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
419화. 명성
중년 문사가 한립의 거검에서 푸른 불길과 보라색 불길이 공존하는 것을 보고 괴이하다 여겼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으하하! 감히 내 앞에서 그렇게 지껄이는 수사라니 몇 년 만인가. 악 상사, 한쪽 팔이 떨어진 저 자를 맡아주겠소? 뇌둔술을 쓰는 녀석은 내가 처리하지.”
중년 문사가 법보를 꺼낼 생각도 없이 서 있다가 신형이 모호해졌다. 그의 몸이 좌우로 한 번씩 흔들리더니 똑같은 차람의 꼭 닮은 인물이 두 명 나타났다.
세 명의 중년인 문사가 한립을 이미 죽은 사람 쳐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한립이 숨을 들이마시며 의식을 이용해 본신과 화신의 차이를 감별하려 했지만 수행과 기운까지 똑같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지만 한립이 한 손으로 은월의 머리와 어깨를 두드리며 무어라 일렀다.
은월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곤 이미 금제가 풀렸기에 다시 작은 여우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때 세 명의 중년 문사도 소매를 펄럭이며 천천히 한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아주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았는데 두 세 걸음 만에 한립과 십여 장 거리로 가까워졌다.
대경실색한 한립이 등 뒤의 은색 날개를 펼쳐 사라졌다.
“달아나게 둘 성 싶더냐.”
중간의 문사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더니 몇 걸음을 걷다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 광경에 죽은 듯 침묵하던 마 노인이 재빨리 몸을 틀어 한립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이에 악 여인이 냉소하며 그 뒤를 쫓았다.
한립은 신사가 뒤쫓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었고, 뇌둔술도 펼치지 못하는 천남 수사 따위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원영기 수사들을 잃은 거점의 결계를 깨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 * *
어둑해진 하늘, 황무지에 천둥소리가 들리며 은빛이 번뜩였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한립이 멈춰 서서 뒤쪽을 바라보는데 어쩐지 화가 난 얼굴이었다.
“은월, 며칠 째지?”
“대략 나흘 밤낮을 도망쳤습니다. 원영기 후기 수도자라서 그런지 주인이 반각이라도 멈춰 휴식을 취하면 반드시 알아채고 쫓아왔지요. 그의 의식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요? 이렇게는 너무 위험합니다.
만년영유로 법력이야 보충한다 해도 이제 벽사신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뇌둔술 없이 상대의 축지술(縮地術)을 어떻게 능가하겠어요. 거의 순간이동에 가까우니 주인님께서 영민하시어 바로 달아났으니 망정이지 교전이라도 했다면 순식간에 당했을 것입니다.”
은월이 근심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원영 후기의 의식이면 수백 리 안의 어떤 기운도 잡아낼 만하지. 내가 비록 원영 중기 수사의 의식을 상회한다지만 진정한 후기 수도자와 비교하니 격차가 크구나. 대연결도 완전히 익히지 못했고 가장 고등한 공법은 아직 손에 넣지도 못했으니.
이전에는 의식을 더욱 강하게 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는데. 일이 마무리 되는 대로 바로 극서(極西) 지역으로 향해 구결을 알아내야겠구나.”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전의 안일한 생각을 비판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주인님의 혈영둔도 단숨에 백리 밖으로 벗어날 뿐이니 여전히 신사의 의식 범위 안입니다.”
은월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한번 사용하면 그렇겠지. 하지만 혈영둔을 두세 번 연달아 쓰면 남은 벽사신뢰로 달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원영 초기 수사치고 법력이 높다지만 그래도 정혈의 소모가 많아 위험해지긴 하겠지. 살아남아도 오랜 시간 원기를 보하느라 요양을 해야 할 테고 말이야. 그래도 지금은 이 방법뿐이다.”
“그러다가 주인님께…….”
은월이 걱정스레 무언가 말하려는데 한립이 안색이 달라졌다.
“또 따라잡혔군! 매번 간격이 좁아지니 더는 시간을 끌 수 없겠다. 모험을 해야 할 때야.”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를 은월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한립이 크게 숨을 들이 마시고는 열 손가락을 기이하게 움직여 수인을 맺었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요동치며 엄청난 영기가 요동쳤다. 입을 벌려 새빨간 정혈을 뿜어내자 핏방울들이 방울방울 흩어져 붉은 기운이 푸른 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푸른빛과 붉은빛이 동시에 번뜩이며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한 것이다.
한립의 피부가 붉게 물들며 별안간 무수히 많은 핏줄이 일어서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기세였다. 그러나 한립은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얼굴로 오직 수인을 맺는 손길에 속력을 더했다.
그의 정혈을 두 모금이나 머금은 핏빛 안개가 그를 완전히 감쌌다. 그때 멀리 하늘 저편에서 은빛 세 줄기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두 개의 화신을 만들어낸 그 신사였다.
“흠?”
그 중 하나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멀리 푸른 빛줄기와 핏빛 안개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며 눈을 찌르는 듯한 혈광(血光)이 분출 된 것을 본 것이다.
한립이 그 안에서 냉랭히 모란족 신사를 보고는 천둥소리와 함께 풍뢰시를 펄럭였다. 순간 공간의 균열이 생기며 한립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또 다시 멀리서 천둥소리가 은은하게 전해졌지만 그 다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세 중년 문인이 놀란 눈빛으로 갑자기 중간으로 뭉치더니 곧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은빛 속에서 눈을 뜨더니 마지막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백리 밖으로 달아나다니 도대체 무슨 둔술이란 말인가. 마도 혈둔(血遁)과 비슷한데 이동 거리가 이렇게 길다니.”
그도 한립의 둔술이 의아했다. 사실 며칠 동안 한립은 그를 계속 놀라게 만들었다. 한립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잠을 자지도 제대로 쉬지도 않고 이 거리를 날아온 것이다.
보통 원영 초기 수사라면 아무리 뇌둔술을 익혔다고 해도 법력이 떨어져 벌써 잡혔어야 옳았다. 보아하니 순식간에 법력을 회복해 주는 보물을 지녔거나 원기를 크게 깎아 내는 대신 비술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둔술을 숨겨두고 이제야 펼치다니, 며칠간의 둔술은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아무리 한 번에 백 리를 벗어났어도 여전히 그의 의식 범위 내였으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언젠가는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냉랭히 한립의 위치를 파악하고 하얀 빛줄기로 변해 다시 몸을 날렸다. 그때 갑자기 한립이 그의 의식 범위에서 사라졌다.
중년 문사가 흠칫 놀라 멈춰 섰다. 그의 의식이 강하다 해도 기껏해야 200 리 정도였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특정 인물을 감별해 내기 어려웠다.
상대가 가만히 제자리에서 기다려 준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교활한 녀석이…… 이렇게 달아나버려? ’
오랜 세월 이렇게 놀아난 적은 처음이었다. 위풍당당한 모란족 신사가 원영 초기 수사를 따라잡지 못해 놓쳤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그러나 바로 다시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의식으로 포착하는 것이 불가능 했으니 상대의 괴이한 둔술을 쫓을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한 명을 잡고자 벌써 며칠을 허비했으니 전쟁 중에 추격을 계속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어쨌든 모란족에서 신사가 나섰으니 천남의 몇 안 되는 원영 후기 수사들도 좌시하지 만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다른 두 신사들에게 돌아가 미리 방비를 해야만 했다.
빠르게 마음을 정리한 그가 어두운 얼굴로 빛줄기를 돌려 사라졌다.
* * *
300리 밖으로 벗어난 한립이 바로 방향을 틀어 남색 빛줄기로 변해 날아가고 있었다.
날아가면서 계속 저물대 속의 약병을 꺼내 원기 회복에 좋은 단약이란 단약은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창백한 얼굴과 흐릿해진 안광이 그가 얼마나 지치고 원기를 상했는지 보여주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연달아 세 번이나 혈영둔을 펼치시고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도중에 단약들을 섭취하지 않았다면, 아마…….”
한립의 머릿속에 관심어린 은월의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 정혈을 많이 허비하긴 했지만 미리 제련해 둔 단약이 남아 있으니 몇 개월만 휴식을 취하면 얼추 수행을 회복할 거다.”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전천성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한립의 말에 한시름 놓은 은월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니, 상태가 최악이니 최소한 수행을 회복하고 구국맹으로 돌아가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혼잡한 정세 속에 귀령문이나 원한을 지닌 이들의 암습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 상태로는 어떤 위험도 감수 할 수 없어. 그래도 요양을 위한 단약이 충분하니 영맥이 있는 곳에서 몸을 추스를 필요는 없겠구나.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일정 시간 폐관 수련을 하면 되겠지. 거기다 청죽봉운검이 푸른 화염에 오염되었으니 잠시 자라극화로 악화되는 것은 막았다 해도 해결하지 못하면 큰 후환이 될 거야. 그걸 먼저 해결하고 돌아가야겠지.”
한립이 난감하다는 듯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호리병 고보가 모란족에게 전승되는 보물이라면 능력이 대단하겠죠. 하지만 주인님께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제련하시면 분명 없앨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주인님의 자라극화도 비범한 능력을 지닌 화염이니까요.”
은월이 미소 지으며 한립을 위로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차근히 해결하자꾸나.”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확답하지 않았다. 이후 체내에 남은 영력을 쥐어짜 한립의 푸른 빛줄기가 한층 속도를 높였다.
방향을 정해 하루 종일 날아가던 한립이 겨우 멈추고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산골짜기에 내려섰다. 이렇게 먼 거리까지는 모란족 신사가 아무리 자신을 죽이고 싶어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한립이 사방을 살폈다.
풀과 나무도 별로 없는 황폐한 산 사이에 작은 골짜기라 영력도 미미했고 굴러다니는 돌멩이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었다.
한립이 의식을 퍼트려 근방 백 리를 살폈지만 수사나 법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안심을 한 그가 소매를 털어 은월을 내보내며 무어라 일렀다. 은월이 변한 작은 여우는 즉시 노란 기운으로 변해 한립을 휘감았다.
빛이 사라지고 산비탈 속으로 그들이 사라지자 골짜기에는 아무런 기척도 남아있지 않았다.
은월의 토둔술을 이용해 산 중앙으로 들어간 한립은 푸른 검기들을 분출해 재빨리 수 장 크기의 조촐한 석실을 파냈다.
신형이 흔들리더니 한립이 석실로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눈을 감은 그의 몸에는 푸른 기운이 돌고 있었고 앞에는 열댓 개의 약병들이 놓였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자 마구잡이로 삼킨 단약들을 제대로 제련한 후에야 다른 단약을 복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립은 이름 모를 작은 산 속에서 조용히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원기의 손상에 극심해서 그 시간은 자연히 길어졌다.
단약을 복용하고 좌선을 하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반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한립은 여전히 산 속에 틀어박혀 나서지 않았다.
그가 산속에 머무는 동안 수사와 법사 간의 생사를 건 대전은 거의 일촉즉발 상태였다. 게다가 낙운종 한 장로의 명성이 천남 수도계는 물론이고 법사 대군들 사이에서도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고계 수사나 법사라면 그가 원영 중기에 가까운 실력과 수많은 보물을 지닌 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겨우 반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 *
황룡산 일전 이후, 법사 3대 신사들이 선두에 서자 겨우 열흘 만에 법사 대군은 전천성 코앞까지 진격했다.
어쩔 수 없이 구국맹은 어떤 세력의 지원도 없이 홀로 싸움에 응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맹의 대장로인 천남 3대 수사 중 하나, 위무애가 막 소식을 듣고 도착한 게 다행이었다. 전천성의 거대한 금제에 기대 법사 대군의 맹공을 근 한 달 가까이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모란족 쪽에서도 3대 신사가 결집하고 흑의인들의 도움과 일고여덟 마리의 대형 요수의 출현으로 금제는 깨지고 전천성 마저 법사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구국맹 주력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은 채 서둘러 퇴각해 우국 인근의 북량국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이때 정마 양도와 천도맹에서 지원을 나온 수사들이 도착했다.
천남 사대 세력이 연합을 하자 몇 번의 소규모 전투를 거치며 잠시 모란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생사를 건 진정한 대전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