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
422화. 의외
“어떤 재료입니까? 조금 더 분명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룡함이 물었다.
“법보를 제련할 경정(庚精)이 필요하고 수량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허나 모두 안심하시지요. 경정은 제가 동급의 물건과 거래해서 가져올 생각이니까요. 그저 맹의 힘을 빌려 구해 주시거나 소식을 알아봐 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계속 대량의 경정을 구할 길이 없어 대경검진(大庚劍陣)을 제련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고민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경정!”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날카로운 금속이자 제련계의 보물로 유명한 경정을 모두 모를 리 없었다. 한립이 그런 역천의 재료를 원하자 다들 놀란 것이다.
“한 수사 어떤 법보를 제련하려고 경정이 많을수록 좋다는 겝니까? 수사도 알다시피 이런 보물은 법보에 조금만 첨가해도 위력이 크게 늘어납니다. 양이 많아진다고 더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압니다. 그저 맹에서 일정 수량이라도 구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황 노인이 미간을 좁히며 말하자 한립이 차분히 냉정을 유지했다.
“한 수사가 등가 교환을 통해 경정을 얻고자 하니 정보를 수집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허나 이런 재료는 손에 넣으면 대부분 바로 사용해 버리는 터라 한 수사의 말대로 많은 수량을 구하긴 어렵지요.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숨기고 있으면 알아낼 방법이 없고요. 저번 경매회에서도 아주 소량만 물건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룡함이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도 다 고려해 봤던 이야기였다.
천남에서 경정을 찾을 수 없다면 소문으로만 듣던 제국이나 천사(天沙) 대륙으로라도 떠나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대진국의 면적이 천남의 열 배 이상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경정을 쉽게 찾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음명의 땅에서 가져온 유골함에 강령부 제련법이 적혀 있는데 대진국에 가면 응당 천부문에 그것들을 돌려줘야 할 게 아닌가.
한립의 표정을 보며 려락이 참다못해 권했다.
“한 사제, 조건을 바꾸지 그러는가. 경정 같은 물건은 인연이 닿아야 만날 수 있는 재료일세.”
미간을 좁힌 한립이 그의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경정은 제게 꼭 필요합니다.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맹에서 이 일을 맡아 수행해 주시지요.”
“한 사제가 그리 고집한다면 맹의 제자들을 시켜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경정을 전혀 찾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으니 후회하지는 마십시오.”
룡함이 의연한 얼굴의 한립을 보며 결국 조건을 수락했다.
천도맹이라는 거대한 세력에게 저계 제자들을 풀어 정보를 수집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황 노인과 다른 수사들도 다른 의견이 없었다.
다만 룡함은 이런 식의 보상이 너무 부족하다 여겨 중계 영석이 백여 개가 든 꾸러미를 내주었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거절 않고 영석을 받았다.
일이 일단락되자 편전의 분위기도 한결 가벼워졌다.
천도맹 수사들이 한담을 나누며 화제가 황룡산 일전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흑의 법사와 갑자기 등장한 신사의 능력에 대해 특히 관심을 보였다.
한립도 숨기지 않고 그 날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자신의 공법과 법보 등에 대한 정보는 대충 지나갔지만 말이다.
함룡과 다른 수사들도 그의 내밀한 신상 정보를 캐물을 정도로 무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립이 흑의 법사들이 요괴나 귀신과 같은 이종족이 아니라 어떤 마공을 수행한 마수(魔修) 같다는 이야기를 하자 룡함의 눈썹이 솟구쳤다.
그렇게 한립은 반나절을 편전에 있다가 나왔다. 려락과 한립이 막 대전을 나서는데 전음부가 려락에게 날아왔다.
내용을 확인한 그가 한립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급한 일이 있어 가봐야겠네. 한 사제는 천일성이나 한번 돌아보고 저녁에 우리 사형제끼리 다시 한 번 모이자고.”
“급한 일이 있으시면 어서 가보시지요.”
한립이 려락에게 호의를 담아 미소를 짓자 려락도 편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붉은 빛줄기로 변해 자리를 떴다.
‘정말 급한 일인가 보군.’
한립이 멀어지는 빛줄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하고는 중심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채 몇 걸음도 가지 않아 그가 멈춰 섰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가 어느 골목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백봉봉 송 여인이 붉은 입술을 깨물고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한립은 결국 그녀에게 손짓을 했고 송 여인은 주저하면서도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한 사숙님을 뵙습니다.”
“오래도 기다렸구나.”
“한 시진 정도 되었습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따르거라. 여긴 대화를 나눌만한 곳이 아니니.”
한립의 시선이 사방을 훑더니 차갑게 말했다. 이후 그는 여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송 여인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뒤따랐다.
* * *
“무슨 일이더냐.”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한립이 느긋이 물었다.
“사실은…… 누군가 사질에게 서신을 보내 사숙님께 전해 달라 하였습니다. 사숙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요.”
송 여인이 뜸을 들이다가 품에서 옥간을 꺼내 한립에게 바쳤다.
“서신?”
한립이 의아한 눈으로 옥간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바로 의식을 불어 넣지 않고 물었다.
“누가 주더냐.”
“제 친우인데 그녀의 말로는 사숙님과 아는 사이라며…….”
“나와 아는 사이라고?”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이 옥간으로 이마를 짚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묘해지더니 옥간을 치우고 한결 온화한 어투로 물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 안내하거라.”
“정말 이 친구를 만나주시렵니까?”
이번에는 송 여인이 놀란 것 같았다.
“그래, 나름 교분이 있다해야겠지. 송 사질이 그녀를 안다는 게 뜻밖이군.”
“제자도 최근 2년 사이에 친분을 맺은 친우입니다. 그녀가 사숙님을 안다고 하기에 믿기지 않았는데 정말이었군요. 제가 성 밖에 마련한 거처에서 지내고 있으니 바로 모시겠습니다.”
송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웃으니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한립과 송 여인은 곧바로 성문을 벗어나 남쪽으로 날아갔다. 수십 리를 날아간 끝에 아무도 없는 작은 골짜기에 내려섰다.
옅은 안개를 통해 다른 이들의 이목을 속이는 약소한 결계가 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송 여인이 영패를 꺼내 붉은 빛을 쏘아 보내니 안개가 사라지고 작은 오솔길이 드러났다.
“사숙님, 이쪽입니다.”
여인이 공손히 한립을 안내했다.
산골짜기의 면적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임시 거처로 보이는 석조 건물 몇 개가 세워져 있었다.
잠시 후 송 여인이 금제를 푸는 것을 안에서도 느꼈는지 노란 의복을 입은 여인이 건물 중 하나에서 나타났다.
그녀가 한립을 보고는 다채로운 표정을 짓다가 조용히 걸어와 옷섶을 여미며 예를 취했다.
“매응이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원영기에 이르신 것을 감축 드립니다.”
온화한 목소리에 은근한 원망이 섞여 있었다. 한립이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쓴웃음을 짓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 소저, 수행이 크게 늘었군. 축기기 최고봉이니 결단에 이를 날도 머지않았소.”
눈앞의 수려한 여인은 한립과 함께 천남으로 돌아온 매응이었다. 수년이 흘렀지만 그녀의 외모는 더욱 아름다워지기만 했다.
“모두 선배님이 주신 단약 덕분입니다.”
매응은 원망하는 기색도 잠시 아주 공손하게 굴었다. 이제 원영기 수사였으니 그녀와는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령 수사는 안에 있어?”
이때 송 여인이 한립의 뒤에서 나와 매응에게 살갑게 물었다.
“송 선배님! 언니는 따로 수련중이라 곧 공법을 거두고 나올 것입니다. 두 분은 저를 따라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매응이 예의 바르게 대답하며 석실 안으로 안내했다. 매응이 두 수사에게 차를 올렸다.
“매 소저, 그간 자령 소저와 어디에서 수련을 했소? 설마 아직도 적당한 종문을 찾지 못한 것이오.”
한립이 영차를 한 모금 하며 물었다.
“저와 언니는 일단 천남의 각 종문을 살펴보고 일신의 수행을 높인 다음 거취를 결정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곳곳을 다녀보았지만 천남의 사정도 저희가 있던 곳만큼 복잡하더군요.”
매응이 한립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의 시선이 송 여인에게 닿았다.
“자령 소저를 대신해 날 찾은 것이 옛 이야기나 하자는 것은 아닐 테지. 그랬다면 한참을 쩔쩔매다 서신을 전해주진 않았을 테니까.”
“사숙님 그것이…….”
송 여인이 미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매응도 난감한 얼굴로 막 무어라 하려하는데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 형, 그들을 곤혹스럽게 하지 마셔요. 이번에 수사를 만나 뵙길 청한 것은 제 뜻이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선녀처럼 빛이 나고 반짝이는 용모의 여인이 들어왔다.
“사실 이제 한 형을 선배님이라 칭하는 것이 맞겠으나 입에 붙지 않아서요. 어쨌든 한 형의 연배는 저와 비슷하니까요. 거슬리십니까?”
자령이 우아하게 걸어 들어와 빙긋 웃었다.
한립과는 허천전에 음명의 땅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함께 겪은 데다 무변해에서 같이 보낸 나날들이 있었기에 나름 막역한 지기로 여기는 듯 했다.
한립이 그녀를 살펴보았다.
나라를 위태롭게 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면 이런 미모를 두고 이름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저 얼굴만 놓고 본다면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그의 마음속에있는 남궁완도 조금 밀릴 정도였다.
“뭐라 불러도 상관없소. 다만 자령 소저가 그대로 돌아다니다간 천남이 더 어수선해질까 걱정입니다. 괜히 다른 노괴들의 눈에 띠여 납치나 안 당하면 다행이고.”
난성해의 오랜 지기를 본 한립이 정말 오랜만에 농을 던졌다. 자령이 웃음 짓고는 송 여인에게도 인사를 했다.
“이번에 언니가 고생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천일성을 들어가기 어려워서요.”
“아니야. 나도 관련이 있는 일인데 당연하지.”
송 여인이 말을 하면서도 놀란 빛이 가득했다.
자령이 한립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한 형의 수행은 볼 때 마다 더 빨리 느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한 형의 명성에 놀랐습니다. 밖에서는 모두들 한 형의 실력이 원영 중기 수사를 압도한다던데 사실인지요?”
질문을 하는 자령의 얼굴에 기대감이 묻어났다.
“자령 소저, 만나자마자 실력이 어떤가를 묻는 것은 너무 조급한 일이 아니겠소. 일단 날 불러낸 목적을 이야기 해보시오.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결하고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느긋한 말투에 자령도 눈을 깜빡이며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제가 조금 조급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영 중기 이상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일이라 마음이 앞섰습니다.”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이오?”
“한 형도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가 찾아 뵌 것은 함께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한 형께서는 일전에 원영기 노괴들과 모란 초원에 가서 창곤 상인의 유물을 얻은 적이 있으시지요?”
“그걸 어찌 아시오? 아는 이가 거의 없는 것을.”
한립의 안색이 변했다.
“저희도 귀령문 수사의 입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장로의 직계 후손이라던데 우연히 자령 언니를 보고 빠져서는 거의 혼이 나가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인들 못하겠어요.”
한쪽에 서 있던 매응이 홀연 웃음을 터트리며 설명했다.
“계집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자령이 그녀를 나무라며 일순 뺨이 달아올랐다.
“귀령문에서 흘러나온 소식이라면 그럴만하군.”
“원영기에 드시고도 여전히 이전처럼 신중하시네요.”
“이제 막 원영기에 들었을 뿐 불사의 몸이 된 것도 아닌데 조심할 때는 조심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모란 초원에 다녀온 것이 무슨 상관이오. 설마 귀령문에서 무슨 정보를 들은 것이오?”
“사숙님의 혜안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추마골에 있다는 어떤 보물에 관해 그 귀령문 제자가 무의식중에 떠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금 어색하게 끼어있던 송 여인이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