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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25화 (182/2,000)
  • # 425

    425화. 한자리에 모인 노괴들

    이튿날 아침, 한립이 주둔지를 나서 천일성 중심 구역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거대한 석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일성 자체가 급조된 성이라 사대세력의 고위층이 결집하는 대전인데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천도맹 의사 대전에 비해 크기만 컸을 뿐 거의 그대로 모방해 지은 듯 했다.

    그래도 대전 입구를 지키는 이들이 결단기 수사들이라는 점이 남달랐다. 그들은 한립을 보고 의식으로 훑고는 즉시 걸어 나왔다.

    “선배님, 금일 회의는 원영 중기 이상의 선배님들만이 참석하실 수 있습…….”

    “확인해 보거라.”

    한립이 상대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하얀 옥간을 던져 주었다. 그에게 온 참가 요청서였다.

    “한 선배님이셨군요! 완배가 실례를 하였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들 중 하나가 옥간의 내용을 살피고는 더욱 공손히 예를 취하며 비켜섰다. 미소를 지은 한립이 걸어 들어가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옆 골목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남녀가 보였다.

    남자는 겨우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화려한 금포에 새하얀 피부를 지닌 미남이었고 걸음걸이 또한 아주 호방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눈빛에서 세월이 묻어났고 눈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주름이 져서 실제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음을 짐작케 했다.

    또한 그 자에게서 은은히 여인의 분위기가 풍겨 남장 여자와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원영 중기였으니 이번 회의에 참석하러 온 자일 텐데 괴이한 분위기로 보아 마도 수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 종 수사지? ’

    한립이 재빨리 그의 뒤에서 쫓아오는 여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한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의 매혹적인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바로 동훤아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녀 앞에서 걸어오는 젊어 보이는 노괴도 마도 제일종문인 합환종 수사일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동훤아도 결단 중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의 영근 자질에 비해 빼어난 성과였다. 한립이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니 주변 결단기 수사들도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합환종 고 노마까지 올 줄이야.”

    ‘고 노마? ’

    한립이 바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합환종에는 원영 후기의 수사 외에 고 씨 성을 지닌 또 한명의 노괴가 있었다.

    태생적으로 음양을 모두 타고난 몸으로 합환종 최상의 마공을 수련해 스스로는 운로 진인이라 칭하지만 다른 이들은 운로 노마라고 칭하는 인물이었다.

    본성이 그런지 아니면 수련하는 공법의 문제인지 색을 밝혀서 별별 해괴한 짓은 다하는 늙은이였다. 남녀를 불문하고 아름다운 이만 보면 놔두지를 않아 많은 문파와 척을 지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의 수행이 높고 합환종이 비호하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수사들을 죽이지 않고 겁탈만 하고 놔주니 피해를 입은 종문의 어른들도 일을 쉬쉬할 뿐 공론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저 자가 그 노괴라고? ’

    한립은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공교롭게도 미청년도 대전 앞의 한립을 발견하고 빙그레 웃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한립이 등골이 서늘해지며 간신히 미소로 화답하고는 동훤아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그대로 대전으로 들어갔다.

    “어찌 아는 자더냐?  방금 네 심박이 빨라지던데.”

    유유히 걸어가던 청년이 한립이 사라지자 웃음기가 싹 사라져 동훤아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알던 자인데 오랜 세월 보지 못하다 갑자기 마주치니 놀라 그러하였습니다.”

    동훤아가 평정을 되찾으며 답했다.

    “알던 자라?  원영 초기에 이번 회합에 참가하는 것을 보니 명성이 자자한 한 장로겠군. 네가 일전에 언급한 자와 동일 인물은 아니겠지?”

    노괴의 물음에 그녀는 그저 얼굴이 창백해져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운로 노마의 얼굴에 한기가 스쳤다.

    노마와 동훤아가 문 앞에 도착하자 결단기 수사들은 노마를 바로 통과시켰지만 동훤아는 대전에 들 수 없어 편전으로 안내받았다.

    그때 먼저 대전으로 들어간 한립은 대청 입구를 발견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일고여덟 명의 수사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한립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눈을 감거나 보는 둥 마는 둥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호의를 담아 인사를 했다.

    “한 수사, 출관하셨나 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 옆에 앉으시죠.”

    바로 천도맹의 주관자인 란명종 룡함이었다.

    “감사합니다, 룡 형.”

    한립이 거절하지 않고 그 옆에 자리를 잡고는 조용히 주변인들을 살펴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로 노마 역시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수사들을 둘러보더니 웃음을 흘리며 빈자리를 찾아 거침없이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분내가 확 풍겨 왔고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남색 장포의 노인은 그 냄새를 맡더니 즉시 불쾌하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노마는 노인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맞은편 한립을 살피며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한립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기분이 편치 않았다.

    그는 당장 무표정하게 두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저 노마와 동훤아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동훤아는 그 당시 합환종 소주에게 납치당한 후 마도에 귀의했다. 운로 노마가 아무리 악명이 자자해도 자기 종문 제자에게 무슨 짓을 했을 리 없으니 다른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립이 곤혹스러워 하는 가운데 다른 수사들이 차차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모두 원영 중기 수사들이니 먼저 와 있는 이들 중에 아는 자도 있을 것이고 원한 관계인 이들도 있었다. 고요했던 대청 안이 때때로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이제 운로 노마는 시선을 거뒀지만 한립은 여전히 눈을 감고 꼼짝 않고 있었다. 어차피 원영 중기 이상의 수사들 중 아는 이들도 몇 없으니 담소를 나눌 일도 없었던 것이다.

    “쇄혼 수사! 수사께서도 오셨군요. 구혼비공(九魂秘功)이 절정에 이렀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쇄혼? ’

    누군가의 인사말에 한립이 눈을 떴다.

    대청 입구에 회색 장포를 입은 마른 노인이 흑의 노인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회색 장포 노인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한 수사, 쇄혼 진인과 아는 사이입니까?”

    옆에 앉은 룡함이 한립의 변화를 눈치 채고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정 사형께 실력이 대단한 분이라 들었을 뿐입니다.”

    한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월국에서 쇄혼 문인 문하의 제자를 죽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청 장로께서 쇄혼 진인과 겨루었다가 당한 일이 있어 그럴 겁니다. 그러나 한 수사의 명성으로 꺼릴 것은 없지요! 결단 중기 수사들 중에서 한 수사가 건드리지 말아야할 인물은 하나뿐입니다. 그 자는 천남 삼대 수사들도 골치 아파하는 인물이니까요.”

    “삼대 수사들도 골치 아파하는 인물이라니. 그런 자가 있습니까?”

    한립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관심을 보였다.

    “있지요. 그 자는 삼대 수사 중 하나인 지양 수사와 겨루다 지양 수사에게 부상을 입히고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홀로 생활 하는 것이 익숙한 인물이지만 법사들이 침략해오고 있으니 나타날 지도 모르지요. 전장에 합류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전력이기도 합니다.”

    “원영 후기 수사에게 부상을 입히다니! 정말 대단한 자입니다.”

    “수사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천한 노괴라는 이름이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천한 노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저계 수사로 변장해 영안수가 있던 금지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정마 양도의 첩자들도 천한 노괴를 크게 꺼리는 눈치였었다.

    “룡 형 부부만이 삼대 수사에게 대적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한립이 농담조로 이야기 하니 룡함이 고개를 저었다.

    “저와 봉빙도 홀로 그들을 상대한다면 적수가 되지 않겠지요. 물론 우리 둘이 협공을 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요.”

    한립이 미소 지으며 무어라 답하려는데 누군가의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적의가 담긴 시선에 경계심이 인 한립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생전 처음 보는 청록색 장포를 입고 길게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노인은 한립이 돌아보자 무표정하게 시선을 옮겼다.

    “한 수사는 모르는 분입니까?”

    “룡 형의 말투로 보아 꼭 알아야 할 분 같군요.”

    “어령종 대장로인 동문도입니다. 어령종의 실세이니 왕래는 없어도 얼굴은 다들 알지요. 듣자니 곡쌍포와 우애가 깊었다고 합니다. 곡쌍포가 모란인 첩자로 발각되어 죽었으니 증좌가 확실해서 따지지는 못 하여도 수사에게 불만이 있을 겁니다.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룡함의 충고에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머지 의자들도 거의 주인을 찾았다.

    우스운 일은 일부러 그랬는지 무의식중에 그랬는지 마도 수사들은 전부 대청 우측에 정도 수사들은 전부 대청 좌측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천도맹과 구국맹 수사들은 별 상관없다는 듯 좌우로 골고루 섞여 앉아 있었다.

    그들 중에 한립이 아는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예항재 황 수사가 마도 쪽에 앉아 한립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한립이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그때 옆에 있던 룡함이 또 다른 천도맹 수사 들을 소개 시켜주었다. 한 명은 평범한 용모의 소박한 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우거지상을 한 노인이었다.

    한립이 그들과 눈인사를 하며 용모를 기억해 두었다.

    수사들이 모두 모이자 다들 사사로운 잡담 없이 냉랭히 서로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구든 수도계에서 명성이 자자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서로 알든 모르든 여러 가지 생각이 들 만했다.

    대청 안이 고요해지자 쪽문 쪽에서 세 수사가 걸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집중되었다.

    흑포 거한과, 녹의 노인 그리고 등에 검을 맨 도사였다.

    한립이 차분히 눈을 떴지만 내심 심장이 뛰었다.

    ‘저들이 근 천 년 간 천남에서 원영 후기에 이른 단 세 명의 수사들이구나.’

    다들 표정은 상이했지만 대부분 한립처럼 무표정하게 그들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세 수사가 천천히 대청 중간으로 걸어와 나란히 섰다. 중간의 험상궂은 인상의 흑포 거한이 냉랭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누군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럼 우리가 회의를 주재하는데 반대 의견이 있는 분 있소?”

    차가운 목소리와 같이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대청을 휩쓸었다.

    다들 미미하게 안색이 변한 가운데 한립은 강대한 법력을 감지함과 동시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한 음기가 느껴지는 마기로 보아 마도 합환 노마일 텐데 노마의 모습이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합환종 대장로라기 보다는 공법이 마치 귀령문 마공과 비슷했던 것이다!

    한립은 몰랐지만 역대 합환종 대장로들은 모두 합환 노마라고 불렸다. 흑포 거한도 합환종과 크게 상관없는 마공을 익혔지만 칭호는 합환 노마인 것이다.

    다들 거한의 압박에 마음이 불편해도 삼대 수사들의 권위에 도전하지는 않았다.

    일순 대청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반대 의견이 없다니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생략합시다. 오늘 아침 모란인 쪽에서 사절을 파견해 도전장을 보내왔소. 만일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7일 후 경계 지대에서 결전을 벌이자고 말이오.”

    흑포 거한이 무표정하게 설명했다.

    “도전장이요?”

    “7일 후라니…….”

    “조건이 무엇입니까?”

    장내가 소란해졌다.

    “역 형의 말씀대로 상대가 선전포고를 해왔으니 다들 일단 확인하시고 상의를 합니다. 생각보다 이르기는 하나, 설마 이곳에 모인 분들이 모란인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검을 맨 도사가 웃으며 차분히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마치 봄바람처럼 가슴에 스며들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놀란 수사들이 조용해진 가운데 누가 중얼거렸다.

    “태진문의 정심결(靜心決)이로군.”

    투덜대는 어투였지만 중년 도사는 못들은 척 하고 품에서 새빨간 옥간을 꺼내들었다. 그가 맞은 편 회색 장포 노인에게 웃으며 그것을 건넸다.

    “모란인들의 선전포고문이니 돌아가면서 확인하시지요.”

    노인이 조용히 옥간을 받아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의 얼굴이 얼마간 어두워졌다가 냉정을 되찾고 다시 옆 사람에게 옥간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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