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9
429화. 대전 임박
한립이 밀실에서 강령부 제련에 매진하는 동안 천일성은 겨우 2, 3일 만에 철저히 전시 상태로 돌입했다. 생사를 건 법사와의 대전을 앞두고 각 종문의 수사들이 주둔지에서 나와 대오를 정비하고 변경의 주둔지로 앞 다투어 출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낙운종 제자들도 부대에 속해 천일성을 벗어나게 되었다. 려락이 앞서 출격해 그들을 살피게 된 것이다.
그는 송 여인을 주둔지에 남기며 한립이 출관할 때를 기다리라 일러두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천일성은 수비를 위한 근소한 병력을 제외하면 거의 텅텅 비게 되었다.
자꾸 시간은 흘러가는데 한립이 출관할 기미가 없자 송 여인도 어쩔 수 없이 초조해졌다.
그가 폐관을 하고 들어간 수련실 밖에는 금제가 층층이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안에서 용울음 소리와 폭발음이 연달아 들려오곤 했으니 걱정이 될 만했다.
내리 5일을 기다린 끝에 송 여인은 결심했다. 만일 한 사숙이 계속 출관을 하지 않는다면 억지라도 결계에 부딪쳐 봐야겠다고 말이다.
하루라도 늦었다가는 대결에 늦을 판이었다.
송 여인이 주둔지 대청에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다가 석양이 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움직여야했다.
댕!
그녀가 붉은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떼려는데 맑은 종소리가 대청을 울렸다.
잠시 후 푸른 빛줄기가 날아와 사라지며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숙님을 뵈옵니다!”
송 여인이 반갑게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오늘이 며칠이더냐. 성 내의 수사들은 거의 출발을 했구나.”
밀실에서 나온 뒤 바로 의식으로 훑어 천일성 안에 남은 인력이 거의 없음을 감지했다. 비록 안에서 대략 시간을 계산해 나온 것이지만 확실히 물어두어 나쁠 것은 없었다.
“사숙님께 아룁니다. 오늘로 닷새째입니다.”
안심한 송 여인이 예의 바르게 답했다.
“아직 여유가 있지만 미리 도착해 있는 것이 낫겠지. 우리도 출발하자꾸나.”
“존명!”
한립의 소매에서 하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날개 달린 새하얀 사각형 마차가 나타났다. 바로 어풍차였다.
“타거라. 네가 날아가는 것보다는 빠를 거다.”
한립이 먼저 신형을 움직이고는 송 여인을 향해 말했다. 여인이 영수도 없이 움직이는 마차를 신기하게 보고는 소리 없이 올라탔다.
한립이 어풍차를 가리키자 동시에 하얀 빛이 번뜩이며 보호막이 생겨났고 하얀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비행을 위해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법보라 영력 소모가 적었고 속도는 더없이 빠른 것이 특징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천일성을 벗어나 변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송 여인이 그제야 안심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한 사숙이 이런 보물이 있어서 이제야 출관을 하셨구나.’
그녀가 딴 생각을 하는 동안 한립이 먼저 질문을 해왔다.
“자령 수사 쪽은 아직도 그곳에서 지내더냐?”
“자령 수사는 잠시 천일성을 떠나 이번 대전이 끝난 후 돌아올 예정입니다.”
“자령이 머리가 비상하기는 하지. 현명한 행동이다. 나라도 그리 하였을 것이야.”
한립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미소 지었다.
* * *
며칠 사이 우국과 북량국 변경, 법사 군대가 수십 리 밖에서 하강해 군영을 꾸리기 시작했다.
하루 밤 사이에 분위기가 살벌해진 것이다.
소규모 법사 대오가 사방으로 순찰을 하며 습격을 경계했고 날이 갈수록 수사들 역시 모여들어 각종 결계를 설치하니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여섯 째 날, 천남과 모란 양쪽 모두 금제 설치를 마치고 모두 진영으로 돌아가 경계를 강화했다.
천남 수사들은 천일성을 뒤쪽에 두고 진영을 유지했기에 각종 금제를 법사들보다 적게 설치했다. 하지만 경계 초소나 순찰을 도는 인원은 상대를 능가했다.
이런 상황 속에 십여 명 수사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진영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무리를 이끄는 이는 스무 살 정도의 어여쁜 여인으로 결단 초기의 수행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축기기 수사들이었다.
대전이 임박했기에 한 순간도 경계를 늦출 수 없어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이었다.
여인이 의식을 퍼트려 사방을 경계하며 날아가다가 놀란 눈빛으로 멈춰 섰다. 그녀가 먼 곳을 바라보자 다른 수사들이 놀라 따라 쳐다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소 선배님 왜 그러시는…….”
남색 장포 수사가 물으려는데 하늘 저 끝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 빨라!”
누군가 놀라 중얼거리는데 그 순간에도 하얀 빛이 커지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선배님일 것이니 내가 먼저 인사를 드리마.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거라.”
여인이 우아한 얼굴로 분부하고는 노란 빛줄기로 변해 응대하러 나갔다.
그녀가 얼마 날아가지도 않았는데 하얀 빛이 벌써 도착해 엄청난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황풍곡 소취인,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완배가 명을 받아 순찰을 돌고 있으니 성함을 알 수 있을 지요.”
“소취인?”
하얀 빛 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배를 아시는지요?”
소취인이 눈을 깜빡이며 놀라워 했다. 그가 아는 원영기 수사들 중 이런 목소리를 지닌 이는 없었다. 게다가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는데 떠오르지 않았다.
하얀 빛이 몇 번 깜빡이더니 사라지고 안에 탄 인물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괴상한 마차에 젊은 남녀가 타고 있었다.
“한 사숙님!”
푸른 장포의 남자를 확인한 소취인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너도 다 컸구나. 이전과 몰라보게 달라졌어.”
한립이 여인의 낯익은 얼굴을 보며 담담히 미소 지었다.
“한 사숙님, 정말 맞으시죠! 섭 사저와 뢰 사형이 사숙님께서 원영기에 드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는데!”
소취인이 마치 예전의 어린 소녀처럼 흥분해 소리쳤다.
그녀는 그가 황풍곡에 데려와 입문을 시켰던 아이였다. 그러니 당연히 섭영이나 뢰만학보다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송 여인이 그것을 지켜보며 또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니 한 사숙은 황풍곡 출신 같은데 저 여인과는 어떤 관계지? ’
한립은 송 여인은 상관하지 않고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새삼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와 닿았다.
그러나 잠시 후 소취인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한 사숙님, 정말 낙운종 장로가 되신 거예요? 황풍곡으로 돌아와 주시면 안 되는 거예요?”
“낙운종이 내게 섭섭지 않게 대우하였으니 그건 불가능하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 말거라.”
“하지만 그럼 저희 황풍곡은 앞으로…….”
“너무 걱정 말거라. 내 령호 노괴와 거래를 통해 만일 황풍곡이 정말 위기에 쳐하면 능력이 되는 범위에서 돕기로 하였으니.”
안색이 어두워진 소취인을 보며 한립이 한숨을 쉬듯 설명했다.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사숙님!”
의기소침해 하던 그녀가 다시 밝아졌다.
“일단 그 이야기는 되었고. 네가 마 사형의 유일한 직전 제자이니 몇 해 만에 다시 만나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구나. 이건 결단기 수사를 죽이고 얻은 법보인데 네 본명 법보처럼 부리지는 못해도 쓸 만할 게야. 그리고 이건 수련에 도움이 될 단약이니 한 병 가져가거라.”
한립이 저물대 속에서 청록색 반지와 약병을 꺼내 주었다.
“감사드립니다!”
“그래. 난 진영으로 돌아가 노괴들을 만나 봐야 하니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이후에 다시 보자꾸나.”
한립은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어풍차를 출발시켰다.
여인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그녀가 멍하니 그 자리에서 서 있자 기다리다 못한 수하들이 법기를 타고 올라왔다.
“소 선배님, 저 선배님은 원영기 수사십니까?”
“엄청 젊어 보이시던데요?”
다들 궁금한 것이 많은지 재빨리 입을 놀렸다.
“내가 은혜를 입은 분이고 원영기 선배님이시다.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분이니 순찰에나 집중하거라.”
소취인이 정신을 차리고 냉랭히 그들을 훑어보자 수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 * *
어풍차가 속도를 줄여 진영 인근에 도착했다. 한립은 눈에 띄는 어풍차를 회수한 후 빛줄기로 변해 남은 길을 재촉했다.
잠시 가다보니 눈앞에 거대한 보호막이 찬란하게 드러나 진영 전체를 가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하강하기도 전에 당번을 서고 있던 제자가 황급히 그들을 맞이하러 다가왔다. 그가 두 수사의 신분을 확인하고 통로를 열어 보호막 안으로 안내했다.
진영으로 돌아온 뒤 한립은 송 여인과 갈라졌다. 송 여인은 려락에게 보고를 하고 배정을 받은 부대로 가야 했고 한립은 진영 중심부로 가서 지양 상인 및 삼대 수사들을 만나야 했다.
그들은 한립이 서둘러 온 것에 흡족해 했고 전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독립된 임시 석실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한립은 석실에서 이동하면서 허비했던 영력을 회복했다.
그는 눈을 뜨고 자신의 상황을 점검했다. 청원검결이 10성에 이른 이후 영력 회복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품에서 새까만 목갑을 꺼냈다. 푸른색 금제용 부적들이 몇 장이 붙은 목갑이었다.
한 손으로 목갑을 스치자 부적들이 우수수 떨어져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목갑 뚜껑을 열자 손바닥만 한 부적이 담겨 있었는데 표면에 핏빛의 작은 교룡이 요동쳤다.
그가 손짓을 하자 부적이 솟아올라 그의 손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며칠을 고생하고 세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완성한 부적이었다. 위력이 어떨지는 몰라도 강령부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적혀 있었으니 기대해볼 만 했다.
그가 가부좌를 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천남 수사들의 진영에서 수십 리 떨어진 법사들의 주둔지에서는 몇몇 인물들이 모여 상의를 하고 있었다.
모인 이들은 사내가 다섯 여인이 둘이었는데 그 중 일남일녀는 복면을 하고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가려 본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다른 법사들 중 두 명은 한립도 아는 인물들이었다. 한 명은 황룡산에서 등잔 고보를 사용해 애를 먹이던 악 여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를 몇날며칠 쫓아 죽이려던 중년 신사였다.
다른 사내 셋은 새까맣고 깡마른 노인과 키가 넉 자가 안 되는 난쟁이 그리고 훤칠한 생김새의 금포 거한이었다.
“악 상사, 영유(靈油) 준비는 어찌 되어 갑니까. 등잔불이 켜진 시간만큼 성조(聖鳥)를 불러 낼 수 있는 것이니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거예요.”
주름살 가득한 깡마른 노인이었지만 눈만은 맑게 빛났다.
“축 신사님, 안심하십시오. 일족 전체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데 어찌 소홀함이 있겠습니까. 벌써 천 년 간 모아 놓은 영유를 한데 모아두었으니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녹색 의복을 입은 악 여인이 숙연히 답했다.
“중 형, 영술 결계의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 되고 있겠지요. 법사들의 법보는 수량이나 위력에서 천남 수사들에 비해 떨어지니 영술 결계로라도 공격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노인이 이번에는 중년 유생에게 물었다.
“수백 년간 공들여 연구한 영술 결계를 전달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천남 수사들이 이전의 영술 결계를 생각해 대비한다면 크게 당할 거예요.”
유생이 차분히 답했다.
“되었군요. 필 형 혼전으로 접어들면 고계 법사들로 하여금 영수를 소환하는 척 상대의 주의를 끌어 수사들이 법력을 낭비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방 종주, 그러려면 반드시 거대 영수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거대 영수를 넘겨 드리지요. 허나 약조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약조를 잊다니요. 수사들과 대규모 전쟁을 벌인 직후 어찌 모란족이 귀 종과 척을 지겠습니까? 음라종은 대진국 십대 마도 종파 중 하나인데요. 천남을 손에 넣으면 범인들의 국가를 귀 종이 관리하게 두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어차피 범인들은 모두 연족(燕族)이라 그들의 생사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깡마른 노인이 냉혹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