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
437화. 음양마시(陰陽魔尸)
빛이 가시고 은색빛줄기에서 수려한 백의 여인이 나타났는데 한립과 안면이 있는 백 여인이었다. 그녀가 도처를 살피다가 한립과 봉빙 등을 확인하고 눈썹을 꿈틀했다.
백 여인의 등장에 전종도 속도를 줄이고 어두운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봉빙이 그녀가 결계를 깨고 나온 것에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백 수사, 마침 잘 나오셨습니다. 한 수사가 다른 수사들을 구출하는 동안 모란족 네 번째 신사를 함께 맡아 주시지요!”
“네 번째 신사요? 이런 함정을 준비해 두었다니 함께 싸울 수밖에 없겠군요.”
백여인이 싸늘하게 전종을 보며 살의를 드러냈다.
“저 녀석 외에도 혈라조를 뚫고 나온 수사가 더 있다니! 음라종 녀석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전종이 백 여인을 보곤 음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죽어라!”
상대가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안 백 여인이 소리치며 양 손을 부딪치니 대량의 냉기가 눈송이를 형성해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하얀 기운이 기세가 대단했다.
봉빙도 화령병을 가리켜 전종을 향해 염화 공격을 퍼부었다.
한립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개를 펄럭이곤 멀리서 나타나 또 다른 핏빛 결계로 날아갔다.
그가 뇌주를 꺼내든 순간 귓가에 은월의 경고가 들려왔다.
“조심하세요, 주인님!”
흠칫 놀란 한립이 즉시 수중의 뇌주를 아래쪽 결계를 향해 던졌다. 그런데 어디선가 푸른 화염 덩이가 유성처럼 떨어져 그의 뇌주와 부딪쳤다.
팟!
뇌주가 소리 없이 불덩이에 삼켜진 후 작은 푸른 불새가 허공에 나타났다. 한립이 얼굴을 굳히며 수결을 맺자 뇌주가 불새의 몸 안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불새는 몸을 떨었을 뿐 오히려 몸집을 키운 채 한립을 노려보았다.
묘한 상황에 고개를 쳐든 한립은 모란족 성조 방향에서 연달아 불덩이가 날아들어 각각의 핏빛 결계를 지키기 시작한 것을 확인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 졌다. 작은 불새는 화염을 근원으로 하는 존재라 뇌주를 보양식처럼 먹어 치운 것이다.
뇌주의 원재료 역시 등잔불이 아니던가.
모란족 성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악 여인이 냉랭히 한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 여인이 성조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한립은 열이 치밀었다.
푸른 불새는 한립을 공격할 생각도 없이 그저 결계를 배회하며 지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방금 일전에서는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했어요. 천호수들이 영기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도저히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됐다. 너도 고생이 많았다. 뇌주 두 개를 지니고 있거라. 어떻게든 결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수사들을 구출해! 지금은 한 명이라도 빨리 구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뇌주 두 알을 은월에게 던져주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은월이 고운 손으로 뇌주를 쥐고는 진지한 얼굴로 은닉술을 펼쳐 사라졌다. 전종 쪽에서는 붉은 화염과 하얀 냉기가 부딪쳐 누가 우세한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이 고개를 돌려 푸른 불새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솟구치며 그를 보호했고 남색 방패를 날려 이중으로 방어를 했다.
그가 뇌주를 쥐고 신형을 움직여 핏빛 결계 십 여 장 위에서 나타나자 뇌주를 던지기도 전에 사방의 불새들이 쾌속으로 날아들었다.
룡함이 한립에게 보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다른 수사들을 구출해 전세를 역전해 주길 바랐지만 성조가 날린 수많은 불새들에 포위당한 모습을 보자 희망이 크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성조 쪽을 맡은 일곱 수사들이 고보의 힘에 기대 간신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고, 원영 후기의 수행에 화신기 능력을 사용하는 공작새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음양쌍마를 방출해서 등잔불을 꺼버리게 하라.”
룡함이 비축해 두었던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예!”
룡함의 뒤에서 합환종 수사가 명을 받들었다. 수사 무리가 요동치며 검고 하얀 음산한 목관이 나타났다.
16명의 합환종 남제자와 16명의 합환종 여제자가 줄줄이 나타나 그 옆에서 가부좌를 하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 소리가 커질수록 흑백의 목관 위에 붙은 부적들이 진동했다. 당장이라도 목관이 열릴 듯 위태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룡함도 합환종 음양쌍마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두 시체는 합환종의 부부 장로였는데 원영 초기에 이르러 갑자기 합환종을 배신하고 귀도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살아있는 강시인 활시(活尸)가 되어 합환종 수백의 제자들을 도륙하다가 나머지 장로들의 협공을 받아 생포되었고 이후 각종 비술로 이지를 잃고 전설 속의 음양마시로 제련되었다고 한다.
룡함이 지켜보는 가운데 32명의 합환종 제자들이 주문을 외워댔지만 부적이 떨어져 나갈수록 그들은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목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푹! 푸북!
두 번의 소리와 함께 마지막 두 장의 부적마저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합환종 제자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펄쩍 뛰며 주위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때 두 목관이 폭발하며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각각 검고 흰 그림자가 튀어나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달아나던 남녀 제자들 중 가장 느린 두 명이 비명을 질렀고 각각의 그림자가 그들의 목을 물어뜯어 피를 빨아 들였다.
목숨을 걸고 달아나던 합환종 제자들이 그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며 멈추었다. 다른 종문 제자들이 영문을 모르고 식겁한 가운데 머리를 산발한 노인이 무리에서 나타났다.
“음양쌍마가 동남동녀(童男童女)의 피를 흡입했으니 더는 다른 이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이어 두 손으로 청록색 구리 영패 두 개를 꺼내 빛을 쏘아 보냈다. 회색빛이 두 구의 시체에 스며들자 음양쌍마가 몸을 부르르 떨며 흡혈을 멈추고는 돌아왔다.
그들의 생김새를 확인한 수사들은 소름이 돋았다.
음양쌍마의 시체는 놀랍게도 수려한 외모의 젊은 남녀였다. 다만 피부에 혈색이 없다는 것과 멍한 눈빛으로 죽은 시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입가에 아직 피가 흐르지만 않았다면 평범한 수사 부부로 봤을 것이다.
노인이 주문을 외워 구리 영패에서 뻗어 나간 빛줄기가 두 남녀의 머릿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가라!”
산발 노인이 냉랭히 명을 내렸다.
음양마시가 눈알을 굴리며 전신에서 악취가 풍기더니 녹색 돌풍으로 변해 나란히 날아갔다.
그들이 향한 방향은 모란족 성조인 공작새가 있는 곳이었다.
음양쌍마는 녹색 바람으로 변해 서서히 떠가는 것 같았지만 실제 속도는 극도로 빨랐다.
거대한 푸른 공작새가 불덩이를 뿜어내며 일곱 노인들을 압도하는 중이었다.
불 속성 영기를 다룰 수 있었기에 방원 십 리 안의 영기를 자유롭게 사용해 체내의 영력을 소모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법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이 바로 화신기와 그 아래 경지의 차이였다.
고보로 버티던 노인들은 이제 위기였다. 그때 성조가 무언가를 감지하고 좌우를 살피더니 전신에서 기운을 북돋아 사방으로 푸른빛을 뿜었다.
촤륵!
허공에서 녹색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음양쌍마가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은닉술이 발각되자 강시들이 절규하며 몸을 폭발적으로 부풀려 붉은 머리에 녹색 피부를 지닌 괴물로 변했다. 그들이 열 손가락을 튕겨 회색 빛기둥을 거대한 새를 향해 쏘아 보냈다.
푸른 새가 당황했으나 곧 분노하며 입에서 불기둥을 분출했다. 동시에 날개를 펄럭이니 수십 장 높이로 불길의 돌풍이 일어나며 음양쌍마를 휩쓸었다.
음양쌍마는 어떤 공법을 수련했는지 몸에서 기이한 기운을 흘리며 맨 몸으로 공세를 막았다.
태진문의 일곱 수사들에게 밀려들던 공세가 사라지자 그들은 다시 일곱 개의 고보를 모아 위력을 발휘했다.
다들 음양쌍마가 일곱 수사들과 협공을 해서 거대한 새를 상대하리라 예상할 때 음양쌍마는 화염의 돌풍을 뚫고 등잔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악 여인이 등잔불을 지키다 그것을 보고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등잔불에 법결을 쏘아 보냈다.
동시에 아홉 개의 등잔불이 활활 타오르며 거대한 화염을 방출했다.
음양쌍마들이 그대로 충돌하자 아홉개의 등잔불들이 폭발해서 아홉 마리의 푸른 새들로 다시 태어났다.
날개를 펄럭이는 새들을 향해 날아드는 음양쌍마의 모습은 흉악했고 입에서는 회색 강시의 기운을 열손가락에서는 손톱이 자라나 불새들을 공격했다.
회색빛이 스치고 아홉 마리 작은 불새들이 조각이 났다.
이 순간을 노리고 허공의 거대 새가 돌연 고개를 돌려 대량의 기운을 분출했다. 음양쌍마가 다시 불바다 속에 갇힌 것이다.
태진문 일곱 수사들이 그것을 보고 근심에 잠겼다. 이때 깡마른 노인 법사가 곁에 있던 흑의 여인에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여인은 수사들의 지친 기색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법사 진영에서 흑의인 한 무리가 빠져 나와 일렬로 섰다. 다들 허리춤이 빵빵한 것이 주머니를 일고여덟 개 정도 달고 있었다.
흑의인 부대가 허리춤의 주머니들을 공중으로 던지며 주문을 외자 곧 전쟁터 위쪽으로 음산한 바람이 불며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그리고 곧 검은 안개가 주머니에서 새어나오더니 그 속에서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운 광경에 전투 중이던 수사들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룡함도 인상을 굳히며 탄식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안개가 걷히고 대군이 걸어 나오니 흉악한 눈빛과 송곳니를 지닌 강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수행이 축기기 이상이었고 가장 앞에선 세 마리의 강시 왕들은 결단기 이상의 수행을 보였다.
“이렇게 많은 동갑시를 대체 어디서! 수천 마리는 되지 않는가!”
룡함 뒤쪽의 수사가 놀라 소리쳤다.
“별일 아니다. 모란족들은 진국 마도 종파의 협력을 받고 있으니 강시가 나타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다만 전쟁 초반에 나타났다면 별 것 아니었겠으나 다들 지친 상태니 지금 싸운다면 우리가 패할 것이다.”
룡함이 차갑게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다른 이들도 그의 말을 듣고 서로 눈치를 살피며 쓴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천남의 패배였다.
여섯 명의 원영 후기 수사들이 어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굉음이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쪽이 상대를 압도하지 못하는 한 아무도 자신의 진영을 도울 수 없었다.
룡함이 어쩔 수 없이 나서려는데 멀리서 짐승의 포효성이 들려왔다.
전쟁터 모처에서 은빛이 크게 번지며 시선을 사로잡더니 그 안에서 이십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원숭이가 칠흑 같은 몸을 드러냈다. 털은 화살처럼 날카로웠고 두 눈은 이글이글 불탔으며 코가 커다란 생전 처음 보는 거대 원숭이였다.
거대 원숭이가 고개를 돌려 검은 안개 속의 동갑시들을 바라보고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거대 원숭이가 사지로 지면을 박차고 하늘 가까운 동갑시 무리로 쏘아져 나갔다.
동갑시들이 따로 명령을 받지 않고도 각자 하늘 위로 솟아오르며 손에서 검은 기운을 동시에 발산했다.
수행이 높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강시의 기운이 한 번에 불어 닥치면 원영기 수사라고 해도 피할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거대 원숭이는 전혀 두려움 없이 커다란 코를 벌름거렸다.
곧 굵은 노란 빛기둥이 코에서 분출되어 전광석화처럼 검은 강시의 기운을 휘감더니 아무 반항 없이 거대 원숭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능이 낮은 강시들도 그 광경에 멍해졌다.
그 틈을 타 거대 원숭이가 계속 콧김을 뿜어 노란 안개를 퍼트려 동갑시가 뿜어내는 검은 기운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기운을 잃은 강시들이 뻣뻣하게 굳어 떨어져 내리다가 허공에서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러자 수백 구의 강시들을 휩쓴 거대 원숭이가 탐욕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그들을 훑어보았다.
보통 강시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결단기 강시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뚜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