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6
446화. 점령
한립이 저물대에서 옥갑 하나를 꺼내 은월에게 넘겼다.
“주인님, 현천선등을 제가 맡아도 될까요?”
은월이 한눈에 옥갑을 알아보고 물었다.
“어차피 살려내지 못하면 귀한 제련 재료에 불과하다. 난 그 동안 지목령영으로 두 번째 원영을 만들어내는 일을 해야 하고, 음라종 장로의 저물대에서 얻은 강시 제련 법결을 이용해 시소(尸魈)도 처리해야하니 도저히 틈이 나지 않는구나. 시소를 그냥 운몽산 산속에 두는 것도 나중에 어떤 후환이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거처 내의 일은 네게 맡길 수밖에.”
한립이 천천히 사정을 설명했다.
“예, 저야 뭐 당연히 주인님의 분부에 따라야지요.”
은월이 옥갑을 받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한립이 그녀에게 몇 마디를 더 당부하고 대청을 나서려는데 은월이 주저하다 그를 불렀다.
“주인님. 오랫동안 고민하던 것이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은월이 큰 눈을 깜빡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물어 보거라.”
한립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은월을 바라보았다.
“주인님의 기령이 된 이후 한 번도 저를 기령의 형태로 비검에 더하시거나 소환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것이더냐?”
의외의 질문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그저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은월이 기령에 불과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넌 네 스스로를 평범한 기령이라고 생각하더냐? 이지를 상실한 진짜 기령이었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없었겠지. 물론 기령을 법보에 더해 이용하면 위력이 크게 느는 것은 사실이지만 강적을 상대하다보면 기령 자체의 원기가 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네가 여우의 몸을 빌려 나를 돕는 바가 적지 않은데 원기가 상하게 두는 것은 오히려 내게 해가 되겠지.”
한립이 이유를 말해주고는 즉시 몸을 돌려 대청을 나갔다. 대청 안에 남은 은월이 생각에 잠겼다.
* * *
이튿날 한립은 동굴의 밀실 속에서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가부좌를 하고 바닥에 앉아 옅은 푸른색 옥간을 들고 연구하고 있었다. 바로 신여음이 남겨둔 현모화영대법이 적힌 옥간이었다.
그가 의식을 불러내 두 눈을 감고는 수결을 맺었다.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그의 두개골 위로 푸른빛이 반짝이며 원영이 나타났다. 원영은 몇 년이 지났다고 훨씬 튼튼하고 체구도 커져 있었다.
원영이 한립의 머리 위에 잠시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몸에 푸른빛이 반짝이며 허공에 둥실 뜨더니 천천히 비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해 보였지만 점점 비행에 능숙해졌고 곧 밀실 곳곳에 푸른빛이 반짝 거리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잠시 후 원영이 갑자기 밀실 구석에 멈춰서서 작고 보드라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니 그 자리에서 소실되었다.
다시 한립의 머리 위에 나타난 원영의 작은 얼굴은 조금 창백해 보였다. 순식간에 적잖은 원기를 소모한 것이다.
원영이 기지개를 펴더니 다시 푸른빛으로 변해 한립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한립이 눈꺼풀을 꿈틀거리다 두 눈을 떴다.
“이제 안정이 되었구나. 노괴들의 원영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어.”
한립이 중얼거리다가 한 손으로 저물대를 스쳤다. 여러 가지 부적으로 봉인되어 있는 옥갑이 나타났다.
그가 소매를 털자 부적들이 스스로 떨어져 내렸고 옥갑의 뚜껑이 열리며 금빛이 찬란한 구슬이 드러났다.
미리 봉인해 둔 지목령영이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그가 손가락을 금빛 구슬로 가져갔다.
쿠릉!
천둥소리가 들리며 미세한 뇌전들이 한립의 손끝으로 스며들었고 보이지 않던 청록색의 조그만 인물이 얼굴을 드러냈다.
지목령영의 본체는 전신에 새까만 침이 박혀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한립이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자세히 지목령영과 새까만 침들을 살펴보았다.
모든 것들이 예상대로 흘러가자 그가 손가락으로 지목령영의 미간을 가리켰다.
파츳!
손끝에서 돌연 콩알만 한 녹색 빛덩이가 나타나 길게 늘어지더니 지목령영의 미간 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이 신중한 얼굴로 기다리기 시작했다. 녹색 빛덩이로 지목령영의 내부를 탐색하는 듯했다. 장장 반 시진이 지나고 한립이 길게 한숨을 쉬며 녹색 기운을 뽑아냈다.
턱을 쓰다듬던 그가 한손을 들어 지목영령의 전신을 빼곡하게 찌르고 있는 검은 침들을 소매 안으로 회수했다. 지목영령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옥함 속에 늘어져있었다.
한립이 마음을 정한 듯 지체 없이 수인을 맺었다.
그가 법결을 날리자 지목영령이 옥함에서 떠올라 그의 얼굴 앞 허공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한립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두개골에서 푸른빛이 방출되며 그의 원영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원영도 실실 웃지 않고 얼굴 가득 긴장감이 가득했다. 원영은 고개를 들어 새까만 눈으로 지목령영을 바라보다가 곧 지목영령과 마주 앉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목령영은 거의 두 촌 크기였고 한립의 원영은 겨우 한 촌 크기라 크게 대비가 되었다.
이때 한립의 원영이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입을 돌려 정순한 영기를 뿜어내 지목령영의 얼굴로 쏘아 보냈다.
동시에 지목영령이 두 눈을 떴지만 초점이 없는 것이 넋이 나간 것 같았다.
한립의 원영이 심각한 얼굴로 작은 두 손을 움직여 댔고 눈에서 푸른 빛줄기 몇 개가 쏘아져 나가 지목영령의 눈 속으로 주입되었다.
동시에 둘의 신형이 진동하며 지목영령이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댔다. 지목령영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해 구르는 것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반대로 한립의 원영은 허공에 그대로 떠있었다.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가득했지만 간신히 참아내는 중인 듯했다.
밀실 안을 가득 매운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꼬박 하루를 이어지다가 점차 줄어들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고 그가 피곤한 기색으로 밀실을 나설 때는 은은히 들뜬 기색이 느껴졌다.
처음 지목령영을 얻었을 때는 도리어 먹힐 위험이 있었기에 함부로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음경에 기재된 혼을 분리하는 이혼술(離魂術)의 비술을 펼쳐두자 지목령영은 새까만 침들의 작용 아래 점점 이지를 상실해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지목영령의 의식은 약해졌고 그는 원영 후기와 비슷한 강력한 의식을 지녔으니 성공적으로 제련을 마칠 수 있었다.
아직 그의 부분 의식이 지목령영과 동화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강력한 의식으로 그런 일을 두고 볼 리 없었다.
게다가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부분 의식을 포기하면 그만이었다. 의식에 조금 손상은 가겠지만 큰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밀실을 나와 하루를 쉬고는 바로 시장으로가 제련 재료들을 구매했고 또 다른 밀실에서 열흘 넘게 지내다가 나왔다.
그의 손에는 자유자재로 크기가 조절 가능한 열댓 개의 못 법기가 들려있었다. 한립은 못 형태의 법기들을 들고 설운호를 잡으러 갔던 습지로 날아갔다.
아직 암석 속 남아있는 시소를 확인한 그가 안심했다.
한립은 저물대 속에서 금색 부적이 든 옥함을 꺼내 준비한 거대한 은색 못들을 늘어뜨리고 시소를 바라보았다.
시소의 모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전신은 녹색 털로 뒤덮여 있었고 여전히 팔은 하나뿐이었으며 얇은 은색 사슬들이 그것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
한립은 석실의 모습을 확인해 이상한 점이 없는지 확인하고 손에 들고 있는 옥함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의 손이 영수대를 스치자 검은 빛이 쏘아져 나와 한 자 크기의 작은 제혼이 나타났다.
이상한 것은 제혼이 암석 위에 앉아 있는 강시를 보자마자 무어라 끽끽거리더니 한립이 시키기도 전에 검은 기운을 일으켜 몸집을 부풀렸다는 점이었다.
제혼도 이곳이 협소한 것을 알고 한 장 크기에서 멈추기는 했으나 시선은 시소에게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미간을 좁히다가 의식을 이용해 제혼을 안정시켰다. 원숭이가 즉시 한립의 발치에 엎드리며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흠?”
그런데 제혼의 등을 본 한립의 얼굴이 묘해졌다.
등 쪽의 핏빛 그림자가 더욱 진해진 것이다. 악귀의 형상이 어찌나 진해졌는지 거의 볼록하게 튀어나와 당장이라도 살을 가르고 나올 듯했다.
최근 두 번이나 대량으로 기운을 흡수하더니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립은 놀랐지만 약간의 기대감도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제혼의 변화를 살펴볼 때가 아니었다.
그가 제혼을 불러낸 것은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립이 한 손으로 저물대를 스쳐 옥으로 만든 쪽지를 불러냈다. 이것은 흑의 청년의 의식을 뒤진 후 그의 상투머리에서 찾아낸 물건이었다.
그 안에는 음라종이 비열한 수단을 써서 모은 열댓 개의 강시 제련법들이 복제되어 있었다.
죽은 음라종 장로는 강시 제련에 관심이 많았는지 그 위에 자신의 견해와 해석을 따로 적어 놓기까지 했다. 원래의 제련법을 개선해 위력을 더욱 높일 방안이었다.
안타깝게도 방법은 찾았지만 적당한 시체를 찾지 못해 써먹지 못한 수법이었다.
그 중에 하나가 천절마시였는데 흑의인 청년이 남겨놓은 강시 제련법 중 가장 최상의 것으로 강력한 행시(行尸)가 필요했다. 행시의 본연의 의식을 지우고 각종 비술을 통해 제련을 하면 더욱 흉악한 마시로 거듭난다
이런 마시의 능력은 근본적으로 행시 본연의 수행에 따라 달라졌다.
이곳에 갇힌 시소라면 아주 적절한 재료가 될 수 있었기에 한립은 내용을 읽자마자 시소를 떠올렸다. 최상의 재료와 제련 방법이 모두 있는데 그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러나 마시를 제련하기 이전에 두 번째 원영을 제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소 자체의 의식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시소의 원신이 들어있던 옥함을 함께 가지고 왔다.
한립이 거대한 은색 못들을 바라보며 팔을 펼치자 은색 못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의 입에서 주문이 새어나오고 은빛이 밀실 안을 퍼져나갔다.
쿠릉! 쿠르릉!
두 손을 합장하자 천둥소리가 들리고 굵직한 금빛 뇌전들이 나타났다. 한립이 무표정하게 두 팔을 펼쳤다.
열댓 개의 뇌전들이 뻗어 나가 각각의 못을 내리쳤다.
“가라.”
그가 금빛과 은빛이 어우러진 가운데 법결을 날렸고 거대 못이 은색 빛줄기로 변해 암석 위의 시소 사지와 몸통의 급소를 노리고 멈추었다.
준비를 마친 한립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금색 부적이 붙은 옥함을 쳐다보았다. 그가 앞에 내려놓은 옥함에 입으로 푸른 기운을 뱉어내자 금빛 부적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쉭!
옥함이 누군가에게 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몇 장 뒤로 물러났다. 한립이 동공을 수축하며 옥함을 시선으로 쫓았다.
짙은 녹색 안개가 옥함 속에서 흘러넘치더니 환호성이 들려왔다.
“흐하하하하! 자유다. 어느 멍청한 놈이 나를 풀어줬는지 모르겠지만 네 놈의 피와 살로 배도 채워야겠다. ……워, 원영기 수사?”
녹색 안개가 여인의 얼굴로 뭉치니 놀랍게도 여우가 은월로 변한 모습과 똑같았다. 다만 눈이 초록색으로 물들어 사악하게 보이는 것만이 달랐다.
그녀가 한립을 보고는 순간 놀라 멍해졌다. 한립도 상대의 진짜 얼굴을 보고 조금 당황했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은월이 여우 요수의 몸을 빌려 화형(和型)을 하는 것은 처음에는 시소의 통제를 받아 이루어졌으니 옥함에 봉인된 원주인의 모습과 같다하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녹색 안개 속의 얼굴도 곧 냉소하더니 입에서 음산한 기운을 내뿜어 몸집을 키우고는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리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시소가 생전에 얼마나 대단한 수행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오랜 세월 갇혀 지내던 원신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