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
427화. 빙설잠(氷雪蠶)과 경정(庚精)
회의는 거의 한 시진 가까이 진행되었고 지양 상인의 주도하에 합환종 노마가 때때로 보충을 하며 막을 내렸다.
그러나 확실히 다른 수사들에 비해 룡함의 의견은 중시 되었고 특히 천도맹 관련 논의에서는 다들 그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보아하니 룡함 부부를 통해 천도맹이 삼대 수사를 지닌 다른 세력들과 균형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듯 했다.
마지막으로는 내기 대결에 참가하지 않는 수사들에게 몇몇 임무가 배분되었다.
이후 지양 상인이 모두 돌아가 준비를 해달라고 말하자 대부분의 수사들이 대청을 떠났다. 그리고 이제 대전 안에는 삼대 수사와 한립과 운로 노마 그리고 혈기 없는 안색의 아름다운 부인만 남았다.
“사제! 나와 같이 가지. 따로 할 말이 있네.”
흑포 거한이 운로 노마를 향해 말하고는 먼저 쪽문으로 빠져나갔다. 운로 노마가 머뭇거리면서도 묵묵히 그 뒤를 쫓는 것이 흑포 거한을 무서워하는 티가 났다.
“한 수사, 백 수사. 우리도 이야기를 나누시죠. 두 분이 먼저 물건을 확인하고 참가를 하시겠다니 이해합니다. 이번 대결의 위험이 크기에 쉽게 모험을 할 수 없으시겠죠. 허나 확인한 후에는 꼭 참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흑포인이 나가자 지양 상인이 한립과 부인에게 말했다. 위무애는 그저 옆에서 뒷짐을 지고 두 수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립은 대답이 없었지만 아름다운 여인은 미간을 좁히며 냉랭히 답했다.
“모란인이 천남을 침략하든, 천남이 모란 초원을 침략하든 상관없습니다. 이번에도 수사께서 연락을 주시지 않았다면 산을 내려오지 않았겠지요. 물건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바로 떠날 것이니 그리 아세요.”
“백 수사, 어찌 이러십니까. 그때의 일은 내게도 잘못이 있지만 사실 수사를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지양 상인이 그녀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온화하게 타일렀다.
“잘잘못은 알아서 판단 할 테니 그때 이야기는 꺼내지 마세요. 물건이나 보여 주시지요.”
여인이 얼굴을 굳히고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듣고 있던 한립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이상했다.
지양 상인이 적대적인 여인의 얼굴에 고개를 저으며 저물대를 스쳐 하얀 옥함을 꺼냈다.
평범해 보이는 옥함이었지만 등장하는 순간부터 대청 안의 온도가 급하강하며 한 겨울 날씨가 되었다.
백의 여인이 옥함 내의 냉기를 느끼고는 눈을 빛냈다. 지양 상인이 옥함을 여인에게 가져갔다. 여인이 옥함을 열자 그곳에는 몸 전체가 반투명한 누에고치가 하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기이한 형상으로 보아 기충방 뒤쪽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빙설잠이라는 누에고치였다.
“어째서 누에고치죠? 성년이 된 빙설잠이 아니잖아요.”
여인이 영충을 확인하자 난색을 표했다.
“백 수사, 이 빙설잠은 한빙동(寒氷洞) 백 장 아래의 얼음층에서 발견한 겁니다. 일반적인 빙설잠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극상품인 청왕잠(靑王蠶)이란 말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점을 알게 될 겁니다.”
지양 상인이 차분히 설명했다.
“청왕잠?”
여인도 반신반의하며 자세히 관찰하더니 곧 얼굴을 풀었다.
“청왕잠이 비록 지금은 고치 상태이나 일단 깨어나면 영충 상태라도 쓸 만할 거예요.”
“물건은 내가 가져가죠. 대결도 참가하겠어요.”
주저하던 여인이 결국 옥함을 챙겼다.
“좋은 결정입니다. 수사의 백설결(白雪決)을 위해 겨우 법사 하나쯤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지양 상인이 한시름 놓으며 웃었다. 백 여인이 그 소리를 듣고도 표정도 달라지지 않고는 냉랭히 걸어가 버렸다.
지양 상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위무애가 그 모습에 실소했지만 말을 거들지는 않았다.
“한 수사, 필요한 경정의 정확한 수량이 있으십니까.”
여인이 나가자 그제야 지양 상인은 한립에게 시선을 옮겼다.
“수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물론 경정의 가치가 높으니 두 분이 내주시기만 한다면 값을 치르지요.”
한립도 이제 와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한 수사의 말투로 보아 재산이 넉넉한 모양인데. 미리 말해두자면 우리 정도 경지에 이르면 욕심을 낼만한 물건이 턱없어 적어집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번 대결을 위해 이리 많은 소장품들을 내놓을 리도 없지요.”
지양의 말에 한립이 미소로 답을 대신했는데 갑자기 위무애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한 수사는 원영 초기의 수행으로 모란 신사의 손에서 무사히 달아난 수사이니 일반 수사와 같다고 보기 어렵겠지요.”
“그런가요? 한 수사가 어떤 물건으로 교환하려는지 몰라도 일단 경정부터 확인하시죠. 수사가 우리 마음에 차는 물건을 지니고 있다면 전부라도 내드리겠습니다.”
지양 상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가 저물대 중 하나를 가져다가 탈탈 터니 크기가 제각각인 은은한 금빛의 돌덩이 세 개가 빛에 휩싸여 나왔다. 지양 상인이 바로 그것을 한립에게 건넸다.
하나는 크고 두 개는 좀 작았지만 전부 경정이 확실했다.
커다란 것은 경매에 나왔던 것과 비슷하게 복숭아만 했고 작은 덩이들은 그 반만 했다. 이 정도면 비검 열댓 개에 쓸 만했지만 여전히 한립이 원하는 수량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립의 얼굴에 희미하게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의 표정에 지양 상인이 놀랐다.
‘이렇게 많은 경정이 부족하다고? ’
그가 위무애에게 시선을 주었다.
위무애도 한립의 표정을 확인하고 지양 상인의 시선을 받자 바로 소매를 털어 주먹만 한 경정을 내놓았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아직도 72개의 비검에 모두 사용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조금만 더 모으면 36개 비검을 제련할 수 있는 양이었다. 36개의 비검에 검영분광술을 사용하면 간신히 소형 대경검진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위무애의 경정까지 받아 들자 마음속에서 격동이 일었으나 겨우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제겐 아직 부족하지만 대결에 참가하기에는 충분하군요. 제가 교환을 하려는 물건들이 흡족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이 경정을 거두고 저물대에서 두 개의 각기 다른 옥함을 꺼내 위무애와 지양 상인에게 던져 주었다.
지양 상인은 받자마자 바로 옥함을 열어 보았고, 위무애는 옥함을 살피고 나서야 뚜껑을 열었다. 하나에는 선홍색 비늘이 또 다른 하나에는 주먹만 한 검은 거북 껍데기가 들어있었다.
“……이건?”
“요수의 재료로군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묻자 한립이 설명했다.
“예, 위무애 수사 수중의 것은 팔급 요수 독교의 비늘입니다. 그리고 지양 상인의 수중에 있는 것은 팔급 요수 귀요의 거북껍데기 이고요. 역천의 보물까지는 아니더라도 화형기에 이른 요물의 본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는 천남에서는 구하기 극히 어려운 것 아닙니까. 경정과 교환하기에도 충분하겠지요.”
한립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팔급 요수는 난성해에서도 특수한 존재였는데 그것을 죽여 재료를 얻어내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다.
게다가 천남에서는 팔급은 커녕 육급이나 칠급 요수도 거의 멸종되어 찾아 볼 수 없었다.
“팔급 독교의 비늘!”
지양 상인은 조금 놀라더니 바로 평정을 되찾았는데 위무애는 비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립이 생각해 보니 위무애가 독공에 관련된 능력을 쓴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독교의 비늘에 신묘한 용도라도 있는 것일까? ’
한립이 의심스러워하는데 위무애가 기다란 손톱으로 비늘 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는 넋을 잃었다.
“허허! 한 수사의 물건이 위 형의 입맛에 딱 맞았나 봅니다. 저도 귀요의 껍데기에 마음이 설레는데 당연한 일이겠지요. 팔급 요수의 재료라면 갑옷을 만들든 방패를 만들든 그 효용이야 남다를 터. 경정과 교환하기에 충분하겠습니다.”
지양 상인도 위무애의 표정에 놀란 눈치였지만 금세 한립을 향해 웃으며 물건을 확인했다.
한립이 생각에 잠긴 동안 위무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화형기 독교가 남긴 비늘이 맞소이다. 노부의 법보가 위력이 늘 날이 오긴 오는군요.”
즐거운 얼굴로 위무애가 붉은 비늘이 든 함을 거둬들였다. 이 후 달라진 시선으로 한립을 보며 말했다.
“사실 수사가 이렇게 진귀한 물건을 내놓을지 노부도 몰랐소. 독교의 비늘은 내게 아주 귀중한 물건이니 상호교환을 하기엔 알맞겠지만. 한 수사는 천남을 대표해 대결에도 나가니 아무래도 손해를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후인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경정 덩어리를 내어 주지요. 꼭 필요로 하는 재료 같은데 가져다 쓰시오.”
위무애가 다시 한 손을 뒤집어 계란만 한 크기의 경정을 한립에게 던져 주었다.
‘경정이 더 있을 줄 알았지!’
한립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되면 서른여섯 개 비검을 제련하고도 남았다.
이런 가능성까지 고려하지 않았다면 가치가 경정을 능가하는 팔급 요수의 재료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던 지양 상인도 감별을 마치고 담담히 웃고 있었다. 그런데 위무애가 경정 한 덩이를 더 꺼내는 것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소매를 뒤져 누런 나무뿌리 같은 물건을 꺼냈다.
“수사의 몸에 나무 속성 영기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아 분명 관련 공법을 익혔을 테지요. 수사에게 내줄 적당한 물건이 없으니 등나무 뿌리라도 가져가서 법보를 제련하든 몸의 나무 속성 영기를 배양하든 쓰십시오. 이거면 팔급 요수의 재료를 충분히 보상할 겁니다.”
“이것은…….”
위무애가 지양 상인이 내놓은 손가락 굵기의 나무뿌리 조각을 알아보고 놀라워했다. 한립은 내심 실망하고 있다가 위무애의 표정을 보고서야 번뜩 무언가를 유추해냈다.
‘등나무 뿌리라면? ’
정마 양도에서 순액을 취하기 위해 몰래 잠입했던 이유가 바로 현천선등이라는 영물인 등나무를 되살리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한 형의 신분이면 현천선등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아쉽게도 수많은 방법을 써 보았지만 현천선등을 살려내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마도와 나눠 법기의 재료로 쓰기로 했는데 그 사분의 일 조각을 제가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전 불 속성 공법을 써서 아무리 귀한 재료라도 무용지물이니 수사에게 내주겠습니다.”
‘현천선등이 맞아!’
한립은 그가 주는 누런 뿌리 조각을 받으며 크게 놀랐다.
소위 신선의 등나무로 불리는 것들은 덩굴과 줄기로 이뤄진 영목의 이종(異種)이었는데 현천선등은 그보다도 특별했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몇몇 등나무 종류의 영목만이 앞에 현천(玄天) 자가 덧붙었다. 경전에는 천지가 개벽할 때 탄생했다고들 하는 상고시대의 영목으로 등나무에서 피는 꽃이나 과실 모두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역천의 보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만 현천선등이 어떤 효능을 지니는지는 경전에 남아 있지 않아 아는 이가 없었다.
정마 양도 수사들이 유적에서 평범해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뿌리를 발견하고 현천선등인 줄 알아 본 것도 상고 시대 수사의 유적에 적힌 글 때문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귀한 보물에 정마 양도는 싸움을 거듭하다 고위층들의 관여로 일단 현천선등을 살려 낼 수 있는지 보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별의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정도 양마는 포기했고 상의 끝에 현천선등 뿌리를 열댓 조각으로 나눠 공평하게 분배하기로 했다.
지양 상인은 정도맹 대장로였으니 그 몫이 다른 이들에 비해 큰 것이 당연했다. 위무애가 한 눈에 알아 본 것도 현천선등의 일부분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어차피 부활시키지 못할 거라면 불 속성 공법을 익히는 지양 상인에게는 불필요한 재료가 분명했다.
그러나 한립은 현천선등이라는 것을 알고는 조금 실망했다. 그는 최상급 재료가 부족하지 않았기에 경정이나 더 얻기를 바라고 팔급 요수의 재료를 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