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7
447화. 원행을 떠나기 전
한립은 제자리에 서서 꼼짝을 안 했고 제혼은 어떤 명이라도 받은 듯 콧김을 뿜어냈다. 노란 기운이 귀기가 가득한 여인의 얼굴을 휘감으려했다.
“대체 이건!”
순식간에 기운에 빨려들어 가자 여인이 놀라 뒤로 물러나려했으나 제혼의 능력은 비범했다.
여인의 얼굴을 한 귀기는 노란 기운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스스로 노란 기운에 휘감긴 안개를 절단하고 물러났다.
녹색 안개가 요동치다가 다시 서둘러 암석 위의 시소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일단 육체를 찾고 다시 한립을 공격할 작정이었다.
한립이 귀기가 가득한 여인의 얼굴이 달아나는 것을 보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차분히 금빛에 감싸인 열댓 개의 못을 향해 손짓하자 녹색 안개가 막 시소의 육체로 들어가려는 찰나 거대한 못들이 박혀 들어갔다.
푸푸푸푸푹!
강철과 같은 단단한 피부를 지닌 시소였지만 거대한 못이 파고드는 것은 전혀 막지 못했다.
동시에 거대 못들의 표면에 있던 금빛 전호가 하나로 모여 그물을 형성했고 단번에 시소를 감싸버렸다.
시소의 몸에서 비린내가 진동을 하더니 체내로 들어갔던 원신이 튕겨 나왔다. 놀랍게도 녹색 안개는 들어가기 전보다 더욱 양이 많아져 있었고 그 속으로 흐릿하게 두 개의 얼굴이 보였다.
두 얼굴은 절박하게 다시 시소의 육체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은색 못에서 번뜩이는 금빛 뇌전에 괴성을 질러댔다.
“과연 시소의 체내에 분신을 숨겨 두었구나!”
한립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자 기뻐하며 의식을 이용해 제혼에게 명을 내렸다. 동시에 제혼의 커다란 코가 다시 벌름거리며 이전보다 더욱 강렬한 색상의 노란 기운이 나와 두 얼굴을 품은 안개를 향해 나아갔다.
끼하학!
이번에는 저번처럼 운이 따르지 않아 녹색 안개 속의 얼굴들이 그대로 제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혼이 입을 크게 벌려 그것을 삼키고는 흥분해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한립이 그것을 보며 피식 웃고는 거대한 은색 침을 회수해 시소의 육체로 걸어갔다.
암석 위의 시소는 여전히 은색 사슬로 꽁꽁 감겨 있었다. 그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겨 금색 검기를 분출했다.
탕!
검기에 맞은 은색 사슬은 멀쩡했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한립은 입을 벌려 금색 비검을 뿜어냈다.
그가 술법을 발동해 눈에 띄게 밝아진 금빛이 소리 없이 은색 사슬을 갈랐다. 금빛이 지나고 은색 사슬에는 작은 틈이 생겼지만 그뿐이었다.
이번에는 한립도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시소와 같은 강력한 강시를 속박하는 은색 사슬이 평범한 법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경정을 첨가한 청죽봉운검의 날카로운 공격을 이겨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가 법결을 계속해서 날리자 비검이 같은 부위를 조준해 날아갔다. 그렇게 몇 번을 하고서야 은색 사슬이 잘려나갔다.
한립이 호기심에 은색 사슬을 향해 손을 뻗자 시소를 구속하던 사슬이 뱀처럼 움직여 두 갈래의 은빛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은색 사슬을 손끝으로 만져보고 매끈해 보이는 표면에 주술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섬세하게 주술을 새긴 것은 천남 수도계에서 나올 물건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보기 드문 고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 한립은 은빛 사실 두 개를 챙겨 넣었다. 기회가 되면 사슬을 고칠 수 있는지 그리고 위력은 어떤지 알아볼 요량이었다.
그가 다시 흉악한 생김새의 시소의 육체를 돌아보았다.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한립의 손에서 열 개의 푸른 실이 분출되어 시소의 전신에 박혔다.
시소를 관찰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팔이 하나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련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육체는 일반적은 법보로도 상처를 입히기 힘들었고 몸속에 들어있는 시화(尸火)나 시독(尸毒)도 위력이 남달랐다.
잠시 시소의 잘려나간 팔뚝을 보며 한립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마치자 그가 허리춤의 영수대를 때리니 삼색 서금충 한 무리가 솟아올라 시소의 잘려진 팔로 몰려들었다.
잠시 후 반지르르한 삼색의 팔뚝이 나타났다. 녹색 털이 자라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다른 팔과 똑같이 생겼다.
한립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고는 저물대에서 몇 벌의 진법 깃발과 진법 원반 등을 꺼내 석실 안에 진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 * *
암석 속에서 두 달 넘게 있던 한립이 다시 자신의 거처가 있는 산봉우리에 나타났을 때는 안색이 더없이 창백하고 원기를 크게 상한 모습이었다.
은월을 소환한 그는 두말할 것 없이 바로 밀실로 들어가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다시 한 달이 지나고 밀실의 석문이 열렸을 때 그는 차분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주인님, 육익상공이 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문 밖을 지키고 서 있던 은월이 그가 나오자마자 공손히 알려주었다.
“가보자꾸나.”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며 성큼성큼 요수를 가둬둔 석실로 향했다. 금제가 걸린 석문의 구멍을 통해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육익상공은 서로를 한차례 잡아먹고 진화해 류미가 넘겨주었을 때 보다 훨씬 커져 있었고 뿜어내는 한기도 강해져 있었다.
육익상공의 알들은 새까맣게 빛이 났고 얼음덩이에 갇혀 짙은 한기를 뿜어냈다. 한립의 시선이 몇몇 거대한 지네들에게 옮겨갔다. 그들은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고개를 쳐들고 석문 방향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의 위협에 한립이 개의치 않고 알들을 관찰했다.
“24개면 충분하겠군. 은월, 류미에게 일러 영수를 데려가라 하거라.”
“예, 바로 전음부를 날리겠습니다.”
은월이 품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던져버리자 부적이 공중에서 붉은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육익상공의 알들을 확인한 한립이 서금충이 있는 옆 석실로 이동했다.
한동안 녹색 액체는 주로 육익상공들을 기르는데 사용해서 금색 서금충들의 변화는 눈여겨 살피지 않았다.
금색 서금충들은 이전과 별다른 변화 없이 커다란 금색 구슬처럼 뭉쳐서 한립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준 나무에 걸려 있었다.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한번만 더 진화를 하면 성체가 될 것 같은데 성장 속도가 너무 느려 답답했다. 아마 당분간은 진화하지 않을 듯했다.
“은월, 현천선등은 어찌 되었지?”
“그것이……. 주인님께서 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은월이 무언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렸다. 한립은 그녀의 반응에 의아했지만 캐묻지 않고 그녀를 따라 약재 밭으로 향했다.
땅에 묻혀 있는 현천선등의 뿌리를 보고 한립이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노랗게 말라버렸던 뿌리가 초록색으로 변했지만 크기도 그대로였고 이파리가 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이지?”
한립이 의식을 퍼트려 보아도 현천선등의 뿌리에서는 전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현천선등 뿌리에 녹색 액체를 몇 차례 부어주었지만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만년영유와 순액을 함께 부어주니 효과가 있더군요. 뿌리가 녹색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현천선등이 살아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로는 전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은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응이 있었다니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살려낼 방법을 모를 뿐이지.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으니 일단 극서 지방에 다녀온 후에 다시 살펴보자꾸나. 시간이 얼마 없으니 곧 출발을 해야겠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려고요?”
“내일! 잠시 정 사형에게 인사를 하고 거처를 봉인한 후 중요한 물건들은 모두 챙겨 떠날 것이다. 극서 지방을 다녀오는 일은 위험 하지는 않겠으나 반드시 3년 내에 돌아와야 해. 그래야 추마골에 들어갈 가장 적합한 시기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은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곧 둘은 약재원에서 걸어 나와 한립은 은발 노인을 만나러 갔고 은월은 거처를 정리하며 떠날 준비에 들어갔다.
* * *
이튿날 아침, 하룻밤 휴식을 취한 한립이 은월을 데리고 거처를 나서는데 모패령이 조용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간 수련을 위해 필요한 단약을 남겨 주었는데 어찌 수련을 하지 않고 나와 있는 것이더냐.”
한립이 모패령을 보고 차분히 물었다.
“공자! 생각해 보았는데 수련이 고비에 이른 것도 아니니 함께 다녀오고 싶습니다. 시첩으로서 가까이에서 공자를 모시는 것이 제 본분이 아닐 지요.”
모패령이 고개를 숙였지만 붉어진 두 뺨은 숨길 수 없었다. 매력적인 얼굴에 말랐지만 풍만한 신체를 지닌 그녀의 모습은 남자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한립이 순간 멈칫했지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고 싶다니 그러자꾸나. 가는 길에 수련 상에 지도를 받으면 결단에도 더 빨리 이를 수 있을 테지.”
“감사합니다.”
모패령이 그 말을 듣고 신이 나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한립이 미소를 짓고는 소매를 털어 하얀 어풍차를 꺼냈다.
은월은 그것을 보고 빙그레 웃더니 하얀 빛으로 변해 한립의 소매 안으로 사라졌다. 모패령이 은월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붉은 입술을 가렸다.
“은월에 대해서는 가면서 말해주마. 타거라!”
“예, 공자!”
모패령도 평범한 수사는 아니라서 금방 놀란 기색을 감추고 조용히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한 발이 마차에 닿는 순간 푸른빛이 번뜩이며 한립도 어풍차에 올랐다. 그가 수결을 맺어 하얀 빛의 보호막이 어풍차를 감쌌고 맑은 울림이 들려오자 어풍차는 하얀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낙운종 전체에 한립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한 장로가 마도 수사와의 대결에서 원기를 상해 한동안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운몽산의 다른 두 종파가 그 소식을 듣고 수사들을 파견해 한 장로의 상태를 물었지만 은발 노인이 대충 상대해 돌려보냈고 다른 수사들도 안부를 물으러 왔다가 별 소득 없이 돌아가고는 했다.
이렇게 최근 명성이 자자하던 낙운종 한 장로의 부상이 심각하다는 소식이 계국 전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심지어 다른 국가의 종파들도 주의 깊게 그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다들 소문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어쨌든 한립이 진국 음라종의 장로를 격살한 것은 사실이었고, 원영 초기 수사가 원영 중기 수사를 상대했으니 원기를 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일로 한립은 천한 노괴와도 비견되는 실력 있는 수사로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낙운종의 명성도 높아져 친분을 쌓으려는 수사들도 많아졌다.
짧은 시간에 낙운종이 계국 제 일 문파의 대접을 받게 되자 낙운종 제자들도 더없이 기뻐했다.
* * *
천남의 동유국(東裕國)은 사대 세력에 속하지 않은 극소수 국가 중 하나였다. 이런 국가들이 면적이 작고 수련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몇몇 국가들의 국토는 거대했고 수련 자원은 풍부해서 천남 전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기도 했다.
그런 국가들이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지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구국맹은 너무 멀리 떨어져 아무 관련도 없었지만 다른 삼대 세력의 국경과 딱 붙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정마 양도의 종파가 섞여 있었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작은 문파들도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종파를 압도할 만한 세력이 없어 동유국을 대표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삼대 세력의 끊임없는 암중 투쟁 속에서도 동유국과 여러 나라들은 결국에는 중립지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런 나라들의 종파들도 상당수가 정도나 마도 혹은 천도맹의 지지를 받아 성장했다. 그렇게 백여 년간 세력 간의 균형이 유지 되면서 중립국으로 산수들이 몰려들었고 이런 나라들은 더욱 번화하고 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