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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42화 (199/2,000)

# 442

442화. 흑의인 청년

한립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지면을 향해 연달아 손짓했다. 그러자 재료 몇 가지가 순서대로 떠올라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비검으로 녹아들었다.

그가 눈을 감고 의식을 이용해 원영의 불길을 조종했다. 첨가한 재료와 그의 피 그리고 경정이 비검과 하나가 되어야 성공이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한립은 밀실에 앉아 청죽봉운검들을 하나씩 제련해 나갔고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만일 그에게 만년영유가 없었다면 법력 소모가 극심해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흑의인이 제시한 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한립이 나오지 않아 몇몇이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은발 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제 누군가 비검 법보를 이용해 낙운종 내부에 옥간을 떨어트리고 사라졌던 것이다. 그 안에는 한립과 만날 정확한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운몽산에서 무척 멀고 지형이 험악한 곳으로 한립이 이대로 나오지 않으면 늦을 터였다.

편전에 앉아 있던 은발 노인이 한립이 소리 없이 입구에 나타나자 즉시 고개를 돌렸다.

“사제, 출관했군! 법보 제련은 순조로웠는가?”

“간신히 마쳤습니다. 누군가 만날 장소가 적힌 옥간을 보냈다던데 확인해 보셨습니까?”

한립은 폐관에 들어가기 전보다 차분해 보였다.

“그렇네. 천봉산 정상으로 나오라더군. 직접 확인해 보게.”

은발 노인이 녹색 옥간을 던져 주었다.

“금뢰죽으로 만든 법보를 가지고 홀로 나오라니. 저에 대한 정보를 모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완과 제 사이를 모르고서는 할 수 없는 요구니까요.

“상대의 능력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지. 마도 수사 앞에서 저계 수도자들이 어떤 비밀을 감출 수 있겠나. 그러나 사제, 정말 홀로 가서는 안 되네.

이미 화룡 동자와 대여섯 명의 수사들에게 연락을 취해 놓았으니 먼저 출발하면 그들이 뒤따를 것이야. 그 자가 나타나는 순간 포위해서 잡는 거네! 우리 계국이 아무나 마음대로 헤집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지!”

은발 노인이 매서운 얼굴로 제안했다.

“괜찮은 방법입니다. 상대가 이미 대비를 하고 있겠지만, 혹시라도 그 자가 자신의 실력을 믿고 경거망동한다면 그 자리에서 죽일 수밖에요.”

“그럼 그렇게 하세. 사제의 몸에 표식을 심어 추적하도록 하지. 적이 강해서 어찌 할 수 없다면 시간을 끌게. 우리가 곧 도착할 테니.”

“여러모로 도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지도 약조를 잘 하지 않는 한립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허허! 사제도 이미 낙운종의 일원인데 당연한 일이지. 시간이 없으니 어서 준비하게. 저녁에는 출발해야 하네.”

은발 노인이 기분 좋게 웃자 한립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은발 노인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노인은 한립의 말에 크게 안심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한 사제는 그간의 정을 잊지 않고 낙운종을 지켜줄 것이다.

노인이 저물대에서 부적들을 꺼내 허공에 던지자 붉은 빛줄기들이 빠르게 편전을 빠져나갔다.

* * *

저녁이 되자 한립은 은발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운몽산을 떠났다. 드디어 천봉산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은발 노인과 다른 수사들도 그가 출발하고 한 시진 후에 조용히 그를 뒤따랐다.

법력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한립은 평범한 둔술을 이용해 이동했다. 그가 날아가며 작은 금색 비검을 만지작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경정을 머금은 비검들은 완전히 붉은 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기억대로라면 경정으로 제련을 하면 처음에는 다른 색을 띠지만 제련을 완료한 후에는 본연의 색을 되찾아야 했다. 그런데 36개의 비검들이 금색으로 변해 본래의 색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비검의 위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 했다. 아니 오히려 경정으로 인해 비검들의 위력이 3할 정도 늘었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졌다.

아마 최상급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법보라면 지금의 청죽봉운검들과 부딪쳐 단번에 잘려나갈 것이다.

한립은 결과에 만족스러웠지만 의구심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비검의 주재료인 금뢰죽이나 전에 첨가했던 진귀한 재료인 연정을 떠올렸다.

아마 그런 재료들이 경정과 만나 특수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 것이다. 제련이 끝나고 한립은 밀실 내에서 소규모 대경검진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는 깜짝 놀랐다.

금색 두루마리에 적힌 대경검진의 위력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비검의 수량이 부족해 간단한 대경검진 밖에는 만들지 못하지만 신묘한 능력이 대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상대의 뜻대로 이렇게 천봉산으로 향할 리 없었다. 원영 후기의 수사는 모르겠지만 원영 중기의 수사라면 대경검진을 이용해 죽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봉혼주를 푸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은 흑의인을 만나 상황에 맞게 처신할 생각이었다.

조용히 탄식한 한립의 손에서 금빛이 반짝이며 비검이 소매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의식으로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은발 노인 등 다른 수사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흑의인의 기습이나 감시를 대비해 조심스럽게 멀리서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상대가 정말 원영 후기의 마수라면 아무리 조심을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천봉산은 운몽산 서쪽으로 한참 가야 나오는 가파른 봉우리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꼭대기는 안개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막 백리 정도 앞두었을 때 미약하게 어떤 의식이 자신을 맴돌다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은 희미하게나마 원영 중기 수사의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상대가 일부러 수행을 속였을 수 있으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한립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천봉산 모처의 암석 위에서 흑의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드디어 왔구나! 그 여자 수사와 보통 사이가 아니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어.”

“쯧쯧, 겨우 여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다니.”

흑의인이 혀를 차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허름한 전송진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한립이 수십 리 밖에 도착한 것을 감지하고 모습을 감추었다.

한립이 흑의인의 존재를 느끼고 다가가다가 그가 사라지는 것을 의식으로 감지한 후 더욱 긴장했다.

‘은닉술을 펼쳐 암습을 하려는 것인가? ’

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한립이 천봉산 정상에 도착했고 그의 눈에 소형 전송진이 들어왔다.

“이런!”

한립이 안색이 변해 그 옆의 암석을 살펴보니 날카로운 칼날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겠다.”

한립은 상대의 교활함에 얼굴이 굳었다.

전송진의 상태로 보아 전송 범위는 그리 멀지 않겠지만 상대가 미리 준비해 둔 곳으로 이동한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어쨌든 그가 음라종 종주의 반려를 죽였으니 상대도 자신의 사람을 죽여 복수할 가능성도 상당했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은발 노인 등 다른 원영기 수사들이 자신을 추적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 마음을 굳혔다.

그가 의식으로 주변을 훑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품에서 전음부를 꺼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전음부는 곧 붉은 빛줄기로 변해 사라졌다.

전음부를 보내고 한립은 바로 영수대 하나를 허공에 던져 삼색 서금충으로 갑옷을 만들고, 소매를 털어 남색 방패를 발동했다.

그리고 이어 다른 손을 뒤집자 하얀 빛이 가시고 비단 손수건이 나타났다. 손수건은 남궁완이 헤어지면서 몸조심하라며 챙겨주었던 보물이었다. 한립은 비단을 만지며 남궁완이 떠올라 얼굴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그가 손을 들어 주변에 보호막을 치고 바로 전송진으로 들어갔다. 심호흡을 하며 그가 손을 들어 법결을 던져 넣자 빛이 번지며 사라졌다.

천봉산 수 천 리 밖, 어느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이 솟아있었다. 하얀 빛이 섬에서 밝게 빛나더니 한립이 모습을 드러났다.

그는 전송이 되는 순간 바로 남색 방패에 영력을 불어 넣어 몸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공격도 들어오지 않았다.

“걱정 마세요. 겨우 원영 초기 수사에게 기습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낯선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음라종 종주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다른 마수의 소행이란 말인가.’

한립이 의아해하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흑의인 청년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비록 음라종 종주의 얼굴을 본 것은 아니지만 체구나 목소리가 완전히 달랐다.

“기습할 생각이 없다면서 왜 제 반려에게 봉혼주를 거셨습니까.”

한립이 그를 살폈지만 놀랍게도 수행을 파악할 수 없자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 주위에서 이상한 영기의 파동이 있는 것이 어떤 금제를 설치해 놓은 듯 했다.

강력한 진법은 아니었지만 낯선 곳으로 전송되어 왔으니 상대에 비해 지리적인 이점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한 수사가 여기까지 얌전히 왔겠습니까?  아무리 저라도 그곳에서 낙운종 전체와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음라종 종주가 아니십니까?”

한립이 상대를 응시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내가 종주와 닮은 구석이 있나요?”

흑의인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닮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낙운종에 침입해 그런 짓을 벌이고 멀쩡히 벗어날 실력자가 귀 종에 더 있다는 것은 몰랐군요.”

“저도 자세히 설명 드리고 싶지만. 우리가 그러자고 여기 모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서 금뢰죽 법보나 보여 주시지요.”

청년의 말에 한립이 입을 다물었다.

“시간을 끌려는 생각이라면 버리십시오. 그 전송진은 단 두 번만 사용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것이라 벌써 사라졌을 겁니다. 누구든 반나절 내로는 도움을 주지 못하겠죠. 그 정도면 우리 사이의 일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금뢰죽 법보를 갖고 나왔는지 알고 싶다면 먼저 봉혼주 해결법에 대해 알려주시지요.”

상대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한립이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해결 방법은 이 옥간에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 금뢰죽 법보도 보여주시죠. 전 본종의 종주와 달리 당신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걱정 마세요.”

흑의 청년이 미소를 거두며 손바닥을 뒤집어 검은 옥간을 꺼냈다.

“보여드리죠. 금뢰죽 법보가 아무리 중하다고 해도 반려의 목숨에 비할 바는 아니니까요.”

한립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주저 없이 말했다. 이후 그가 가슴 앞에서 합장을 했다 손을 뻗었다.

쿠릉!

천둥소리가 울리며 금빛이 반짝이며 푸른 화살이 나타났다. 한립이 화살을 들고 무표정하게 청년과 눈을 마주쳤다.

청년의 눈이 탐욕스런 빛으로 번들거리더니 검은 옥간을 던져주었다. 옥간은 아주 천천히 한립을 향해 날아갔는데 마치 무형의 실이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한립이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두말할 것 없이 그도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천천히 흑의인 쪽으로 날아갔다.

두 물건이 교차하는 순간 서로 각자의 물건을 잡아채 확인했다. 그러나 둘의 얼굴에 동시에 쓴웃음이 번졌다.

“이게 금뢰죽 법보라고요?”

흑의인이 냉소하며 손바닥을 움켜쥐자 은백색 화염이 일어 푸른 화살이 순식간에 재로 변해 날아갔다.

“저도 가장 기초적인 오행공법으로 봉혼주를 풀 수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로군요.”

한립도 무표정하게 손바닥에서 남색 불길을 뿜어 검은 옥간을 꽁꽁 얼려 버렸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금뢰죽 법보를 내놓겠습니까?  법보만 넘기면 즉시 반려를 구할 방법을 알려주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사를 죽이고 찾아낼 수밖에요. 고보도 아니고 본명법보인데 체내에 있지 않겠습니까?”

청년이 악랄한 얼굴로 살기를 드러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수사의 생각이 제 생각과 비슷합니다. 당신이 봉혼주를 걸었다면 당연히 풀 방법도 알고 있겠죠. 수사를 죽이고 원신을 고문하면 해결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원신을 고문해요?  수백 년 간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인 자는 처음입니다.”

청년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열이 받았는지 손을 뻗어 주변으로 법결을 날려 보냈다.

쿠르릉!

주변에서 땅이 울리며 7개의 눈을 찌르는 하얀 빛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동시에 용울음소리가 들려오며 각각의 은백색 기둥에 교룡이 나타났다.

“칠룡장(七龍樁?  주인님 어서 피하셔야 해요!”

한립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귓가에 당황한 은월의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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