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6
426화. 목숨을 건 도박
한 사람씩 옥간을 보는 동안 한립은 도사와 녹색 장삼을 걸친 노인을 보았다.
도사는 정도 태진문 지양 상인으로 피부가 도자기처럼 고왔고 인상이 좋은 것이 호감을 불러 일으키는 중년인이었다.
그런데 녹색 장삼의 노인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복색이며 용모에서 전혀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는데 유일하게 길게 자란 손톱이 눈길을 끌었다. 새까만 손톱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이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아마 구국맹 대장로 위무애일 것이다.
위무애가 한립의 시선을 느끼고 어깨 너머로 한립을 보고는 의외라는 듯 웃었다. 한립이 약간 민망했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궁완과 내 관계를 알고도 저리 웃을 수 있을지.’
한립이 생각을 마치자 룡함이 옥간을 확인하고 난색을 표하며 한립에게 넘겨주었다.
앞 사람들의 표정에 한립도 호기심이 일어 의식을 불어넣었다. 잠시 후 그도 미간을 좁히며 묵묵히 옥간을 옆 수사에게 넘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간이 한 바퀴를 돌자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한 두 명은 콧방귀를 뀌기도 했다.
“모두 보셨으면 의견을 내주시죠.”
태진문 지양 상인이 모두를 향해 물었다.
“건방진 것들 아닙니까. 우리에게 천남 전역의 절반을 내놓으라니 우리를 이길 거라 확신하는 모양입니다?”
금포를 입은 수사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절반을 달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모란인들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는 것을 우리가 모를 줄 안단 말입니까. 전쟁을 길게 끌면 천천히 말라 죽는 쪽이 누구일지는 뻔한 일을!”
뒤룩뒤룩 살이 찐 노인이 간교하게 중얼거렸다.
“로 수사,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전쟁을 길게 끌면 깊숙이 위치한 천환종은 피해가 없겠지만 우리 같은 종문들은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단 말입니다!”
“모두를 위해 의견을 낸 겁니다. 종문이야 재건하면 되지요!”
살 찐 노인은 새까만 거한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비죽거렸다.
“허! 말은 쉽습니다. 만일 마도에서 변경 국가들을 나 몰라라 한다면 우리라고 대신 모란 대군을 막아 줄 것 같습니까? 당장 천라국으로 종문 전체를 옮기면 사상자 한 명 없이 물러날 수도 있는 것을.”
“당신들…….”
“됐소! 장기전으로 갈 것인지 말지는 이미 논의를 마친 일 아니오. 지금은 모란 법사 대군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상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입니다. 분란이나 만들자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흑포 거한이 듣고 있다가 얼굴을 굳히며 질책했다. 합환 노마의 말에 세 명의 수사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세 분은 언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번 법사 대군의 압도적인 기세로 보아 장기전은 어려울 거라 결론이 났으니까요. 만일 천남 대부분의 세력을 결집하지 못하면 공세를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종파나 국가의 역량으로 맞서다가는 줄줄이 패하고 결국은 피해가 온 천남에 이를 테니까요. 그러니 이번 대전은 반드시 치러야 하며 또한 모란인들을 대패시켜야 합니다.”
지양 상인이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러자 잠시 웅성거리던 장내가 다시 조용해 졌다.
“모란인들이 무슨 꿍꿍이인 줄은 모르겠으나 까짓것 싸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란 초원에 수도 자원이 부족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갑자기 어령종 동문도가 목소리를 냈다.
“모란 초원이 자원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영석 광산과 같은 일상적인 수련에 필요한 자원은 법사들의 수에 비해 현저히 적은 편이지요. 하지만 희귀한 재료라면 또 다릅니다. 몇몇은 우리 천남보다 풍족하니까요.”
모란인들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듯한 수사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들은 어찌 자신들이 이길 거라 자신한 답니까? 원영 후기 수사를 제외하고 아무나 참가 가능하고 열 판으로 승부를 보자니. 게다가 생사를 건 도박! 아니 우리 천남 수사들은 모두 얼간이들로 본단 말입니까?”
동문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이런 제안을 하는 데는 속셈이 있을 것이다.
한립도 제안이 달갑지가 않았다.
이번 대결은 쌍방의 진영 사이에서 벌어져 암습을 가할 수 없었고 내기에 걸린 재료를 참전하는 수사들이 각자 지니고 나가 승자는 상대의 저물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은 열 번의 대결이 반드시 동시에 벌어져야 하며 패자는 달아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소리였다.
“모란인들이 무슨 생각인 줄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도 절호의 기회이긴 합니다. 대전 중에 상대의 고계 법사를 줄일 수 있다면 이익이 적지 않을 테니까요.”
“허! 모란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문제 아닙니까.”
한 수사가 머뭇거리며 낸 의견에 다른 수사가 조소했다.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모란인들이 내기 대결을 하자고 제안했으니 우리는 거절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7일 후에 우리 계획대로 전쟁에 임하면 되는 것이지요. 상대가 무슨 꿍꿍이이든 허사로 만드는 겁니다.”
이 말은 예항재 황 노인의 의견이었다.
“안타깝지만. 황 수사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우린 이번 내기에 반드시 참가해 승리를 거둬야만 합니다.”
지양 상인이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이대로 모란인들에게 질질 끌려가자는 말씀이십니까?”
황 노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들 노인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지만 모란인이 진격하며 잡아간 수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구국맹 수사들이 가장 많겠지만 각 종문에서 파견을 나온 제자들도 적지 않게 당했지요. 파견 나온 사절에 따르면 인질의 수가 족히 천여 명이랍니다.”
지양 상인이 음울한 얼굴로 사실을 토로했다.
“정말 입니까? 그 말은 이번 대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질을 죄다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모란인들은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보복할게 두렵지도 않답니까!”
황 노인이 언성을 높였다.
“인질을 죽이겠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수사들을 구할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하더군요. 열 번의 대결에는 각각 대량의 재료 뿐 아니라 백여 명의 인질들의 귀환이 걸려 있습니다. 이기기만 하면 그들은 바로 풀려나는 겁니다.”
이번에는 수사들도 바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납치된 인질들 대부분은 저계 수사들이고 그다지 중요한 병력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고계 수사들은 각자 자신의 종파와 가문을 대표해 지원을 나온 이들이었다.
이들을 구하지 않고 모두 죽게 놔둔다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기가 꺾일 것이다. 특히 저계 제자들은 충격을 받아 전력을 다하지 않고 도망갈 가능성도 있었다.
“초원의 야만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계략을 꾸밀 줄이야. 이전 침략 때와는 다르군요.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겠어요.”
룡함이 탄식하며 내기를 찬성했다. 다른 이들도 모란인들의 교활함에 놀라고 있었다.
“이번 대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 걸 모두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어떤 계략을 세우든 반드시 법사들을 꺾어야 합니다.
그들이 내건 교전 방식으로 보건대 대결 중에 암습을 하는 것은 어려우나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우리가 바로 중지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대결은 생사가 걸린 만큼 출전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지양 상인이 장 내의 수사들을 훑어보았다. 수사들이 속으로 조소했다.
강요하지 않겠다니, 그럼 누가 스스로 대결에 나가겠는가? 이번 대결은 법사들이 요구한 것이니 찜찜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패배하면 죽음뿐인 대결이었다. 지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간 고된 수련을 해온 이들이 어찌 쉽게 목숨을 걸겠는가.
한립도 나설 생각이 없었다. 이번 전쟁에 힘을 보태기로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도 생명의 위협이 없을 때였다. 황룡산 일전에서도 거의 죽을 뻔 했는데 그런 경험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청 안의 수사들의 안색을 본 합환종 노마가 얼굴을 굳히며 냉소했다. 그의 섬뜩한 웃음소리에 몇몇은 안색이 변했지만 그래도 다들 나서려는 이가 없었다.
지양 상인은 고개를 저었고 위무애는 그저 두 눈을 감고 한 마디도 끼어들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지양 상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와 다른 두 수사가 미리 상의한 결과 이번 대결은 위험도가 크니 승자에게는 전리품인 재료들을 갖게 하는 것으로 보상을 대신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몇몇 수사 분들이 희귀한 재료를 구하려고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셋의 소장품 중에 수사 분들을 만족시켜 줄 만한 재료들이 있습니다.”
지양 상인이 이야기를 하며 몇몇과 시선을 마주쳤는데 그 중에는 한립도 있었다. 한립이 그것을 감지하고 의아해 했다.
비록 매혹적인 조건이었지만 대부분이 입을 떼지 못하는데 갑자기 시종일관 말이 없던 위무애가 고개를 들어 입을 달싹이며 옆에 앉은 쇄혼 진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쇄혼 진인의 안색이 밝아지며 입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위무애와 상의를 하는 듯 했다.
잠시 후 쇄혼 진인이 머뭇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동시에 흑포 거한도 합환 노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앉아 있던 합환 노마가 자신의 종문 대장로의 전음을 듣더니 눈썹을 치켜 올리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좋습니다. 약조만 지켜주신다면 본 진인이 위험을 감수해보겠습니다.”
쇄혼 진인이 고민을 마치고 이렇게 답했다. 다들 조금 놀란 가운데 운로 노마 역시 입을 열었다.
“쇄혼 수사께서 참가하신다니, 저도 한번 나가 볼까요. 그 많은 재료가 아깝지 않습니까.”
다른 수사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불안해했다.
이어서 삼대 수사들이 한명씩 수사들에게 전음으로 이야기를 하자 수사들은 대부분 기뻐하거나 혹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대결에 임하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단 두 명만이 냉랭히 고개를 저으며 단번에 거절 했을 뿐.
한립도 그 모습을 보며 무슨 일인가 생각하는데 지양 상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한 수사, 사방팔방으로 대량의 경정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은연중에 예상하고 있던 제안이었지만 그래도 심장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공공연하게 천도맹에 경정을 수색해 달라 말해놓았으니 지양 상인이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법보를 제련하는데 필요해서 구하고 있습니다. 설마 지양 수사의 수중에 대량의 경정이 있으십니까?”
“허허허! 맞습니다. 저와 위 수사가 각각 꽤 큼지막한 경정을 몇 덩이 지니고 있지요. 수사가 쓰기에 충분할 것 같은데 흥미가 있으신지.”
“먼저 경정을 보고 대결 참가를 결정하겠습니다.”
지양 상인이 웃으며 바로 그러겠다고 답했다.
단시간 내로 다섯 수사가 참가하겠다고 선언했고 몇몇은 한립처럼 대결 참가를 고려중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지양 상인 등 삼대 수사들은 크게 만족해했다.
곧 더는 전음을 주고받지 않고 어떻게 법사 대군에 응전할 것인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법사 대군의 전력과 진법의 운영과 같은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한립은 경정 생각으로 정신이 없었다.
사실 한립은 현재 자신의 본명 법보인 청죽봉운검의 위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비검이 다른 수사들의 본명 법보보다 위력이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상대해온 대다수의 적들이 그보다 확연히 약하거나 엄청난 강자여서 약자에게는 비검을 꺼낼 것도 없이 청원검기만으로도 충분했고 강자에겐 비검이 통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두루마리에 기술된 청원검결 최후의 능력인 대경검진을 보고서야 청죽봉운검과 청원검결의 조화로 얼마나 강력한 위력을 낼 수 있는가 알게 되었다.
대경검진을 펼칠 수 있다면 원영 후기의 수사라도 능히 겨뤄볼 만 했던 것이다.
다만 허천정의 경우 은월이 대단한 보물이라고 극찬을 했지만 실제로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아직 약간의 의심을 남겨두고 있었다.
현재 상태로는 대경검진이야말로 그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경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만일 경정이 충분해서 대경검진을 제련할 만하다면 그때 고려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모란 신사만 아니라면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대결 중에 어떤 음모가 있더라도 풍뢰시와 자라극화가 있는 그에게 겨우 대결 공간을 막은 장벽은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대충 마음을 정한 그가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