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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12화 (169/2,000)
  • # 412

    412화. 뱀

    한립이 차갑게 눈을 빛내며 금빛 그물을 향해 맹렬히 두 손을 펼치자 금빛이 터져나가며 그물도 폭발했다.

    무수히 많은 전극이 튕겨나가 그물망보다 더욱 세밀하게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자 검은 기운들도 금빛 전극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끄하하악! 끼륵!

    검은 기운들이 뇌전과 맞닿을 때마다 연기와 함께 참혹한 비명이 퍼져나갔다.

    두려움에 떨던 검은 기운들이 다시 금빛 그물 한 가운데로 똘똘 뭉쳐 검은 영아(嬰兒)를 형성했다. 요기로 가득 찬 새까만 아기가 입을 벌려 검은 기운을 내뿜으니 기운들이 층층이 그것을 둘러싸며 벽사신뢰와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모습에 한립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뿜어내던 금빛이 급격히 굵어지며 뇌전이 눈에 보일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다.

    끼하하학!

    비명과 벼락 소리가 울려 퍼지다가 점점 조용해져갔다.

    그 광경에 한립이 안심을 하고 금빛을 거둬들이고는 검은 저물대 하나를 포획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후 바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수사들 틈으로 돌아왔다. 수사들은 물론이고 굴요와 깡마른 법사도 눈을 부릅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천남 수사들이야 흑의인의 정체를 몰랐지만 법사들은 그래도 아는 바가 약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신비한 수사는 모란 초원과 다른 방향에 있는 거대한 제국에서 온 인물이었다. 비록 그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혹은 모란 삼대 부락의 신사들과 어떤 조건으로 전쟁을 돕게 됐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흑의인은 공법이나 실력에서 천남의 동급 수사들을 훨씬 상회해야 옳았다.

    이미 천남 원영기 수사가 둘이나 신비 수사들에게 죽었기에 모란 대상사들도 그들을 믿고 따랐던 것이다.

    두 번째 대결에 흑의인이 나선 것도 이번 금제를 지키는 원영기 수사의 수가 너무 많아 그 수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 간단히 흑의인을 죽이고 심지어 달아나려는 원영까지 처참하게 끝장내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경악에서 벗어난 깡마른 법사와 굴요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머뭇거렸다. 계속 대결을 강행해야할지 아니면 법사 군대로 한 번에 몰아쳐야 할지 고민이 된 것이다.

    그때 두 법사의 귓가에 들리까 말까한 작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오늘은 이미 법사들의 사기가 꺾였으니 일단 퇴각하시죠. 내일 다시 왔을 때는 결계가…… 하하! 천곡의 죽음에 대해서는 내 신사(神師)님들에게 설명하겠습니다.”

    깡마른 법사와 굴요가 그 소리를 듣고 즉시 명에 따랐다.

    그들이 명을 내리자 가지런하던 법사 군대에 약간의 소동이 일고는 퇴각하기 시작했다.

    대상사 두 명이 가장 뒤에서 그들을 따라 가기 전 매서운 눈길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추격해야 할까요?”

    곡쌍포가 멀리 사라지는 법사대군을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모란인들이 비록 퇴각을 한다지만 전쟁에서 져서 달아나는 것은 아니니 이대로 충돌했다가는 역으로 우리가 포위될 수도 있어요. 황룡산 천음환화진(千音幻化陣)의 위력을 빌려 버티는 것이 최선입니다.”

    초췌한 거한이 고개를 저었다. 흑의인을 단숨에 죽인 한립의 실력이 너무 의외라 승전을 하고 돌아왔음에도 일순 무어라 해야 할 지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지금 한립은 평안한 얼굴로 수중의 검은 저물대를 회수한 후 다른 이들을 향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본래도 항상 단정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조금 전에 원영기 수사 한 명을 멸살하고 돌아와 짓는 미소는 다른 이들에게 한기를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은근히 젊은 그를 경시하던 분위기도 사라졌다.

    “이번에 한 수사께서 상대의 고계 법사를 제거하였으니 정말 축하할 일입니다. 제가 돌아가는 대로 맹에 보고해 꼭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초췌한 거한이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말했다.

    마 노인과 곡쌍포 역시 정신을 차리고 웃는 낯으로 그의 실력을 칭찬했다.

    한립은 그들의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예의 바른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때 그들 중 하나를 눈여겨보며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법사 대군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초췌한 거한이 운무 중에 통로를 만들어 수사들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황룡산은 다시 평소의 고요를 되찾아 안개로 이뤄진 망망대해를 이루고 있었다.

    * * *

    수사들은 대전에 모여 오늘 있었던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특히 마 노인은 아끼던 보물이 망가졌을 뿐 아니라 원기도 크게 상해 요양이 필요했다. 이제 대전에 남은 이는 초췌한 거한 한 명 뿐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그의 두 눈썹이 힘껏 올라가며 낮게 일갈했다.

    “누구냐, 나와라!”

    “헛허허! 륙 형의 법력이 과연 대단하십니다. 막 들어온 참이었는데 바로 감지를 해내시다니요. 구국맹에서 중요한 거점을 맡길 만합니다.”

    아무도 없던 대전 입구에서 빛이 반짝이며 웃음기 어린 얼굴이 나타났다.

    “수사셨습니까?  쉬지 않고 은닉술까지 펼쳐 돌아오신 연유가 무엇인지요.”

    초췌한 거한 수사가 상대를 알아보고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급히 상의할 일이 있어 돌아왔습니다.”

    “상의할 일이요?  무엇입니까?”

    초췌한 거한이 그를 훑으며 미심쩍어 했다.

    “낙운종 한 수사 말입니다. 아무래도 모란족의 첩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거침없이 엄청난 발언을 한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첩자라고요?  오늘 원영기 법사를 죽인 한 수사가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륙 형에게 말씀을 드릴 때는 당연히 증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자가 탄식하더니 바로 손에서 옥간을 꺼내 또 다시 몇 걸음 더 다가왔다.

    거한이 놀라며 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팔을 뻗었다.

    초췌한 거한의 손이 옥간에 닿으려는 찰나 접근한 수사의 안면이 사납게 일그러지며 변화가 일어났다. 옥간이 돌연 작은 녹색 뱀으로 변해 전광석화처럼 거한의 팔뚝을 깨문 것이다!

    “……헛!”

    거한이 놀라 소리를 치려했지만 순식간에 온 얼굴에 보랏빛이 돌다 새까맣게 변해 소리 없이 쓰러졌다.

    “쌍미비취사(雙尾翡翠蛇)의 명성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독성으로만 따지면 전설 속의 열 가지 극독과 비교해도 나무랄 데가 없지. 물리는 순간 원영조차 빠져나가지 못하니 대단해. 날개가 있어 빠르게 이동시킬 수만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을…….”

    희색이 만연한 흉수가 맹독에 당해 이미 녹아내리기 시작한 시체를 살폈다.

    시체의 팔뚝에서 송곳니를 빼낸 작은 뱀이 꼬리를 흔들자 놀랍게도 두 개의 가느다란 꼬리가 드러났다.

    쉬익!

    뱀이 재빨리 주인의 손바닥으로 돌아와 보랏빛이 도는 검은 혀를 날름 거렸다. 흉수가 다른 한 손으로 저물대를 불러와서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찌 이럴 수가! 영패가 없다니…… 분명 저물대 속에 넣는 것을 보았거늘!”

    그가 짜증이 난다는 듯 저물대를 뒤엎자 하얀 기운이 흘러나오며 조잡한 법기와 영석 몇 개가 바닥을 뒹굴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며 바로 녹색 빛줄기로 변해 대전 입구를 빠져 나가려 했다.

    대전 중간에서 기다란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도처에서 은색 빛이 반짝였다. 은색 보호막은 층층이 모습을 드러내며 거대한 은색 파도처럼 그 자를 안에 가두었다.

    “흥!”

    녹색 빛줄기에서 냉소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영수대를 건드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새까만 영수가 튀어나와 보호막에 머리를 박았다.

    펑!

    둔탁한 소리에도 은색 보호막은 흔들거리지도 않고 영수를 튕겨버렸다.

    사내가 놀라 이를 악물더니 바로 입을 벌려 남색 갈퀴를 뿜어냈다. 순식간에 법보와 수사가 하나가 되어 더욱 거대해진 남색 빛줄기가 다시 한 번 보호막과 충돌했다.

    쾅!

    엄청난 소리와 달리 남색 빛줄기는 수 장을 튕겨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곡 형, 괜히 힘 빼지 마시죠. 이곳은 황룡산 금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계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곳에 제 발로 들어왔으면 나갈 생각은 말아야죠.”

    대전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아주 익숙해서 방금 녹아내린 초췌한 거한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그러면 그렇지! 저 시체는 인간의 탈을 쓴 꼭두각시였구나! 구국맹에 수사와 똑같이 생긴 꼭두각시를 제련할 수 있는 자가 있다더니 정말이었어.”

    남색빛이 사라지며 인영이 등장했는데 어령종 곡쌍포였다. 창백한 안색에 눈빛이 침울하긴 했으나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곡 형이 구국맹 사정을 그리 잘 아신다니 놀랍습니다. 심지어 체신괴뢰(替身傀儡)까지 들어보았다니…… 맞습니다. 방금 수사의 손에 죽은 것은 제가 조종하던 꼭두각시에 불과했습니다. 원영기 수사의 눈까지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지요?”

    대전 바깥에서 하얀 빛이 번뜩이며 초췌한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결계 속의 곡쌍포와 이미 검은 핏물로 변한 꼭두각시의 사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흥! 겉가죽이 똑같은 정도로는 아무 소용도 없소. 의심을 피하려 의식을 퍼트려 상태를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어찌 나를 속일까!

    게다가 쌍미비취사의 극독이 대단하다해도 원영기 수사를 단번에 죽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 자신을 과신한 것이 패배의 원인이오.”

    “물론 그렇습니다. 겨우 꼭두각시로 신외화신(身外化身)과 같은 완벽한 효과를 기대할 수야 없지요.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모란족과 내통한 첩자를 찾아냈으니 엄청난 영석을 들여 제작한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려!”

    곡쌍포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침묵하다 냉랭히 물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내가 올 것을 알고 미리 대비를 해둔 것 같은데. 황룡산에 도착한 후 내가 이상한 행동을 했었나?”

    “아닙니다. 어찌 아무 증거도 없이 어령종 장로를 의심할까요. 다만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대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 수사, 마 형 이제 나오시지요!”

    초췌한 수사가 고개를 젓다가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던 곡상포의 표정이 달라졌다.

    대전 양 측 석벽 속에서 노란 빛이 빛나더니 여전히 담담한 한립과 어두운 얼굴의 마 노인이 나타났다.

    “상상도 못했습니다! 곡 수사 어찌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도대체 모란 법사들이 무엇을 약속했기에 이리 경거망동을 했냐는 말입니다!”

    “허, 내가 모란인 인데 뭐 문제 있소?”

    “모란인 이란 말이오?”

    “흐음?”

    이번에는 초췌한 거한을 비롯한 수사들이 어리둥절해졌다.

    “물론! 원영기 수사인 나를 회유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아시오?  당신들 같은 천남 수사들이 어찌 모란 초원의 어려움을 알겠소. 매년 자질이 뛰어난 저계 법사들도 단약과 영석이 부족해 가장 중요한 수련 기회를 놓치고 겨우 백여 년 만에 먼지로 사라집니다.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좋은 자원을 당신 천남 수사들만 차지한단 말이오! 천남의 자원만 있다면 모란 법사들의 수는 백 년이 지나기도 전에 배는 될 것이오. 그 정도 세력만 키울 수 있다면 지긋지긋한 돌올인(突兀人) 신사들을 쳐부수고 모란 초원 전역을 제패할 수도 있었을 것이오!”

    곡쌍포가 광기어린 눈으로 소리쳤다. 그의 이런 반응에 초췌한 거한과 마 노인이 무어라 대꾸할지 주저했다.

    “돌올인을 쳐부순 다라……. 제가 듣기로는 이미 모란족 주력이 돌올인들과의 결전에서 대패해 돌올인들이 모란초원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모란족들이 이렇게 천남 지방 침략에 열을 올리는 것이고요.”

    돌연 무표정하게 듣고 있던 한립이 끼어들었다.

    “다, 당신이 어떻게 그 일을?  ……나와 악 상사의 전음을 엿들은 게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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