립을 훑었다.
“조금 성가신 일이 있어 늦었지만 해결되었소. 방금 이야기를 들어보니 추마골에는 자령 소저만 들어가고자 하는 듯한데. 송 사질과 매응 소저는 마음을 정한 것이 맞소?”
한립이 차분히 물었다.
“이미 알고 계시다니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와 매응 수사는 상의 끝에 이번 일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겨우 2, 3백 년의 수련을 줄이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고, 매응 수사도 최근에 결단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될 영단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송 여인이 조심스럽게 털어 놓은 이야기에 한립도 조심스레 말을 받았다.
“송 사질과 매 소저가 가지 않는 것은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오. 지금 만령산맥의 상황이 복잡해져서 추마골에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적어졌으니. 그런데 자령 소저는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이오?”
“한 형이 가신다면 저는 도전해 볼까 합니다. 제가 한 수사에 대해 믿음이 깊지 않습니까.”
자령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차분히 답했다.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추마골에 들어가기 전에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소.”
“예, 어떤 질문이든 하시지요.”
“일단 영촉과에 대한 정보는 확실한 거요? 추마골에서 헛걸음을 하는 일은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오.”
한립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예, 추마골에서 원영으로 빠져나왔다는 귀령문 장로가 말한 것이니 사실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령문 원영기 수사들이 추마골에 들어가려 오랜 세월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것이 정확한 위치가 담긴 옥간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지 자령이 바로 저물대에서 청록색 옥간을 꺼내 한립에게 주었다. 한립이 바로 옥간을 받아 의식을 불어넣었다.
잠시 후, 그가 자령에게 옥간을 돌려주었다.
“영촉과의 위치가 추마골 깊은 곳인데다 조금 애매모호하오.”
“귀령문 장로도 원영으로 달아나다 우연히 영촉과를 발견한 것이라 그렇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는 길에 몇 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어 영촉과를 찾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자령은 한립이 마음을 바꿀까 걱정하며 서둘러 설명했다.
“영촉과를 찾으면 반드시 추마골 내에서 조화단을 제련해 복용해야 할 텐데 나머지 보조 재료들은 준비가 된 것이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한립이 고개를 들었다.
“보조 재료들은 찾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으나 몇 년 간 충분한 수량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영촉과만 있으면 충분히 조화단을 제련해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난 추마골에 들어가겠소. 하지만 그 전에 일러둘 말이 있소. 내 능력이 되는 한해서는 수사를 보호하겠으나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닥치면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책임져야 할게요.”
“당연한 말씀이세요.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 운이 거기까지인 것이지 어찌 한 형을 원망할까요. 게다가 목숨을 보전하는 데는 저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자령이 주저 않고 답했다. 그녀의 열정적인 말투에 한립이 조금 멈칫했으나 곧 안색이 한결 풀어졌다.
“추마골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보셨소? 오는 길에 들으니 추마령이라는 것을 판매한다던데 수량에 제한을 두었다는 점이 이상하오.
어차피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수백 명이 들어가든 수 천 명이 들어가든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 말이오. 몇 만 영석에 달하는 금액을 받고 대량으로 영패를 판매한다면 많이 팔수록 이문이 남을 텐데…….”
“한 형의 통찰력은 역시 비범하십니다. 몇몇 귀령문 제자들을 통해 들으니 특정 시간에 귀령문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대량의 영석을 소모해야만 들어갈 수 있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인원에 제한이 생기는 것이고요.”
“우리 낙운종도 추마령을 세 개 분배 받았소. 내게 그 중 하나가 있으니 추마골에 들어가는 것은 문제가 아닐 테지.
대부분 수사들이 추마골 외곽을 맴돌 뿐 깊이는 들어가지 않을 테지만 원영기 수사들이나 결단기 수사라면 깊숙이 들어갈 수도 있을 거요. 골짜기 외곽에서는 위험이 크지 않으니 자령 수사가 홀로 버티다가 안으로 들어서면…….”
한립이 갑자기 입술을 달싹이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뜻밖에도 자령만 들을 수 있게 전음을 보낸 것이다.
송 여인과 매응이 그것을 보면서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쨌든 추마골 원정은 극히 위험하니 조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모두 한 형의 말대로 따를게요.”
자령이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추마골에서 다시 뵙겠소.”
한립이 자령과 이야기를 마치고 송 여인을 바라보았다.
“송 사질, 정 사형이 먼저 출발을 했다고 하던데 어디에 계시는지 아느냐.”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몇몇 친우들과 함께 먼저 출발하셨으니 이미 근방에 도착하셨겠지만 따로 연락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보아하니 정사형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도전해보려는 것 같군. 모란족 법사들도 추마골 원행에 참가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자세한 소식을 알고 있소?”
침묵하던 그가 미간을 좁히며 다시 자령에게 물었다.
“저희도 들었지만 자세한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자령도 그 문제로 고민을 했는지 바로 답했다. 그런데 한립이 턱을 쓰다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일이 있다며 방을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고 방에 남은 세 여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딜 저리 급히 가시는 거지?”
“글쎄요. 또 다른 급한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자령이 의문을 드러내자 매응도 미간을 좁히며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송 여인은 문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늙은이가 뭐하는 짓이오. 진짜 죽고 싶소? ’
한립은 태연한 얼굴로 한적한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노부는 그저 자령이란 아이가 너무 예뻐 마음이 동했을 뿐인데 뭐가 문제더냐.”
쇠로한 목소리가 한립의 머릿속에서 히죽거리며 답을 했다.
“칠정결을 펼쳐 당신의 희로애락을 내 두 번째 원영과 연결시켜 놓은 것을 벌써 잊은 게요? 여인에게 끌리는 것은 내 알바 아니지만 내게 피해가 가지 않게 행동하란 말이오.
두 번째 원영은 나와도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소. 게다가 자령의 현재 외모는 특별히 출중하지도 않은데 무슨 헛소리요! 왕년에 수많은 미인들을 첩실로 두고 살았다는 소리는 허풍이었소? 그냥 아무 여인이나 보면 마음이 동하는 거요?”
한립이 여전히 노기가 가시지 않아 차갑게 쏘아붙였다.
“노부가 칠정결을 펼친 것은 네 주(主) 의식에 깃들려는 것이었는데, 겨우 원영 초기 수사가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해 놓았을 줄 누가 알았더냐. 칠정결이 수사의 의식을 조종하지는 못해도 희로애락을 통제하는 대단한 능력인데 이런 꼴이 되다니. 게다가 그 아이가 아무리 진짜 모습을 가리고 있더라도 어찌 내 의식을 피할 수 있을까.”
노인이 툴툴거렸다.
“아무리 당신의 칠정결이 대단해도 목표를 잘못 정한 것이 문제 아니겠소? 내가 두 번째 원영과 약간의 감정을 공유한다지만 주(主) 의식이 아닌 바에야 그 정도는 사소한 장애일 뿐이니까. 당신이 천죽교를 창립한 시조이자 대연결을 만들어낸 당년의 대연 신군이라는 사실이 기가 찰 따름이오.
그런 자가 꼭두각시에 깃들어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의식과 대연결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도 믿지 않았을 것이오. 그런데 그런 자가 아무 여인에게나 마음이 흔들려서 괜히 나까지 충동질하다니! 다시 한 번 더 이런 짓을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한립이 음산하게 경고했다.
“녀석아, 어차피 나는 네 양혼목으로 만든 구슬의 도움을 받아 길어야 몇 십 년 내로 재로 변해 사라질 것 아니더냐. 연구 중이던 꼭두각시의 완성이 코앞만 아니었다면 어서 죽어 환생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꼭두각시에 붙어서 만 년 넘게 살았으니 아주 질릴 대로 질려 버렸지. 너도 만년 넘게 여자라고는 보지 못하다가 세상에 나오면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인이 콧김을 뿜어가며 신경질을 부렸다. 이에 한립이 골치가 아파져 말없이 코끝을 문질렀다.
등에 맨 죽통 속에 숨겨 놓은 늙은 괴물은 상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대연결의 마지막 구결들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꼭두각시 제련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약조하지만 않았다면 벌써 멸해 버렸을 것이다.
더욱 열 받는 일은 상대의 의식이 기이할 정도로 강해서 오갈 데 없는 의식 주제에 추혼술이 전혀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반대로 상대가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의식을 조종하려 들어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연 신군이라는 만 년 넘게 산 늙은 괴물을 짊어지고 다니게 된 것이다.
“꼭두각시에 깃든 후에는 어찌할지 생각하지 않은 겁니까?”
“내가 펼쳤던 기신술이 그리 간단한 것인 줄 아느냐? 당시 나는 뛰어난 자질만 믿고 천죽교를 창립하고 대연결이나 괴뢰술을 연구하는 등 너무 많은 일을 하려했다. 그렇게 수명의 절반을 수련이 아니라 다른 곳에 허비했기 때문에 겨우 원영 후기에 머문 것이지. 그래도 마음대로 살아가며 적수가 없는 편한 삶이었지만 말이다”
“적수가 없었다니…….”
한립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내가 허풍이라도 떠는 것 같으냐? 줄곧 조용히 활동하며 몇몇 이름난 수사들에게만 도전했기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때 내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전부 최정상에 있는 이들 뿐이었다.
천남만 해도 정마 양도 제1의 수사들이 내게 패했었지. 얼마나 처참하게 패했는지 스스로 극서 지역을 내게 넘기고 다른 세력을 전부 철수시켰다.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사막의 지형만으로 천남 수사들의 극서 지역 침략을 막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극서 지역이 아무리 척박해도 국가가 두 개나 있는 곳이다. 큰 종문 몇 개가 들어선다 해도 이상할 것 없지.”
대연 신군의 말투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극서 지방을 대결을 통해 얻어냈다고요?”
“그 뿐 아니라 두 늙은이가 맹세까지 했었지. 만년 내로는 그들의 자손의 손자까지도 절대 극서 지역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노인은 아주 의기양양했다.
“그럴 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들의 자손을 전부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느냐. 또한 당시 난 천 개가 넘는 꼭두각시를 지니고 있어 여러 세력이 연합해 공격해 와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허나 정마 양도의 수사들이 지금까지 극서 지방을 놔둔 것은 나도 정말 의외구나. 설마 그들 사조의 말을 이렇게나 잘 지키고 있었다니.”
대연 신군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한립은 늙은이가 허풍 떠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엄청난 실력자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말한 꼭두각시들이 축기기 수준만 되었어도 놀라 까무러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