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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21화 (178/2,000)

# 421

421화. 조건

려락이 대청 밖에서 서둘러 들어와 한립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다가왔다.

“한 사제 드디어 왔구만! 반년 만에 나타나다니 나와 사형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는가!”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원기가 좀 상해 요양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전천성 방어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형의 안위를 염려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으면 됐네. 이런, 다른 사질들은 어디 있느냐?  어찌 나와 한 사제에게 예를 올리지 않고?”

려락의 활짝 핀 얼굴이 주변을 살피고는 살짝 굳었다.

“사숙님께 아룁니다. 우 사제와 다른 이들은 오늘이 당번이라 산수들을 조정하러 나갔습니다.”

홍의 노인이 공손히 답했다.

“아, 그랬군. 그러면야 나무랄 수 없지.”

려락이 얼굴을 피자 한립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돌아오고 나니 유명인이 되어 있더군요. 저에 관해 떠드는 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하하! 안 그래도 내 말하려고 했네. 너희는 일단 나가 보거라. 한 사제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려락이 웃으며 말하려다가 홍의 노인과 여인을 보고 분부했다. 송 여인은 나가면서 슬쩍 한립을 쳐다보았다.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립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먼저 묻지는 않았다.

“사제, 나와 사형을 속이느라 고생했겠구만.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어찌 티를 내지 않는지.”

사질들이 나가자 려락이 쓴웃음을 지니며 투덜댔다.

“제가 원영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잘 아시면서 대단한 실력이라니요. 소문이 부풀려진 것입니다.”

“그리 겸손하게 굴 것 없네. 모란족 신사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어떨 지야 우리도 잘 아니까. 그런데 나와 사형이 놀란 것은 다른 것이네. 뜻밖에도 엄월종 원영기 여 수사를 구슬려 데려오다니 아주 탄복했어.”

려락은 웃으며 짓궂은 농을 했다.

“사형께서 완이를 만나 보셨습니까?”

헤어지기 전 남궁완에게 신분을 증명할 옥간을 주었는데 거기에는 그녀의 정체를 정확히 적어 놓지 않았었다. 그런데 려락은 남궁완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랬지. 남궁 선자가 이미 모든 사정을 정 사형에게 말했네. 한 사제는 아무 걱정할 것 없어.”

려락이 한립의 걱정을 읽고 웃으며 말했다.

“려 사형의 말씀은…….”

“사제는 모르겠지만 엄월종이 몇 개월 전 남궁 선자가 수련 중 주화입마에 들어 갑자기 사망했다는 소식을 공표했네. 화의문 위리진과의 혼약도 자연히 흐지부지되었지. 정 사형이 완이라는 여수사와 의남매를 맺어 한 사제와 짝을 지어 주고자 하는데 사제의 뜻은 어떠한지 모르겠군.”

“완이가 정 사형을 의형으로 삼았단 말입니까?”

한립의 눈이 커졌다.

“그렇네. 모란족 법사들만 격퇴하면 떳떳하게 사제와 의매의 혼례를 거행할 생각이야. 그때 가서 누군가 의심을 한다고 해도 어쩌겠나. 천도맹 전체와 척을 지고 쳐들어 올 것도 아니고.

위무애가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우리 천도맹과 연합을 해서 방금 강적을 물리친 마당에 떼를 쓰기야 하겠는가. 게다가 지금 사제의 명성이 자자하니 화의문이건 엄월종이건 함부로 어쩌지는 못할 거네.”

려락은 이미 계획해둔 대로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한립이 복잡한 얼굴로 한참 말이 없더니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사정으로 두 사형들에게 폐를 끼쳤습니다. 꼭 마음속에 기억해 두겠습니다.”

단 두 마디였지만 려락은 기분이 좋았다. 이제 와서 황풍곡이 어떻게 그를 회유하겠는가!

“한 사제는 우리 사람인데 당연한 일이지. 아, 남궁 소저는 사제의 실종 소식을 듣고 당장 이곳으로 오려고 했으나 정 사형이 간신히 설득해 말렸다네.

이곳에 엄월종과 화의문 수사들이 적지 않으니. 두 사람이 혼례를 치르기 전에는 남궁 선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좋을 게야. 다만 사제의 시첩은 제자들에게 호송을 맡겨 돌려보냈네. 곧 대전이 있을 것인데 너무 위험하지 않겠나.”

려락이 아주 살갑게 말했다.

려락의 말에 한립은 모패령과 남궁완이 만나는 장면이 상상되어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사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원래대로라면 사제가 이미 지원을 나갔다 왔으니 앞으로의 일전에는 참가하지 않아도 되지만. 며칠 전 우리와 정마 양도 구국맹 고위층 회의에서 누군가 사제를 언급했네.

순식간에 흑의 법사를 죽였으니 상극의 공법을 쓰는 것이 분명하다며 앞으로도 참전해 줄 것을 원하더군. 우리 천도맹도 사제가 나서줄 것을 원하고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참전을 안 한다고 하면 그게 조금…….”

“다시 참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만일 천남을 모란인들이 쟁취한다면 우리 낙운종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이전의 약조에 대해 맹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약속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려락의 예상과 달리 한립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냉소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거기다 사제는 어령종 첩자를 색출하고 흑의 법사를 죽인 공로도 있지 않은가. 맹에서도 사제가 계속 참전만 해준다면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이겠다고 했네. 보상의 의미로 가능한 한 무엇이든.”

“보상이요?  좋습니다. 그럼 조건은 제가 주관자들과 직접 이야기 나누지요.”

“그것도 좋겠구만. 그럼 내가 사제를 데리고 천도맹에서 당직 중인 주관자들을 인사시켜 주겠네. 과분한 조건만 아니면 무엇이든 들어줄게야.”

려락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려 사형, 걱정 마시지요. 너무 탐욕을 부려 사형을 난처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체면 생각할 것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하게. 이런 기회가 많이 오는 것도 아닌데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얻어내야지.”

한립이 스스로 분별 있게 굴 것이라 이야기해 주니 려락의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려락은 곧바로 한립과 천도맹 의사대전으로 향했다.

“지금 우리 천도맹을 주관하는 건 열댓 개 거대 종문의 수사들로 이뤄진 장로회네. 매 10년 마다 몇 명이 바뀌는데 천도맹을 처음 세운 란명종, 고검문, 예항재 세 종문은 교체되지 않지.

맹 내의 일은 대부분이 이 세 종문이 주관한다고 봐도 될게야. 미리 말해 두는데 그 중에서도 란명종의 위세가 다른 두 종문을 넘어서네. 천일성에서 맹 내의 일을 주관하는 이들은 란명종 룡함과 봉빙 수사라고 할 수 있지.

사제도 이미 알겠지만 연합해 공격을 하면 원영 후기 수사와도 맞먹는다는 부부 수사들이네. 본 맹이 다른 세력들과 균형을 이루는 것도 전부 그들 덕분이고. 그러나 지금은 룡함 수사만 일선에 나서고 봉빙 수사는 천일성에 도착하자마자 폐관 수련에 들어갔네.

아마 어떤 비술을 수련 중인 것 같아. 한 사제가 일단 다른 천일성 주관 장로들과 이야기를 해놓으면 장로회 통과도 쉽겠지. 의사대전은 룡함 장로 외에 다른 두 종문 장로들도 상주하고 있네.”

이런 사정은 한립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려락의 말이 끝나자 웅장한 망루와 청석으로 만들어진 대전이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려 선배님을 뵙습니다. 다른 장로님들을 만나 뵈러 오셨습니까?  여기 선배님께서는…….”

문을 지키는 몇몇 축기기 제자들이 려락을 알아보고는 매우 정중히 물었다.

“이 분은 본 종 한 장로시다. 룡 장로와 다른 장로 분들을 뵈러왔으니 아뢰시게.”

“아, 한 선배님이셨군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로님들이 마침 회의 중이시니 아뢰겠습니다.”

놀란 수사들이 더욱 예를 차리며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 중 하나가 전음부를 꺼내 날리자 붉은 빛줄기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대전 안에서 종소리가 세 번 울리더니 문을 지키는 수사들이 허리를 굽혔다.

“선배님들, 들어가시지요.”

려락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도 아무 표정변화 없이 그를 뒤따랐다.

회랑을 지나 려락과 한립이 편전으로 들어가자 원영기 수사 대여섯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의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려락이 아닌 한립에게 머물며 조금 흥분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다들 수행이 비범했지만 한립은 가운데 앉아 있는 중년 수사를 주목했다.

회색 장포에 독특한 얼굴과 장대한 기골을 지닌 그는 일반적인 원영 중기 수사보다 훨씬 강력한 수행을 보여주었다. 중기의 최정상에 있어 언제든 연이 닿는다면 후기에 이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립은 즉시 그 자가 란명종 룡함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수행이 저렇게 높으니 부부가 함께 공격하면 후기 수사도 대항할 수 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입을 열기 전에 중년인이 먼저 미소 지었다.

“려 형, 이분이 귀 종의 한 장로입니까. 요즘 명성이 자자합니다.”

룡함이 몸을 일으켜 공수하는데 얼굴이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룡함 수사시군요. 위명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

한립이 자세히 중년인을 보다 같이 공수하며 미소 지었다.

“최근 수사들 중에 한 수사만큼 이름을 떨치는 수사가 없습니다. 우리 천도맹의 체면을 살려 주었어요.”

룡함 옆에서 살결이 하얀 노인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수사의 존함이…….”

한립도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룡함과 같은 원영 중기 수사였다.

“한 사제, 이분은 예항재 황 형이시네. 건토공(乾土功)으로 수백 년간 천남에서 명성이 자자한 분이지.”

하얀 노인의 대답 전에 려락이 먼저 소개했다.

“황 형이셨군요. 오랫동안 존함을 들어왔습니다.”

한립이 조금 의외라 의아해했다.

예항재 황 수사라면 확실히 명성이 자자했고 천도맹에서는 룡함 부부에 맞먹는 존재감으로 낙운종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은발 노인이 재차 삼차 언급하던 수사였다.

이어 려락이 다른 수사들에게도 한립을 소개 시켜주었다. 한립은 그 중에서도 흉측하게 생긴 고검문 장로 전 수사를 자세히 봐두었다.

다시 다들 자리에 앉자 룡함이 미소를 보이며 차분히 말했다.

“한 수사가 여기까지 와준 것은 본 맹이 수사가 계속 참전해주길 원한다는 걸 알아서 일겁니다. 미리 약조한 바가 있지만 대전이 임박해 수사의 능력이 천남에 꼭 필요하기에 부득이하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보상으로 원료든 단약이든 수사를 흡족하게 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지요.”

룡함은 오래 맹의 사무를 주관해온 만큼 한립과 려락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눈치 있게 한립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했다.

그러나 한립은 원래부터 참전할 생각이었다. 대전이 아무리 격렬한 양상을 보인다 해도 목숨을 부지할 실력은 되었다. 그렇다면 참전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룡 형께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시니 말씀 드리겠습니다. 계속 참전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둥지가 부서지면 새고 알이고 다 끝나는 것이니까요. 허나 저도 맹의 힘을 빌려야만 가능한 소망이 있어 이 참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노괴들 앞에서 말을 돌리고 잔머리를 굴려봐야 득이 없었다. 과연 그의 시원시원한 답에 몇몇이 좋은 인상을 받은 듯 했다.

황 수사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통쾌하십니다. 조건이 무엇인지 아주 궁금하니 알려주시지요.”

“사실 간단합니다. 전 본 맹의 도움을 받아 제련에 필요한 재료를 모으고자 합니다. 솔직히 제게 정말 중요한 재료이고 만일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모을 수만 있다면 제가 흑의 법사들을 상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재료요?”

다들 조금 의아해했다. 제련에 필요한 재료가 구하기 어렵다는 것은 알았지만 한립이 참전 대가로 이런 조건을 이야기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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