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4
424화. 뇌주(雷珠)
한립은 고개를 들어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추마골에 정말 영촉과가 있다면 나도 위험을 감수할 것이다. 수행이 원영기에 이르렀으니 평범한 방법으로는 더 진보하기는 어렵겠지. 그러나 모든 일이 확실해 지기 전에 이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때가 되면 귀령문의 방법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말해 주겠지만 어차피 내 추측일 뿐이다. 창곤 상인이 남겨 놓은 방법보다 안전한 방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송 여인이 긴 설명을 들으며 깨달은 바가 있는지 말이 없었다.
“지금 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네가 물어 대답은 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천일성으로 돌아가면 가장 중요한 일은 앞으로의 전쟁에서 죽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면 추마골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전쟁에 집중하도록.”
“예, 사숙님!”
푸른 빛줄기가 다시 속도를 올려 성 쪽으로 날아갔다.
* * *
며칠 후, 천일성 낙운종 주둔지.
금제가 층층이 둘러진 밀실 안에 앉은 한립이 두 손으로 대여섯 장 길이의 거검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검 표면을 타고 흐르는 자홍색과 푸른색 화염들은 한립의 자라극화와 그 괴이한 등잔의 불꽃이었다.
자령과 헤어지고 돌아온 후 한립은 며칠간 려락의 소개로 낙운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원영기 수사들을 여럿 만나보았다.
사실 동급 수사들을 이렇게 만나볼 기회가 많지는 않았는데 며칠 사이 열댓 명이나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그들도 한립의 명성을 듣고 대우가 나쁘지 않았기에 몇몇과는 꽤 말이 잘 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사를 마친 후에야 황룡산 일전을 통해 얻게 된 후환을 처리하기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비검이 무사한 것은 전부 자라극화가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푸른 등잔 불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자라극화에 맞먹는 위력을 지녀 어찌 제련해 없애야 할지 머리가 아파왔다.
만일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청죽봉운검은 운용할 수가 없는데다 건람빙염이나 자라극화 역시 싸움에서 쉽사리 활용할 수가 없게 된다.
한립은 잠시 후, 거검을 공중으로 던져 푸른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거검이 밀실 안을 선회해 수십 개의 작은 비검들로 흩어졌다. 그의 의지에 따라 대부분의 비검들은 체내에 흡수되었지만 단 하나의 비검 만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한립이 검 표면의 불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입을 벌리자 자홍색 화염이 뿜어져 나와 얼마 안 되는 푸른 화염을 압도했다. 그의 손에서 푸른 법결이 또 한 번 날아가자 흉흉한 자홍색 불길이 푸른 화염을 밀어 붙여 작게 뭉치더니 콩알만 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을 지켜보는 한립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무거워졌다.
그가 다시 심호흡을 하며 열 손가락을 튕겨 각양가객의 법결을 검으로 쏘아 보내자 자홍색 화염이 더욱 힘을 얻어 또 한 번 푸른빛을 압도했다.
푸른 화염은 검 끝에 간신이 달라붙어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았지만 자홍색 화염이 계속 밀어붙일수록 더욱 활활 타올랐다.
한립이 약간 초조해져 법결을 날리는 손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진전이 없자 그의 얼굴이 굳어갔다.
잠시 고민에 빠진 한립은 생각 끝에 다섯 손가락에 눈을 찌를 듯한 자홍색 화염을 덮은 채로 콩알만 한 푸른 화염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한립의 다섯 손가락이 자홍색 화염을 뚫고 들어갔지만 푸른 화염에서 막대한 반탄력을 느끼며 물러섰다.
그러나 의식으로 손바닥 전체에 자홍색 화염을 덮어 푸른 화염을 눌러버렸다.
그는 이런 동작을 일각이나 더 한 후에야 다섯 손가락을 털어냈다. 그러자 자홍색 화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전히 밝게 빛나는 푸른 화염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생각 보다 더 골치 아픈데.’
쿠릉.
한립이 비검을 향해 손짓하자 낮게 천둥소리가 들리며 금빛 뇌전이 튀었다.
뇌전은 나타나자마자 폭발하며 무수히 많은 금빛으로 흩어졌는데 푸른 화염이 번뜩이더니 그것들을 삼켜버렸다. 곧 콩알만 한 푸른 화염이 더욱 커져 달걀만 해졌다.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립은 결심이 섰는지 입을 벌려 비검의 자홍색 화염을 빨아 들였다. 곧 비검 전체에 자홍색 화염은 모두 사라지고 자라극화에 압도당해 있던 푸른 화염이 비검 전체를 감쌌다.
한립이 냉소하면서도 얼굴에 아깝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즉시 몸의 이상을 감지하면서도 열 손가락으로 검기를 쏘아 보내자 벽사신뢰와 마찬가지로 푸른 검기도 화염에 흡수당해 사라졌다.
그러나 한립은 주저 없이 체내의 영력을 동원해 검기를 연달아 쏘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처럼 커진 푸른 화염이 한립의 면전에서 활활 불타올랐다.
한립이 체내의 법력을 거의 삼분의 일 정도 소모한 후였다.
거대한 화염을 보면서도 한립은 도리어 웃음을 흘렸다. 그가 손을 뻗어 푸른 화염에 휩싸인 비검을 가리켰다.
푸슉.
청죽봉운검이 가볍게 화염에서 벗어나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한립이 자세히 살펴보니 표면에 화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역시 그랬군! 아무리 신묘하다하나 영력을 흡수하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청원검기를 그렇게 과도하게 흡수하니 오히려 통제가 가능해졌어.”
이어 손바닥을 쥐니 푸른빛이 반짝이며 비검이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야 한립은 푸른 화염에 의식을 불어 넣어 바라보았다. 푸른 화염은 진동을 하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빛을 깜빡거리며 비틀거리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
한립이 턱을 짚으며 고민했다.
저렇게 위력적인 화염을 그냥 버리는 것은 낭비였다. 눈앞의 푸른 화염은 청원검기를 대량으로 흡입해 지금은 간신히 조종이 가능하지만 그가 제련한 화염이 아니었으니 건람빙염이나 자라극화처럼 자유롭게 조종할 수 없었다.
미간을 좁히던 그가 저물대를 스쳐 옥처럼 새하얀 갈빗대와 연노란색 병을 꺼냈다. 바로 현음경이 적혀 있는 뼈다귀 옥간과 요수의 혼을 흡입하는데 사용했던 법기였다.
병의 마개를 열자 안에서 검은 기운이 새어나왔다.
한립이 다섯 손가락으로 허공을 쥐자 검은 기운이 손바닥으로 날아 왔다가 그의 의식에 따라 음혼(陰魂)의 기운이 다른 손의 갈빗대로 솟구쳤다.
새하얀 갈빗대가 새까맣게 변해 허공으로 떠오르자 한립은 의식을 불어 넣어 현음경의 내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음화뢰(陰火雷)라는 글자를 찾고는 기뻐하며 자세히 내용을 살폈다.
현음경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음화뢰를 제련하는데 성공하면 위력이 굉장해서 파괴 능력으로만 보면 천도시화를 능가한다고 했다.
본래는 현음대법의 대량의 정순한 음화에 뇌전의 힘을 불어 넣고 다른 재료들을 섞어 특수한 방법으로 제련해 내는 것으로 완성된 음화뢰를 발동하면 음화와 뇌전이 움직여 엄청난 폭발력을 내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뇌주는 일회성 소모품으로 만들기도 어려웠고 벼락 속성의 영력을 지닌 수사만이 제련이 가능했다.
그래서 극음 노괴도 현골 상인도 음화뢰를 제련해 내지 못한 것이다.
한립도 처음에 음화뢰 제련법을 보았을 때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벽사신뢰가 있었으나 현음대법을 수련하지 않았으니 불필요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푸른 화염을 보다보니 불현 듯 음화뢰의 제련 비법이 떠오른 것이다. 한립이 비록 현음대법은 펼칠 수 없지만 제련 비법을 개선해 눈앞의 푸른 화염을 이용한다면 될 듯 했다.
사실 예전에 건람빙염이나 자라극화로 뇌주를 제련해 볼까하고 고민했었지만 워낙 제련해 놓은 것이 소량이라 모험을 하기에는 아까웠다.
그런데 어차피 마음대로 다룰 수도 없는 눈앞의 푸른 화염이라면 뇌주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성공만 하면 전투에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저물대 속에서 뇌주 제련에 필요한 다른 재료들을 꺼내놓았다. 필요한 것들을 모두 펼쳐 놓은 그는 활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보며 양손을 들었다.
쿠르릉!
금빛 뇌전이 손바닥에서 튀어 올라 푸른 불꽃을 향해 날아갔다.
* * *
낙운종 주둔지의 어느 대청 안, 려락은 의자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홍의 노인과 송 여인을 포함한 낙운종 결단기 수사들도 함께 있었는데 표정이 조금 다급했다.
“단 사질, 네 한 사숙께서 폐관에 들어간 지 며칠 째더냐.”
“사숙님께 아룁니다. 벌써 두 달이 훌쩍 넘으셨습니다. 저와 송 사매가 줄곧 밀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나오신 일이 없습니다.”
“그래. 사제가 내게 미리 말하기를 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폐관에 들어간다 했으니 방해를 해서는 안 될 일이지. 하지만 모란인들이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기세이니 문제구나.
게다가 고위층 회합에도 번번이 핑계를 대며 미뤄왔는데 이번엔 삼대 수사들이 모이는데다 한 사제를 직접 청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이번 회의는 원영 중기 수사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것이니 한 사제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보여주는 일이지.
게다가 내 예상에는 이번 회의를 통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것인지 결정이 날 텐데 참석할 수만 있다면 이득이 많을 것이다.”
려락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한 사숙님께서 폐관 중이신데 방해를 하였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송 여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려 사숙님께서도 계속 미뤄 오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내일 회합에도 한 사숙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다른 분들이 어찌 여기…….”
중년 수사가 머뭇거리며 반박하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른 분들이 어찌 여긴단 것이지?”
한립이 대청 입구에서 평안한 얼굴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한 사제, 드디어 출관을 했구만!”
다른 이들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올릴 때 려락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완전히 뜻한 바를 이룬 것은 아닙니다. 계속 폐관을 하려니 아무래도 모란인들 쪽이 걱정되어 일단 나와 본 것이지요. 그런데 때를 잘 맞춰 나왔나 봅니다.”
“허허허! 방금 서한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게로군. 사제를 만나 보고자 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네. 다른 이들이야 그렇다 치고 내일 있을 고위층 회합은 꼭 한번 가봐 주게. 우리 낙운종 세력의 절반이 참전하는데 큰 피해를 입어서야 되겠나? 이번 대전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잘 듣고 와서 이 사형의 근심을 덜어주면 좋겠네.”
려락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 내일은 가봐야겠지요. 저 역시 삼대 수사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기대가 됩니다.”
한립의 수락에 려락이 신이 나서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법사들이 군사를 파견해 경계 근처 결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단 말입니까?”
“그렇네. 겨우 사나흘 전의 일이고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모란인들 쪽의 전쟁 준비가 끝났다고 봐야겠지.”
“전쟁 준비가 끝났다니 그럼 우리 쪽은 어떠합니까?”
“우리와 모란인들은 상황이 달라서 말이야. 모란 법사들도 각 부족이 연합을 했다지만 우리 천남처럼 수많은 종문들이 모인 것은 아니네. 그러나 모란인들은 침공을 준비한지 오래되었고, 우리는 이제 막 준비를 시작하니 조금 늦은 감이 있지. 그래도 사대 세력이 힘을 합쳐 대충 결전을 할 만한 상태네.”
“언제든 대전이 시작될 수 있다는 뜻이군요.”
한립이 코끝을 문지르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삼대 수사들이 서둘러 모여 내일 회합을 주체할 리 없겠지. 원영 중기 이상의 수사들은 천남 전역에서도 거의 없지 않은가.”
려락이 탄식했다. 대청 안에서 두 장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결단기 수사들 역시 얼굴이 숙연해졌다.
이후 려락은 낙운종 제자들의 훈련 진행 상황과 이후 관련 사항에 대해 말해주었다. 한립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내일 있을 천남 삼대 수사들의 회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한립이 먼저 일어나 대청을 떠났다. 두 달 동안 밤낮 없이 푸른 염화를 제압하고 그 후에는 뇌주까지 제련하느라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