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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40화 (197/2,000)
  • # 440

    440화. 전쟁 그 후

    한립이 역시 이상하다는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날아오는 열댓 명의 법사들을 주목했다.

    가장 앞서 날아오던 황색 의복의 법사는 놀랍게도 원영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저런 높은 수행의 법사가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하늘 위의 합환종 노마와 음라종 종주도 말없이 대기하고 있었다.

    황색 장포를 걸친 수사를 본 깡마른 노인이 놀라 무언가를 묻기 전에 그가 먼저 곁으로 다가와 입술을 달싹거렸다.

    깡마른 노인이 얼굴을 굳히자 황포 수사가 옥간을 하나 꺼내 전달했다. 노인이 옥간의 의식을 불어넣고는 잠시 후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황포 수사와 잠시 전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란족 축 신사는 서둘러 몸을 돌려 룡함 등에게 돌아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당장 싸움을 멈추고 휴전을 해야겠소.”

    “무슨 소리요! 갑자기 휴전을 하자니 이유를 설명하시오.”

    한립이 나서서 동갑시와 푸른 불새를 처리해 주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승률은 반반이었다. 룡함은 상대가 두려워서 휴전을 제안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수사들을 파견해 전천성 창고를 털 계획이었소?”

    노인이 룡함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고 음울하게 물었다. 룡함은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쪽이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이미 발각이 되었나 보군요!”

    “발각이요?  흥, 아마 제3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벌써 털렸을 겁니다.”

    노인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제3자?”

    룡함이 미간을 좁히자 깡마른 노인이 그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뭐라고요?”

    룡함이 몇 마디를 듣더니 안색이 달라졌다.

    “본 신사가 이런 일을 꾸며낼 이유가 있습니까?”

    노인의 투덜거림에 룡함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부적 한 장을 꺼냈다.

    부적이 하늘 높이 올라 금빛으로 흩어지자 그것을 보고 있던 수사들이 당장 공격을 멈추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법사들도 전달을 받았는지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 중에는 핏빛 악귀와 석인도 있었다.

    별안간 두 진영 사이가 텅 비었다.

    많은 수도자들이 죽어나갔고 원기를 상한 이들도 많았다. 그나마 고계 수사들이나 법사들은 사상자가 적은 편이었다.

    일부 고계 수사들이 당장 룡함을 둘러싸고 이유를 물어왔다.

    그때 하늘 위의 음산한 구름과 회색 안개가 흩어지며 흑의인과 합환종 노마가 서로를 냉랭히 바라보는 모습이 드러났다.

    그 위에서 맹렬히 전투를 벌이던 소리도 사라지며 위무애와 지양 상인이 멀쩡한 모습으로 내려왔다. 수사 진영의 수많은 수사들이 안심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중 씨 문사와 난쟁이 법사도 무사히 내려오자 법사 진영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삼대 수사가 돌아오고 나서야 룡함이 입을 열었다.

    소식이 퍼져나가 소란이 생길 것을 걱정해 원영 중기 이상의 수사들만 모여 작은 결계를 치고 법사 쪽에서 전해온 소식을 공유했다.

    한립이 오늘 보여준 전공으로 보건데 당연히 그도 빠질 수 없었다.

    한립은 룡함이 방음용 보호막을 치고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안에는 겨우 스무 명 안팎의 수사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룡 수사 어찌 된 일입니까! 모란인들이 갑자기 휴전을 제안하다니요.”

    지양 상인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입니다. 상대는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렀는데 평화롭게 물러가는 게 가능할 거라고 보는 겁니까?”

    위무애도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상대 뿐 아니라 우리 쪽도 휴전을 해야 할 듯합니다.”

    “정말 다른 세력이 끼어들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합환종 노마가 이마를 찌푸렸다.

    “예, 돌올인들이 나섰습니다. 게다가 진국의 몇몇 종파와 힘을 합쳐 한꺼번에 모란초원으로 밀고 들어왔나 봅니다. 가장 후방의 수비를 맡은 일족이 이미 한 달 전에 전멸해서 돌올인들의 침공 소식이 퍼져나가지 않은 것이지요. 다른 모란족 부락마저 모르게 조용히 움직였다니 돌올인들이 어부지리를 꾀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룡함이 신중히 들은 정보를 알렸다.

    “정보가 사실인 것은 어찌 안 답니까?  돌올인들은 천남 지역과는 멀리 떨어져 사는 것으로 아는데 모란족들이 우리를 농락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쇄혼 진인은 정보의 진위를 의심했다.

    “거짓은 아닐 겁니다. 전천성에 침입한 천한 노괴와 그 일행들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모란족 내부의 돌올인 첩자들이 우리와 같은 계획을 세워 먼저 창고를 털려고 했다더군요! 결국에는 천한 수사와 맞닥뜨려 쌍방의 정체가 폭로되었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모란족의 전력이 우리에 비해 부족한 것은 사실이나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한 수사가 나서서 동갑시와 모란족 성조를 처리해 주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천남은 세력들이 힘을 합쳤다고는 하나 다들 종문에 반절 이상의 제자들을 남겨 두고 온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이대로 모란법사들과 다퉈 서로 힘이 빠졌을 때 돌올인들이 밀고 들어온다면 천남도 위기에 빠질 것입니다.”

    룡함이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모란족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기반인데 어떻게 합의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천남 지역 절반을 떼어주기라도 할까요?”

    위무애가 휴전을 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는 듯 냉랭히 반문했다.

    “반절은 안 되겠지만 모란초원 변경의 국가 두 개 정도를 모란인들에게 내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여전히 돌올인들의 공격은 모란인들이 막아낼 테고 두 부족 간에 전쟁이 발생하면 천남을 탐낼 틈이 없을 겁니다.

    당장 돌올인들의 공격은 우리와 모란인들이 연합해서 막아내야겠지만 말입니다.”

    상대와의 연합 이야기에도 수사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들 수백 년을 살아온 노괴들이니 안 겪어본 일이 없었다.

    “변경 근처 국가라면 우리 구국맹 기반을 내주자는 것 아닙니까.”

    위무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귀 맹이 합의를 하시겠다면 당연히 다른 세력에서 합당한 보상을 논의할 것입니다.”

    룡함이 좋게 설명했다.

    “그건 이후에 찬찬히 이야기를 하고 일단은 모란인들의 생각을 들어봅시다.”

    위무애가 불만스럽게 마무리를 지었다.

    한립이 슬쩍 지양 상인과 합환종 노마의 얼굴을 보니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반대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마 위무애의 면전에서 바로 찬성을 하기 쉽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듯했다.

    한립이 한숨을 쉬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손을 잡지 못할 세력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룡함이 위무애의 불만스런 어투에도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맞습니다. 이건 저의 의견일 뿐 구체적인 사항은 같이 논의를 해봐야지요. 그럼 바로 모란초원에 수사들을 파견해 사실인지 알아보고 그 후에 법사들과 상의를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돌올인들의 침공이 사실이라면 다들 한 발씩 물러나는 것이 옳겠지요.”

    다들 그 말에 동의하는 눈빛이었고 위무애의 안색도 조금 풀어졌다.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사항들의 이야기가 오갔지만 한립은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자신과 낙운종만 건들지 않는다면 나서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룡함이 있으니 천도맹 세력이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의를 마친 노괴들이 결계를 거두었다. 상대편도 상의가 끝나자 서로 사절을 보내 잠정적인 휴전에 합의했다.

    수사들은 법사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진영을 철수했다. 십여 만 수도자들이 벌였던 대규모 전쟁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 * *

    돌올인들의 갑작스런 침공에 모란인들과 천남 세력 모두 극적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돌아온 천한 노괴가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거대 세력들이 각자 수사들을 파견해 모란 초원을 탐색했는데 모란족 범인들이 초원 변경에서 쫓겨나고 돌올인들이 거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변경 지대의 전쟁이 끝난 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이제 쌍방이 맹렬한 협의에 들어갔다.

    처음에 모란인들은 천남 지역의 삼분의 일을 주지 않으면 멸족을 감수하고서라도 천남과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초원 변경에서 쫓겨난 모란족 범인들이 대량으로 몰려오고 돌올인들이 모란족 법사들을 대놓고 죽이기 시작하자 신사들도 입장이 점점 바뀌었다.

    어쨌든 천남 수사들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 협정에 참가한 것이었지만 모란족들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할 판이었다.

    게다가 모란족과 돌올인들은 수만 년간 피로 쌓은 원한이 너무 깊어 도저히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결국에는 천남 쪽에서 두 개 국가를 양도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모란족들은 일단 힘을 키울 땅을 얻게 되었지만 그 대신 돌올인들의 진공을 막아야 했다.

    이로써 쌍방이 원만하게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한립에 관련된 일은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는 음라종 종주의 반려를 죽인 일로, 진국 마수들은 결코 이 일을 잊지 않았다. 여러 차례 그에게 도전장을 보내 일대일로 결전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물론 한립은 그것들을 확인하자마자 재로 만들어 버렸지만 말이다.

    모란족과 천남의 전쟁이 끝나자 음라종 종주는 모란족 신사들과 어떤 밀약이 오갔는지 바로 수하들을 이끌고 철수했다.

    또 하나는 한립이 빼앗은 원명등이 모란족의 전승 보물이라는 문제였다. 그도 욕심을 부리다 화를 입을 생각은 없었기에 대가로 대량의 경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란인들도 경정을 구할 수 없어 작은 한 덩이를 보냈을 뿐이다. 그나마 나머지를 진귀한 다른 재료들로 채웠다.

    한립도 원명등 같은 것을 공공연하게 지니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가 모란족 보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언제고 사단이 나기 마련이었다.

    한립이 저물대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원명등을 돌려주며 따로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모란족들은 진기한 재료와 함께 한립의 자운두와 바구니 고보를 돌려주었다.

    천남에서 지내려면 고계 수사들과 잘 지내야 했고, 또 그처럼 실력 있고 어린 원영기 수사와 척을 지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라 여긴 듯 했다.

    그는 고보들을 돌려받고 자운두를 은월에게 주었다. 그간 여러 차례 큰 도움을 주었으니 당연한 보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천남 수사들과 모란족들이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돌올인들은 바로 공격을 개시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지양 상인이나 룡함 등 고계 수사들은 그럴수록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상대가 저렇게 신중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모란초원은 물론 천남까지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이 끝났으니 계속해서 제자들이 구국맹에 머물수는 없었기에 각 종파에서 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돌아가면서 경계를 서기로 했다. 현재는 돌올인들이 잠잠하나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는 일이니 방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었다.

    각 종파로 복귀하라는 명이 하달되자 수사들은 하나둘씩 종파로 돌아갔다. 그러나 류락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한립이 먼저 낙운종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어풍차로 날아왔다.

    계국에 들어서 멀리 운몽산이 보이기 시작하자 한립은 남궁완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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