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
413화. 괴물
곡쌍포가 대경실색해 떨다가 무언가를 눈치 채곤 한립을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한립을 잘근잘근 씹어 죽이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곡 형도 눈치가 어두운 분은 아니군요. 허나 그게 제 잘못은 아니지요. 은닉한 법사와 대놓고 전음을 나누니 어찌 모르겠습니까. 제 의식이 동급 수사에 비해 약간 뛰어난 편이라 들은 그대로 륙 형에게 언질을 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수백 년간 천남에서 숨어 지냈건만 전투 직전에 어이없이 발각 당하다니! 이미 정체가 드러난 바,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여한은 없소! 허나 의식이 동급 수사에 비해 약간 뛰어나다고? 원영 후기의 수준이 아니고서야 어찌 동급 수사의 전음을 소리 소문 없이 엿듣는단 말이오.”
곡쌍포가 질린다는 얼굴로 한립을 노려보았다.
“원영 후기?”
초췌한 수사와 마 노인도 그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한립이 순간 미간을 좁혔다 곧 평안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미 첩자라는 것을 인정했으니 어떤 처분이 떨어지든 우리를 원망하지는 마시오. 목숨은 거두지 않고 맹의 집법사에게 처분을 맡기고 싶으나 대전이 임박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게 되었소.”
초췌한 거한이 겨우 한립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결계에 갇혀 서늘한 안광을 발하고 있는 곡쌍포를 바라보았다.
이후 그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바닥을 뒤집어 은빛이 찬란한 영패를 꺼냈다.
파칙!
그가 영패를 높이 들자 은빛이 범람하며 결계의 방어막 속으로 스며들었다.
보호막의 빛이 한층 강해져 무수히 많은 은빛 꽃잎 같은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은빛 꽃잎들이 나풀거리는 것을 확인한 곡쌍포가 맹독을 지닌 독사라도 보는 눈빛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가 즉시 보호막을 형성하고 입에서 다시 법보를 꺼내 공격에 대비했다.
“좋은 구경은 아니니 가십시다. 아무리 법력이 높아도 금제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벼락과 불 속성 공격에 소멸하고 말테니 자리를 옮겨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시죠.
아무리 모란족 첩자였다고 하나 어령종 장로였으니 맹에도 자세히 보고를 해야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래도 후환이 있지 않겠습니까?”
은빛 꽃잎들이 터져나가기 시작하자 초췌한 거한이 고개를 돌려 한립과 마 노인을 응시했다.
거한이 금제의 능력에 이렇게 자신감을 보이니 한립도 무어라 반대 의견을 내세우진 않았고, 마 노인은 거한의 말을 신경 쓰며 근심어린 얼굴을 했다.
“일이 조금 성가시게 되었으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지요.”
한립이 빙긋 웃으며 가볍게 분위기를 바꾸었다.
“한 형의 말씀은?”
이제 거한은 한립의 말이라면 어떤 것도 무시하지 못했다.
“천남에 모란족 첩자가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귀 맹에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마 이전에도 상당수 잡아 들였었겠지요. 그저 곡 수사의 수행이 높아 어령종에 해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인데 우리 세 수사가 각각 다른 세력에 속해 있으니 다행입니다.
아무도 세 세력이나 합심해 어령종을 모함 한다 믿기는 어려울 테니 말입니다. 그저 보고를 하며 모란족과 관련한 정보도 함께 전달한다면 맹에서도 더욱 상황을 판단하기 쉬워질 겁니다.
또한 어령종에서도 곡 장로에 대해 벌써 의심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고요. 이렇게 오랜 세월 첩자로 활동하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요. 만일 이전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해도 되돌아 생각해보면 괴이한 행적이 반드시 드러날 겁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저 또한 비술을 이용해 방금 상대와의 대화를 모두 옥간 속에 복제해 두었으니 때가 되면 증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초췌한 거한이 얼굴을 펴며 손에서 하얀 옥간을 들어올렸다.
“그럼 됐군요. 복 수사가 부상이 심해 폐관 요양 중만 아니었으면 더욱 확실한 증인이 되어 주었을 것을, 그 점이 아쉽습니다.”
마 노인이 한립과 거한의 말에 한시름 놓았다. 이어 세 수사가 자세한 일을 논의 하는데 은색 보호막 속에서 ‘쉬익’ 거리는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 수사가 어안이 벙벙해 시선을 돌렸다.
쿠쾅!
거대한 녹색 손톱이 벼락과 불 속성의 공격 속에서 튀어나와 그들이 서 있는 보호막 쪽에 강렬히 부딪쳤다.
“금제가 요동칩니다! 저 자에게 이런 실력이!”
초췌한 거한이 말 그대로 식겁해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립과 마 노인도 표정이 어두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거한이 즉시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하얀 빛을 보호막에 쏘아 보냈다.
시선을 가리던 은빛 꽃잎들의 폭격이 거둬지며 금제 안의 상황이 드러났다.
“헛!”
거한과 마 노인이 급히 숨을 들이마신 것은 물론이고 한립의 표정도 굳었다. 금제 속에는 곡쌍포가 사라지고 반인반요의 괴이한 형상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인간도 요괴도 아닌 괴물이 곡쌍포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근육이 불거지고 전신은 녹색 비늘로 덮였는데 눈빛조차 음산해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또 날카로운 열 손가락과 두 개의 기다란 뱀 꼬리는 더욱 기이했고 말이다.
분명 곡쌍포가 맞았는데 입을 벌리니 자색이 도는 검은 혀가 ‘쉭쉭’거려 소름이 돋았다.
“부령술(附靈術)입니다! 곡쌍포가 쌍미비취사와 합체한 겁니다.”
마 노인이 안색이 창백해져 소리쳤다.
“부령술이라면 거의 실전된 비술 아닙니까? 저런 극악무도한 술법을 사용하면 혼이 윤회(輪回) 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부령술에 관한 피비린내 나는 소문은 익히 들었기에 거한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그는 황급히 은빛 영패를 꺼내들어 정기를 뿜어 흡수시키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때 보호막 안의 요물도 행동에 들어갔다.
괴물이 음산한 눈으로 결계 밖의 수사들을 훑고는 입이 뺨까지 찢어지며 혀를 날름거렸다. 동시에 자색이 도는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와 그들과 가까운 결계를 노리고 날아갔다.
거한이 급박한 상황에 주술을 멈추고 일단 영패를 들어 결계를 가리켰다. 영패에서 은빛이 뿜어져 나와 열댓 줄기를 이루어 보호막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은빛의 벽이 다시금 두꺼워졌고 무수히 많은 은빛 낙화도 크기를 키운 채 보호막 꼭대기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파츠측!
괴물의 검은 액체가 보호막에 닿자 은빛이 순식간에 검게 변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요물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것을 확인하곤 두 꼬리로 지면을 박차고 녹색 빛줄기로 변해 쇄도했다.
순식간에 검게 변한 보호막 앞에 괴물은 날카로운 청록색 손톱을 휘둘렀다.
쾅!
엄청난 진동과 함께 보호막이 떨어져 나가 구멍이 났다. 괴물이 그것을 보고 희색이 만연해 구멍을 통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초췌한 거한이 긴장한 낯빛으로 하얀 방망이 같은 법보를 입에서 뿜었고 동시에 온 몸을 보호막으로 둘렀다.
마 노인도 전투에서 사용하던 목판 법보를 분출하고는 찬란한 빛으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두 수사 모두 부령술을 시행한 원영 초기 수사의 무서움을 알았던 것이다. 공법과 법술은 물론이고 법력까지 거의 원영 중기 수사에 맞먹게 증폭되었다.
괴물이 결계를 빠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장기전을 예상한 그들과 달리 한립은 소리 없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안 그래도 결계 구멍과 가까이 있었기에 거의 출구를 막아선 것과 다름없었다.
괴물이 절반정도 빠져 나오다 한립이 막아 선 것을 보고는 입을 벌려 자색이 도는 검은 액체를 분출했다.
“조심!”
“어서 피해요!”
방금 독액의 위력을 목격한 거한과 노인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두 사람의 고함을 들으며 한립이 다가오는 검은 액체를 응시했다.
그가 한 손을 펼쳐 뻗자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기이한 남색 화염이 넘실거렸다.
한립이 맨 손으로 독액을 잡아 채려하자 거한과 마 노인은 화들짝 놀랐고 부령술에 걸린 괴물도 멈칫하다 다시금 액체를 분출했다.
그 모습을 본 한립은 보일 듯 말 듯 냉소하며 괴물에게 남색 빛을 터트렸다. 그러자 빛과 거대한 소리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거한과 마 노인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려 시선을 집중했고, 드디어 드러난 상황에 두 수사는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구멍을 빠져 나온 거대한 괴물이 놀란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온 몸이 수정처럼 빛나는 것이 괴물의 얼음 조각상이라도 가져다 세워 놓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방금 내뱉은 독액도 기다랗게 얼어 고드름처럼 늘어져 있었다.
‘부령술로 탄생한 괴물이라 전투 경험이 너무 부족했어.’
한립이 얼음 조각을 보며 중얼거리다 한 손을 뻗어 거대한 금빛 전극을 분출했다. 그물처럼 얼음 조각을 휘감은 금빛과 남색 빛이 작은 폭음을 연달아 내니 얼음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 안에서 주먹만 한 검은 물체가 튀어나와 달아나려다 방비를 하고 있던 금색 그물에 부딪혔다.
그러자 금색 그물이 수축하기 시작했고 자색의 검은 물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 안에서 사라졌다.
끼하악!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금빛 속에서 괴물의 원영이 연기로 변해 흩어진 것이다.
말이 부령술이지 실제로는 마도 법술의 일종으로 상고시대 비술을 운영한 것이었으니 벽사신뢰에 꼼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긴장하며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만전을 기하던 거한과 마 노인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립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저물대와 남색 갈퀴를 불러와 의식으로 훑고는 거한에게 두 가지 모두를 넘겼다.
“제가 죽이기는 했으나 법보와 저물대 안의 물건은 그대로 봉해 어령종에 돌려주시죠. 그럼 어령종 쪽에서도 무어라 할 말이 없을 겁니다.”
한립이 어안이 벙벙한 두 수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형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그렇게 처리하지요.”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에 멍하니 서 있던 거한이 정신을 차리고 바로 대답했다.
마 노인도 반대할 턱이 없었다. 그저 무안한 얼굴로 준비하고 있던 자신의 법보를 거두어 들였다.
처음엔 한립이 흑의인을 죽였을 때만해도 상대가 방심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맨 손으로 부령술을 펼친 원영 초기 수사를 죽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모두 해결된 것 같으니 그럼 저는 이만 휴식을 취하러 가보겠습니다. 법사들이 쳐들어오면 언제든 연락 주시지요.”
한립이 아직도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사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셔야죠. 이곳은 저와 마 수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거한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한립이 싱긋 웃으며 포권을 하고는 그대로 대전을 나왔다.
그가 조금 전 벽사신뢰와 건람빙염을 노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수사들과 연합해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괴물의 수행이 너무 높았다. 만일 괴물이 달아나게 두었다면 앞으로 후환이 무궁무진 했을 것이다.
또한 이미 원영을 응결했으니 굳이 본연의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난성해에 있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때는 수행도 낮았고 낯선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남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었지만 지금은 고계 수사로 자신을 상대할 이가 몇 되지 않았기에 무리 없이 실력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이미 법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제 실력을 숨기려고 해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 말이다.
어차피 저번 모란초원 원정으로 귀령문 쪽과 남롱후 등이 이미 그의 실력을 눈치 챘으니 실력을 드러내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것이 나았다.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며 몸속의 자라극화(紫羅極火)의 이상을 감지했다.
부령술을 펼친 괴물을 한 번에 제압하려 건람빙염을 전부 움직였더니 막 제련에 성공한 자라극화가 불안정해진 것이다. 대량으로 빙염을 운용하는 것은 아직 무리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