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4
444화. 마기는 삼키고 귀기는 잡아먹고
겨우 깃발을 한번 흔들었을 뿐인데 이런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다니 음라종의 보물이라고 불릴만했다. 한립도 대경검진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이런 광경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무수히 많은 검은 실들이 청년을 감싼 안개 속에서 쏘아져 나왔다.
검진도 금빛을 반짝이며 발동해 무수히 많은 금빛 실들이 검은 실들을 막아섰다. 곧 검은 실들이 조각 나서 떨어져 내렸지만 즉시 안개로 흩어지며 다시 청년의 곁으로 흡수되었다.
“헉!”
한립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녹색 안개 속의 흑의인 청년이 놀라 소리쳤다.
귀라번이 만들어내는 음혼사는 질기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는데 상대의 검진을 깨트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서지고 만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즉시 귀라번의 최대 역량을 끌어 쓰기로 마음먹었다. 청년은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녹색 안개 속으로 던져 넣었다.
괴이한 주문이 안개 속에서 흘러나오더니 차가운 바람이 안개를 감싸고 불어댔다. 그러자 청록색 깃발이 순식간에 두 장 가까이 커져서 본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이 그것을 확인하고 안색이 달라졌다.
“이렇게 많은 혼백을 제련해 깃발을 만들었단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륙한 것이냐.”
한립의 목소리와 말투가 험악해졌다.
청록색 깃발의 표면에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셀 수 없이 많은 혼백들이 고통스런 표정으로 꿈틀거리니 정말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걸 누가 세고 있지? 아마 십만? 혹은 수십만 명 쯤 되겠지. 그 중에서 수백 개는 수도자들의 혼백일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귀라번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녹색 안개 속에서 청년의 서늘한 대답이 들려왔다. 한립은 침묵하며 냉랭히 녹색 안개를 노려보았다.
“죽일 놈들.”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한 놈들은 전부 이 깃발 속에 들어 있지! 너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청년이 한립을 비웃으며 즉시 붉은 법결을 거대한 깃발로 날렸다.
녹색 빛이 크게 번지며 깃발 위로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 검은 기운들이 뿜어져 나왔고 음산한 바람도 더욱 거세졌다.
파팍!
빛이 번쩍이며 도깨비불 같은 것들이 번쩍였고 푸른 연기와 함께 거대한 해골머리가 그 안에서 빠져나왔다.
해골머리들 중 가장 큰 녀석은 거대한 소뿔이 두 갈래로 솟아 있었는데 얼굴은 인간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멀쩡했다.
‘생전에 화형기에 이른 요수의 해골이란 말인가? ’
그 외에도 검은 동굴에서는 각양각색의 해골들이 귀화(鬼火)에 휩싸여 쏟아져 나왔다.
별안간 흑의 청년의 주변에 백 개가 넘는 해골들이 떠오른 것이다.
키아하학!
하얀 뼈를 드러낸 해골들이 입에서 녹색 귀화를 뿜어내며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몇 장을 날아가지 못해 무수히 많은 금빛 실선들과 마주쳤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금빛 실선들을 지나친 해골들의 표면에 무수히 많은 금이 갔지만 녹색 빛이 반짝이고 바로 원상 복구되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진을 지나쳐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순간 ‘멈칫’ 했지만 곧 상황을 파악했다. 해골들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아니라 혼백을 모아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검사가 강력해도 형태가 없는 기운을 베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고 다시 움직였다.
해골머리의 전방에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금빛 그물이 출현했다. 상대가 귀기를 이용해 공격하였으니 벽사신뢰로 막으려는 것이었다.
꽈꽝! 쿠쿠쿵!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번지며 금빛 그물에서 뇌전이 번뜩여 많은 해골들을 죽였지만 물 밀 듯이 밀려드는 해골들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한립도 미간을 좁혔다.
일반적인 귀화라면 벽사신뢰와 닿자마자 사라져야 옳았는데 해골머리 모양의 귀화들은 뇌전의 위력에 버티고 있었다.
흑의인 청년은 깃발이 불러낸 해골들이 벽사신뢰와 겨루는 모습을 보고 드디어 미소를 되찾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귀라번이 완벽하기만 했어도 걱정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난번 전쟁 이후 대량의 혼백을 흡수해 복구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청년이 교활한 웃음을 유지하며 깃발을 향해 계속 법결을 날려 보냈고 깃발 위쪽의 허공에 만들어진 검은 구멍도 점차 크기가 커졌다.
키하학!
더 많은 해골들이 쏟아져 나와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일순간 한립은 사방에서 울리는 귀곡성에 잠식되었다.
그러나 한립은 흔들림 없이 한손으로 영수대를 스쳤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은 빛줄기가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는데 전신이 새까만 털로 뒤덮인 작은 원숭이, 제혼이었다.
아직 잠기운에 취해서 눈을 깜빡이던 요수가 커다란 코를 벌름거리더니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모여 있는 해골들을 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본래 흉흉한 기세로 몰려들던 해골들이 제혼을 본 순간 화들짝 놀라 허공에서 멈춰 섰다. 동시에 기이한 귀곡성도 잦아들었다.
해골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흑의인 청년이 기이한 광경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놀라 한 손을 펼치니 회색빛이 입 안에서 나와 그의 손가락을 넘나들었다.
동시에 다섯 손가락이 잘려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푸푸푸푸푹!
손가락들이 터져버리며 그 안에서 핏빛 안개가 튀어나와 해골들의 우두머리인 뿔 달인 해골에게 날아갔다.
쿠르릉!
해골이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핏빛 기운을 흡수했고 전신에 귀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다른 해골들도 우두머리 해골의 압박에 못 이겨 입을 벌려 녹색 귀화를 쏘아 보냈다.
제혼이 맹렬히 제 가슴을 두드리더니 검은 기운이 몸을 휘감아 순식간에 몇 장 크기로 커졌다. 거대한 코에서 노란 콧바람이 새어나와 쏘아져 나갔다.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날아들던 귀화들이 노란 기운에 휩싸였다. 그러고도 노란 기운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뒤쪽의 해골 무리로 돌진했다.
빛이 닿은 곳마다 해골머리들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휩쓸렸다. 이에 해골들이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달아나자 뿔 달린 해골은 분노에 찬 울음소리를 내었다.
뿔 달린 해골의 눈이 녹색 빛으로 빛나더니 대량의 녹색 연기를 전신에서 뿜어내며 무형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두 장 크기의 뿔이 달린 악귀로 변해 새까만 검은 뇌화를 뿜어냈다.
엄청난 양의 검은 뇌화가 노란 기운을 만났지만 기척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악귀도 그것을 보고는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노란 기운이 악귀를 덮쳤고 기운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제혼이 콧속의 노란 기운을 킁킁거릴 때마다 허공의 해골들이 사라져갔다.
대경검진 속에 갇힌 흑의인 청년은 대경실색했다.
비록 한립이 괴이한 거대 원숭이 요수를 데리고 다니며 강시의 기운을 흡수한다고는 들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음라종 동갑시를 상대하는 것과 귀라번이 만들어낸 해골들을 해치우는 것은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해골들이 반항조차 못하고 거대 원숭이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자 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기는 삼키고 귀기는 잡아먹는 요수를 지닌 줄 알았다면 절대 그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라종 내의 어떤 장로라도 저 요수 앞에서는 어쩌지 못할 것이다. 저런 존재는 음라종에게 금뢰죽보다 더 위험했다.
흑의인 청년은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두 장 거리까지 가까워진 금빛 실선을 보며 서둘러 저물대를 뒤졌다.
예닐곱 개의 보물들이 분분히 솟아올라 검진을 공격했지만 금빛들이 반짝이며 잘게 썰려 떨어져 내렸다.
청년은 이제 핏기 하나 없이 질려갔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무슨 종파의 보물이니 하는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가 두 손을 뻗어 허공의 귀라번을 단단히 쥐더니 이를 악물고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와 깃발이 하나가 되어 음산한 녹색 안개로 변해 하늘 높이 솟아 오른 것이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귀라번의 위력으로 검진의 공격을 버티고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검진 안에서 죽는 수밖에 없었다.
‘어딜 달아나려고!’
한립이 그것을 보고 입을 벌려 금빛 구슬을 뿜어냈다. 거대한 금빛 그물이 검진 위쪽을 뒤덮으며 방원 수십 장을 막아 버렸다.
그때 흑의 청년이 변한 음산한 안개가 수많은 금빛 실들과 교전하고 있었다. 금빛이 번쩍일 때마다 음산한 안개의 양이 대폭 줄어들었다.
한 곳으로 모여든 금빛 실들이 너무 촘촘해서 단번에 뚫고 나가려던 그를 막아선 것이다. 청년은 완전히 투지를 상실했다.
“날 이렇게 죽일 셈입니까? 봉혼주 해결 방법을 알아내야지요.”
안개가 아주 조금 밖에 남지 않자 청년이 소리쳤다.
“그거라면 수사가 걱정해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원신을 통해 알아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추혼술(抽魂術) 따위로 그게 가능할 성…… 으, 으악!”
청년이 두려움에 무언가를 웅얼거리다가 안개가 전부 사라지자 비명을 지르며 몸이 산산조각 났다. 그 틈을 타서 녹색 빛덩이가 그의 원영을 감싸 탈출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해둔 벽사신뢰의 그물이 한립의 명에 따라 수축했다. 이리저리 달아나려 해보아도 사방에서 금빛 그물이 조여 드는 모습에 원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추혼술을 쓸 속셈이라면 스스로 원영을 폭파해 버리겠다.”
원기가 깃든 처절한 절규였다. 한립도 미간을 좁히며 금빛 그물의 수축을 멈추었다. 원영이 그것을 보고 희망이 생겼는지 서둘러 중얼거렸다.
“내 원영만이라도 달아나게 해준다면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 주겠소!”
입을 다문 한립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상대의 제안을 심사숙고하는데 원영의 위에서 자홍색 빛이 번쩍이더니 자홍색 그물이 원영을 포획했다.
동시에 그 뒤에서 하얀빛과 함께 은월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분홍색 안개가 새어나왔고 열손가락에서는 열댓 개의 은빛이 쏘아져 나갔다.
흑의 청년의 원영은 분홍 안개에 뒤덮여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 은빛 줄기까지 날아들어 전신을 마비시켰다.
이제 스스로 자폭하려 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원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립 뒤쪽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날이 갈수록 솜씨가 좋아지는구나!”
“주인님께서 영민하신 덕입니다. 이 자는 달아날 생각에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죠. 제가 그 자리에 남겨 놓은 것은 환영에 불과하고 본신은 이곳에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은월이 입술을 끌어올려 웃고는 한립 뒤쪽의 또 다른 ‘은월’에게 손을 뻗어 환영을 없애버렸다.
한립도 작게 미소 짓고는 거대한 금빛 그물을 거둬들여 금색 구슬로 변한 벽사신뢰를 손으로 흡수했다. 대경검진을 이루던 비검들도 그의 의식에 따라 원형으로 변해서 소매 속으로 돌아왔다.
한립이 그제야 차분히 고개를 돌려 원영을 바라보았다.
“은월, 이 자를 근처 숲으로 데려가 봉혼주를 해결할 방법을 알아내자꾸나.”
한립이 서늘하게 말하며 먼저 몸을 날려 인근의 숲속으로 날아갔다.
“예, 주인님!”
은월이 공손히 대답을 하고 원영을 데리고 그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