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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18화 (175/2,000)

# 418

418화. 결계 대전 (5)

하얀 연꽃의 열댓 장 꽃잎들도 대단했지만 벽사신뢰와 건람빙염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단독으로 이용해도 엄청난 위력의 벽사신뢰와 건람빙염이 어우러진 거검은 일흔 두 개의 청죽봉운검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결국 거검이 겨우 버티던 연꽃잎의 환영을 갈라내었다. 거검이 아무 방해 없이 유유히 타오르는 푸른 불덩이를 베어들어 갔다.

한립이 눈을 빛냈다.

상대의 푸른 화염이 괴이하다는 것은 신경 쓰였지만 건람빙염과 호롱불의 고하를 가리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금빛의 벽사신뢰도 극한의 건람빙염도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 화염에 먹혀 들어갔고 거검은 당연히 말려들어간 후였다.

청죽봉운검은 한립의 본명법보였으니 자연히 아주 민감하게 감응할 수 있었다.

거검이 푸른 불길 속에 감싸인 순간 통증이 뇌리를 강타하며 참을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체온이 급격히 올라가서 온 몸의 피가 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한립이 화들짝 놀라 즉시 수결을 맺어 거검을 향해 손짓했다.

웅!

거검이 진동을 하며 푸른 빛을 뿌리고는 즉시 수십 개의 작은 검으로 변해 불덩이를 빠져나왔다.

본래 법보를 회수할 생각이던 한립이 비검들을 자세히 보고 안색이 변했다.

작은 비검들 마저 각각 푸른 불길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한립의 얼굴빛이 어두워졌고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땀이 줄줄 흐르는 와중에 이를 악문 그가 열 손가락을 쾌속으로 휘저어 법결을 맺었고 수십 개의 법결들이 비검으로 뻗어나갔다.

비검들이 한립의 의지에 따라 허공을 미친 듯이 휘돌며 푸른 화염을 떨치려고 분투했다.

은종 고보가 화염에 녹에 내리는 것을 보았으니 본명 법보마저 그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본명 법보를 잃었다가는 의식과 원기를 동시에 크게 상할 것이다.

녹의 여인은 차가운 눈길로 한립의 비검들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여인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갔다.

그녀가 지닌 호롱불은 평범한 고보가 아니었다. 엄격히 말해 심지어 그녀의 것도 아니고 모란족 자체에서 전승되는 두 가지 보물 중 하나였다.

악 가 여인이 이 보물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높은 수행과 모란족 제일의 여인 법사라는 사실 외에도 돌올인 천란 성녀와 비견되는 그녀의 특수한 신분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란인들의 추앙을 받았고 모란족 삼대 신사(神師)들 조차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수한 원인 때문에 호롱불 고보에는 제한이 있었다.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었다.

일단 횟수를 채우면 보물은 반드시 회수해 적합한 신분을 지닌 다음 주인에게 인도될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싸우는 용도 외에도 중요한 쓰임이 있는 보물이었지만 역대 주인들은 무수히 많은 강적들을 호롱불 고보와 함께 쓰러트렸다.

일단 호롱불 고보의 화염에 걸려들면 녹아내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거기다 나무 속성의 고보라면 더욱 화염에 약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런데 한립의 법보는 분명 나무 속성 비검이었는데 화염 속에서 저리 오래 버티면서도 녹거나 재로 변해 사라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정신이 팔린 사이에 머리 위에서 자줏빛 망이 아무 조짐도 없이 나타났다.

악 가 여인이 놀라 상황을 살피니 은월이 이 기회를 틈타 자운두 금제를 발동해 열어둔 망태기 입구를 닫고 있는 것이다.

요염하게 허리를 비튼 은월의 입에서 분홍색 안개가 뿜어져 나와 하얀 연꽃을 뒤덮었다.

녹의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청동 호롱불을 만지작거렸으나 아무래도 다시 보물을 사용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다른 손이 저물대를 스쳐 노란 옥패를 꺼냈다.

막 은월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데 분홍색 안개에서 이상한 향기가 번지더니 무수히 많은 젊은 남녀의 환영이 나타나 쌍쌍이 껴안고 뒹굴기 시작했다. 낯 뜨거운 환영들의 행위에 여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요망한 것! 정녕 죽고 싶으냐.”

녹의 여인이 굳은 얼굴로 옥패에 영력을 불어넣자 노란빛이 흘러나와 주변의 분홍 안개와 환영들을 깨부수었다. 그런데 은월이 있던 곳이 텅텅 비어 있었다.

코웃음을 치며 은월을 찾아내려던 녹의 여인이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한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월에게 당해 잠시 시간을 빼앗긴 탓에 한립이 벌써 비검들을 거검으로 응결해 불러들인 것이다. 그는 신중한 눈빛으로 거검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도 거검이 화염에 녹지 않고 버티고 있음에 악 가 여인이 더 놀랐으나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호롱불을 한 번 더 사용해 한립을 죽이기로 했다.

그때 한립이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아 한 손에서는 하얀 한기를, 다른 한손에서는 푸른 화염을 뿜은 후 입에서 푸른 기운을 뱉어 양손을 보호했다.

파츳!

곧 계란 크기의 보라색 화염이 그의 손 중간에 떠올랐다.

한립의 손짓에 따라 가볍게 터진 보라색 화염은 무수히 많은 날개 달린 보라색 새들로 변해서 날갯짓을 하며 허공에 뜬 거검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보라색 화염이 푸름 화염과 거검의 표면에서 만나 일렁이더니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한 쪽도 단시간에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한립의 얼굴이 구겨졌고 악 여인도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정체 모를 보라색 화염이 호롱불의 화염과 맞먹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한립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그녀의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원영 초기에 이런 능력을 보인다면 원영 중기나 후기에 이르면 모란 초원에서는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여인이 수중의 호롱불을 머리 위로 날렸다. 가부좌를 한 채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기 시작한 것이다.

몸을 받치고 있는 하얀 연잎의 빛이 강렬해지고 머리 위의 호롱불 역시 푸른빛이 찬란해 둘이 아래 위에서 호응했다.

악 가 여인은 남은 호롱불을 모조리 써서라도 한립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한립도 녹의 여인의 거동을 보며 내심 쓴웃음을 떨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정말 달아나고 싶었다.

아직 자라극화와 형마검이라는 필살기가 남았지만 그녀와 생사를 걸고 대결할 마음은 없어서였다.

눈앞의 여인은 절대 평범한 신분의 원영 중기 법사가 아니었는데 여기서 그녀와 동귀어진이라도 하게 된다면 낭패였다.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짙은 안개를 뚫고 누군가가 뛰어들었다.

한립과 여인이 동시에 놀라 그곳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 틈에 자운두가 변한 자주빛 안개가 둘로 갈라지며 전광석화처럼 하얀 빛이 호롱불을 휘감았다.

호롱불 고보를 휘감아 자홍색 운무 속으로 자취를 감춘 하얀 빛줄기에 한립은 쾌재를 불렀고 녹의 여인은 안색이 파리해져 하얀 연잎에서 발을 굴렀다.

그녀의 손짓과 영력에 감응해 연잎이 쾌속으로 돌더니 순식간에 산처럼 하얀 기운을 뿜어냈다.

그러나 머리 위의 자홍색 기운이 번뜩이며 하얀 빛줄기만을 통과시키고 하얀 기운과는 사납게 교전했다.

자줏빛 안개 너머로 은월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사라지고 그녀가 늘씬한 몸을 드러냈는데 한 손에 든 바구니 고보가 하얗게 빛났다. 청동 호롱불은 그 하얀 빛에 갇혀 잠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돌아가 녹의 여인의 의식을 지우기만 하면 자연히 고보는 다른 수사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한립이 기뻐하기도 전에 갑자기 전투에 끼어든 인물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한 수사, 어서 도망갑시다! 모란족 신사(神師)가 나타났어요. 륙 수사는 이미 당했으니, 지금 달아나지 않으면 우리도 끝이에요!”

그는 뜻밖에도 마 노인이었다. 노인의 머리는 산발이었고 한쪽 팔이 잘려나간 채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모란족 신사가 말입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자세한 정황을 물으려는데 노인이 흰색 빛줄기로 변해 다시 달아나려 했다. 조금도 지체 할 수 없다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곧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미 늦었다! 아까는 팔을 희생해 목숨을 구했으니 이번에는 또 무슨 비술을 숨기고 있을지 궁금하구나. 설마 다른 한쪽 팔도 체신괴뢰(替身傀儡)로 제련한 것은 아니겠지?

정말 그랬다면 본 상사도 감탄을 해주지. 흠! 우리 모란족의 원명등(元明燈) 아닌가! 어린 여우가 간땡이가 부었구나. 감히 모란족에서 전승되는 보물을 훔쳐내다니, 너 같은 요물이 만져도 될 물건 같더냐!”

말을 시작할 때는 그래도 멀리 있는 것 같았는데 별안간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듯 가까워졌다. 그리고 말이 끝날 무렵에는 놀랍게도 은월의 뒤까지 은색 빛줄기가 근접해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은월이 서둘러 자운두를 퍼트려 몸을 보호하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은색 빛줄기가 아주 잠시 주춤하다 바로 거대한 은색 손으로 변해 자운두를 잡아챘고 다시 십여 장 거리를 두고 나타나 은월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끼악!”

은월이 변한 노란 빛줄기가 주먹을 맞고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그러나 영리한 그녀는 그 순간에도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수중의 고보를 힘껏 한립 방향으로 내던졌다.

“죽고 싶구나!”

거대한 은색 손 사내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묻어났다.

빛이 반짝이더니 은색 손이 두 개로 늘어나 하나는 바구니 고보를 향해 날아가 잡아채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떨어져 내리던 은월을 쥐어 으깨려 했다.

두 손 모두 극히 빠른 움직임이었다.

은월이 대경실색해 황급히 영력을 운용해 둔술을 펼치려 했으나 은빛이 전신을 타고 흐르기만 할 뿐 꼼짝할 수 없었다. 상대가 주먹으로 강타하며 그녀에게 간단한 금제를 걸어버린 것이다.

깨기 쉬운 약한 금제지만 시간이 없었다. 거대한 손에 잡혀 으깨질 거라 여긴 은월이 눈을 꼭 감으며 죽음을 앞두었다.

그때 천둥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녀를 낚아챘다.

“가자!”

꽈광!

한립의 서늘한 음성과 천둥소리가 겹쳤고 둘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거대한 은색 손이 근소한 차이로 허공을 쥐었다.

잠시 후 한립이 한 팔로 은월의 허리를 두르고 다른 한 손으로 푸른색과 보라색 화염으로 뒤덮인 거검을 쥐곤 수십 장 밖의 운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헛! 뇌둔술!”

거대한 은색 손에서 누군가 놀라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두 개의 손이 합쳐져 눈부신 은빛을 토해냈다.

빛이 가시고 문사 차림의 중년 법사가 자운두와 바구니 고보를 든 채 나타나 멀어지고 있는 한립을 바라보았다.

하얗다 못해 거의 죽어가는 얼굴의 마 노인이 차마 달아나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처음으로 상대하게 된 원영 후기의 수도자를 분석했다. 저런 수행이면 화신기 수도자를 제외하면 수도계의 최정상이라 할 수 있었다.

중년 법사가 한립을 놔두고 도처를 살피다 악 가 여인을 바라보며 바구니 고보와 그 안의 청동 호롱불을 모두 여인에게 건넸다.

“중 신사님의 도움으로 원명등을 되찾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녹의 여인이 잃어버렸던 호롱불을 손에 쥐고 감격해 했다. 아무리 천생이 냉랭하고 오만하다 해도 모란족 삼대 신사 중 한 명을 앞에 두고서는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오. 그저 천남 수사들이 이곳을 지키려 원병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어서 들려본 거외다. 거기다 천곡이라는 녀석이 괴이한 수법에 죽었다니 걱정도 되고. 아무래도 대진국(大晋國) 쪽에 합당한 해명도 해야 할 터인데. 그보다 뇌둔술을 쓰는 수사라니 악 상사가 고생이 많았겠소.”

중년 문사가 차분히 이야기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한립을 향해 물었다.

“여우가 네 것이었구나. 감히 모란족 전승 보물을 탐하다니 여우든 그 주인이든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호롱불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처럼 말하는군요?  날 죽이고 싶다면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가 녹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한립이 차갑게 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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