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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30화 (187/2,000)
  • # 430

    430화. 음모

    “우리 음라종의 보물인 귀라번(鬼羅幡)이 정도 녀석들에게 몇 개 훼손당하는 바람에 급히 대량의 생혼으로 제련이 시급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본 종이 법사들과 천남 수사들 사이의 다툼에 끼어 들 이유가 없지요. 대진국에서 대량의 생혼을 구하려다가는 분명 정도 녀석들과 분쟁이 생길 터이니. 분쟁이 두렵지는 않아도 시간을 지체할까 차선책을 택한 것이외다.”

    흑포 사내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또한 이번 대전에서 죽은 모든 수도자들의 혼백 또한 우리에게 귀속된다는 것에도 이의가 없으시겠지요.”

    이번에는 흑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가녀린 체구와 다르게 굵고 거친 목소리가 이질적이었다.

    “수사의 것은 당연히 상관없지만 법사들의 혼백은 가려서 놔둘 수 없겠소?  그간 당신들이 마구잡이로 혼백을 수집하는 바람에 우리 늙은이들도 골머리를 썩고 있소. 다른 방법으로 보상하리다.”

    이번에는 깡마른 노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수사나 법사의 혼백은 구별할 방법이 없는데 교전 중에 수천의 혼백을 일일이 어찌 나누라는 것이오. 세 분 신사께서는 이번 약조를 지키지 않을 셈입니까?”

    흑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눈동자가 청록색으로 변하며 음산한 살기가 분출되었다. 중 씨 성의 유생과 필 씨 성의 난쟁이가 울분이 치밀어 역시 은빛과 붉은빛을 번뜩이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법사들의 혼백을 잡아먹는 짓에는 다들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도움이 꼭 필요하지만 않았다면 진작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허, 그만 두시지요! 다들 뭐 하는 겁니까. 방 종주는 축 모가 친히 청해 모셔온 손님이신데 제 체면도 생각지 않으실 겁니까?”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풀려했다. 옆의 흑의 여인도 입술을 달싹이며 전음으로 흑의 사내에게 무어라 하고 있었다.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흑의 사내의 눈빛이 평소처럼 돌아오며 전신에서 분출하던 한기도 사라졌다.

    그 모습에 법사들 쪽에서도 기운을 흩어버렸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전을 앞 둔 지금 내분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합시다. 혼백을 취하되 몰래 몰래 하는 겁니다. 다른 이들이 눈치 챌 수 없게요. 안 그러면 우리도 내부의 불만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깡마른 노인이 머뭇거리다가 이를 악물고 결단을 내렸다.

    “그러죠. 그런 조건이라면 응하겠습니다.”

    흑의 사내 역시 한 걸음 물러서서 타협책에 순응했다. 유생 등 다른 법사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대결에 참가해도 되겠습니까?  천남에도 마도 공법을 익힌 마수들이 있는데 귀 종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면 어찌 합니까?”

    내내 말이 없던 금포 거한이 물었다.

    “그들도 마수라고 할 수 있지요. 허나 아주 조잡한 공법 몇 개를 익혔을 뿐입니다. 스스로가 대단한 줄 알고 마구 공법을 건드려 놨으니 진정한 상고시대 마공의 위력을 알기나 할까요.”

    흑의 사내는 천남 마수들을 비웃고 있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귀 종 장로 하나가 천남 수사에게 순식간에 당했다던데. 천남 수사들을 경시해서 그리 되었나 봅니다.”

    난쟁이가 입을 비죽이며 은근히 그의 말을 반박했다. 흑의 사내의 시선이 서늘해 졌지만 뭐라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 흑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 일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했습니다. 금빛 뇌전을 쓰는 수사는 우리 음라종에 쓸모가 있으니 잡아서 저희에게 넘겨주시죠. 어떠십니까?”

    “잡아서 넘겨 달라?”

    깡마른 노인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이런 사소한 조건도 수락해 주지 못하십니까?”

    “만일 그냥 원영 초기 수사라면 가능하겠으나 금뢰죽으로 만든 법보를 지닌 수사입니다.”

    “축 신사께서 벌써 아시고 계셨군요.”

    그의 반응에 흑의 여인이 조금 놀랐던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모란인들이 가난하고 견식이 얕다고는 하나 수도계 삼 대 신목을 노부가 몰라서야 쓰겠습니까. 벽사신뢰의 정체를 아는 자가 적긴 하지만 모두의 이목을 속일 수야 없지요.”

    “벽사신뢰를 알아 보셨다면 마도 종파의 입장에서 그 물건이 다른 이의 수중에 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상응하는 조건이 있다면 말씀하시죠.”

    흑의 사내가 노인의 뜻을 알아채고 냉랭히 물었다.

    “간단합니다. 귀 종이 거대 요수 열댓 마리 외에 구리 갑옷으로 무장한 강시들을 데려왔다는 것을 압니다. 내일 일전의 대목을 방 형이 강시들을 출격시켜 장식해 주시지요. 충분히 준비를 했다고는 하나 만일을 대비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노인이 주름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축 신사께서 본 종의 비술에 대해 이리 해박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련하기 어려운 강시들은 아니나 전쟁에서 훼손이 되면 우리 종파의 발전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런 조건이라면 그쪽에서 무조건 벽사신뢰를 쓰는 천남 수사를 생포해줘야 할 겁니다.”

    흑의 사내가 거절하지 않고 자신의 조건을 분명히 했다.

    “생포요?  농담하십니까?  중 신사와 교전을 하고 엄청난 둔술로 달아난 수사입니다. 듣도 보도 못한 핏빛 둔술을 사용하는 데다 실력도 강한 자인데 생포하라니.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냥 죽여서 금뢰죽 법보를 얻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깡마른 노인도 어투가 좋지 않아졌다.

    “그리 생포가 어렵다면 죽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노인의 예상과 달리 흑의 사내가 선선히 말을 바꾸었다.

    * * *

    같은 시각, 천남 진영 안의 지양 상인과 위무애 등도 대청에서 대전에 관해 상의 중이었다.

    삼대 수사들과 룡함을 제외하면 붉은 옷의 미인, 대머리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흰 수염 노인이 전부였다.

    노인은 눈을 반쯤 감고 손에 든 옥 반지를 매만졌는데 비취색 반지 표면에 떠오른 문양들이 특수한 이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천한 선사, 이번에는 우리만 믿으십시오. 이곳에서 적의 주력과 시간을 끄는 동안 전천성에 잠입해 창고를 전부 약탈해주시면 모란인들이 아무리 승승장구를 해도 자원이 없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지양 상인이 미소를 지으며 명성이 자자한 천한 노괴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전에 있었던 일은 잊은 것 같았다.

    “모란 신사들의 주의만 끌어주면 전천성에 잠입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위 수사가 전송진까지 제공해 주었으니 바로 전천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요.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일은 모란인들이 어찌 모든 자원을 전천성에 놔두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지요.”

    부리부리한 눈의 노인이 금속성의 소리를 내자 귀가 괴로웠다.

    “그 점은 염려치 마시지요, 천한 수사. 모란인 내부에 심어둔 첩자에 의하면 그들이 풍원국과 우국을 점령했지만 구국맹이 퇴각을 하며 영석 광산이며 원료 산지를 파괴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지금 소모하는 영석은 각 부락에서 급조해 올려 보내는 것들이겠죠. 각지에서 올라오는 영석과 재료를 한데 모아 분배하기 때문에 비밀 창고에 강력한 금제를 걸어놓고 몇몇 대상사들이 돌아가며 지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있는 것이죠. 결계로 시간을 끄는 동안 창고 내의 물건들을 안전하게 옮길 수도 있다고 믿을 테고요.”

    합환종 노마가 담담히 이야기 했다.

    “하지만 그들이 첩자를 심어 놓은 것처럼 우리 구국맹도 모란인들과 오랜 시간 전쟁을 하며 첩자를 양성했습니다. 지금 자원을 모아 놓은 창고를 지키는 대상사 중에 한 명이 우리에게 협력할 것입니다. 그가 결계를 해제해 놓을 테니, 천한 수사께서 은밀히 움직여 주시면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겁니다.”

    위무애가 냉소하며 설명을 마쳤다.

    “그리 확신 하시다면야. 그렇지만 일이 끝나고…….”

    “일이 끝나면 저희 네 세력이 힘을 모아 서국을 수사에게 양도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종파를 창립하는 일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것이고요. 그때부터 수사는 일문의 창립자가 되시는 겁니다.”

    “수사들이 약조를 하신다니, 노부 한번 해보지요. 시간이 늦었으니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할 테니까요.”

    천한 노괴가 자신이 원하는 확답을 듣고는 흡족한 얼굴로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완전히 대청을 나가 사려졌다.

    “저 노괴의 성공률이 높을 것입니다. 그는 쓸 만한 산수를 여럿 거느리고 있으니까요. 모란인들도 예기치 못한 습격에 놀랄 것이니 실패할 까닭이 없습니다.”

    합환종 노마가 미간을 좁히며 이야기했다.

    “역 수사 말씀대로 우리가 모란 신사들만 붙들어 두면 천한 수사의 성공 확률은 높아지겠죠. 다만 노괴가 저 나이에 돌연 종파를 개창할 마음을 먹을 줄 몰랐습니다. 게다가 이미 상당히 많은 산수들을 결집했더군요.”

    룡함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천한 노괴가 원영 중기에 이른지도 벌써 3, 4백 년째입니다. 오랫동안 고비를 넘기지 못했으니 후기에 이르는 것은 거의 포기했겠죠. 그러니 다른 일에 힘을 쏟는 것도 지당한 일입니다. 종파를 개창하는 일은 그만한 영광이 따르니까요. 다만 다른 종파들과 업보가 많은 것으로 아는데 전쟁 틈을 노려 우리에게 조건을 제시하다니…… 어쩐지 당한 느낌입니다.”

    지양 상인이 유유히 말을 이었다.

    “일단 천한 노괴가 돕는다니 되었습니다. 곧 대전이 벌어질 텐데 긴장을 늦출 수 없죠. 하지만 이번 일전에서 대패한다면 천한 노괴가 상대의 보급을 끊는다 해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위 형, 구국맹에서 상대의 영술 결계를 억제할 금제를 준비한다던 것은 차질이 없겠지요?”

    지양 상인이 진지한 얼굴로 위무애에게 물었다.

    “법사들과 오랜 세월 대적하며 영술 결계에 대해 연구해 왔습니다. 공법상의 문제만 없다면 구국맹은 그들과 똑같은 영술 결계를 재현할 수 있을 정도예요.”

    위무애의 담담한 대답에 만족한 지양 상인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흑포 거한을 바라보았다. 합환종 노마가 시선을 받고는 입을 뗐다.

    “우리 마도 육종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어령종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영수를 세 마리나 데려왔고 합환종에서도 음양쌍마해금을 준비했습니다. 귀령문의 만혼대진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데다 다른 세 종파도 강력한 비술을 준비해 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지양 수사 정도맹 쪽은 어떤 살초를 준비하였는지요?”

    “정도맹은 출발 전에 이미 각 파의 사당을 개방해 열댓 개의 쓸 만한 상고시대 보물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실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지양 상인이 애매하게 말하고 말았지만 합환종 노마의 안색이 풀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천도맹은 느슨한 연합체이기는 하지만 각 문파에서 열심히 준비를 해주었습니다. 각 문파의 구체적인 사정은 모르나 저희 란명종의 상고 시대 옥부는 모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입니다. 오래된 물건이라 이번 전쟁에서 사용을 하면 폐기해야겠지만요.”

    룡함이 아까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고 시대 옥부요?  란명종에서 그런 보물을 내놓을 줄은 몰랐는데 다른 천도만 종문들의 수단도 기대가 됩니다. 이제 유일한 근심은 흑의인들과 내기 대결인데. 역 형, 흑의인들의 공법이 마도 공법이라던데 출신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지양 상인이 이런저런 사항들을 정리하며 물었다.

    “마도 공법이기만 하다면 알아보겠지만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어찌 정확한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그들의 마공이 우리 천남 육종의 것보다 정순하고 귀령종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흑포 거한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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