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9
409화. 이영아
이어 호연각 노인과 모용 형제가 구국맹 수사들을 맞이하러 출발을 했다.
그리고 한립과 곡쌍포는 이 씨 성의 여수사와 충운자의 안내를 받아 거처로 향했다.
가는 동안 한립과 입이 툭 튀어나온 곡 수사는 다른 곳으로 향했고 여수사가 한립을 인도해 한적하고 우아한 누각에 이르렀다.
“한 선배님, 이곳은 저계 제자들의 출입이 금해진 곳이니 조용히 휴식을 취하시기 좋으실 겁니다.”
여수사가 누각을 가리키며 옆으로 물러섰다.
“괜찮구나.”
한립도 만족스런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섭영 수사는 정말 무사한 것입니까? 저도 섭 사저를 못 본지 오래인지라…….”
여수사가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섭 수사와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지?”
한립이 그제야 자세히 여인을 살피니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목구비가 낯익었다. 그의 눈길에 여수사가 불안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소녀가 화도오 문하에 들어간 것은 당년 섭 사저의 추천에 의해서였으니 어찌 잘 모르는 사이라 하겠는지요.”
“영아! 그럼, 이영아?”
한립이 믿기지 않아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제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어머니의 성함이 무엇이고 이전에는 어느 나라 사람이었더냐?”
한립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서둘러 반문했다.
“모친의 함자는 문옥주라 하옵고, 월국 출신이셨습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여인이 머뭇거리다 숨길 일도 아니라 이실직고했다.
“아직 그 옥패를 지니고 있느냐?”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여인에게 묻자 그녀도 생각나는 바가 있어 눈을 부릅떴다.
“있습니다. 소녀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있는 옥패가 있습니다.”
여인이 한립의 눈빛에 얼굴을 붉히며 조금 물러나 품을 뒤졌다. 곧 하얀 기운이 서린 옥패를 든 그녀가 한립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옥패의 매끈한 면을 만지작거리던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회한에 잠겼다. 한참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너도 내가 누군지 알겠구나. 어머니께서는 뭐라 이르시더냐.”
그녀의 정체를 알고 살피니 문옥주와 닮은 면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저 수도자셨던 친우가 제게 남겨주신 선물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제가 수도계에 들어 몇 번이나 옥패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지만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선배님께서 주신 것이었다니! 게다가 낙운종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영아도 중얼거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 했다.
“낙운종에 들어간 것은 최근 일이니 네가 소식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네가 어령종이 아니라 화도오에 입문한 것이 이상하구나.”
한립이 코끝을 문지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령종이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느냐?”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이영아의 얼굴에 오히려 한립이 멈칫하며 물었다.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집안에 변고가 있어 조부와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는 기억 밖에는요.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월국을 떠나셔서 오랜 시간 떠돌아다니다 구국맹에 안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랬구나. 아마 마도 내부의 권력 다툼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높겠지. 지금 마도의 패권을 쥔 것은 어령종이 아니라 귀령문이니 말이다.”
한립이 자신이 아는 바대로 추측을 해보았다.
“마도 내부의 권력 다툼…….”
여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립이 그녀에게 옥패를 돌려주며 웃었다.
“통령옥(通靈玉)을 평생 동안 지녔으니 이제 완전히 네 것이겠지. 내가 수도계에 들어오기 전 네 모친과는 사형제 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네가 나를 한 사백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
“한 사백님.”
이영아가 머뭇거리다가 작게 한립을 부르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네가 나를 사백이라 부르는데 만난 김에 성의라도 표해야겠구나. 결단기 수련의 고비를 넘기는데 유용한 단약들이니 가져가 쓰거라.”
한립이 살가운 미소와 함께 손바닥을 뒤집어 약병 두 개를 여인에게 넘겨주었다. 옛 사람의 후인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 인색하게 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감사드립니다, 사백님!”
여인이 놀란 눈빛으로 약병을 받으며 허리를 숙였다.
“지금 쓰는 법보가 무엇이냐. 설마 비행을 할 때 사용하던 비도(飛刀)를 쓰는 것이냐? 무엇으로 만든 법보이지?”
“예, 이 비도 법보를 쓰고 있습니다. 열염철(烈焰鐵)을 주재료로 현영정(玄英晶)을 섞어 제련한 것인데 위력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평상시였다면 쓸 만했겠지만 법사들과 교전을 할 때는 부족해 보이는 구나.”
“하지만 사백님께서 새로 법보를 주신다고 해도 제련할 시간이 충분치 않습니다.”
한립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가 저물대를 스쳐 삼색 서금충들을 불러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날벌레들 중 일부가 무리에서 벗어났고 한립이 그것들을 향해 푸른 법결을 날렸다.
곧 작은 서금충 무리가 푸른빛을 반짝이며 하나로 뭉쳐지더니 금세 주먹만 한 구슬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내가 정성을 다해 기른 영충이니 잘 보관하고 있거라. 상대하기 어려운 적을 만났을 때 이것을 던지면 목숨을 구할 수도 있을게다.”
한립이 서금충 덩어리를 여인에게 건넸다.
“한 사백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이영아가 한립의 말에 감격해 외치고는 삼색 구슬을 받았다. 이제야 이영아도 한립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 상관도 없는 수사에게 이런 귀중한 것을 내줄리 없지 않은가.
“됐으니 이만 가 보거라. 난 조금 쉬어야 겠다.”
말을 마친 한립이 남은 서금충을 거두고 손을 내저었다. 오랜 시간 밤낮 없이 비행을 했으니 법력 소모가 적지 않았다.
“예, 사백님! 그럼 편안히 쉬십시오. 법사 대군이 당도하는 대로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녀도 한립을 대하는 어투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한립이 방 안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으니 주위에 푸른빛이 맴돌았다. 그의 열 손가락에는 기괴한 법결이 맺혀 있었고 손바닥에는 계란만 한 자색의 화염이 둥둥 떠서 끝없이 반짝였다.
바로 건람빙염과 육익상공의 한기를 결합해 제련한 화염이었다.
건람빙염을 능가하는 냉기를 품은 화염은 이제 한립이 가진 최고의 한 수나 마찬가지였다. 꾸준히 제련을 시도했지만 지금에 이러서야 성공한 것이다.
한립은 수라성화와 구별하기 위해 이 화염에 자라극화(紫羅極火)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무리 원영 후기의 수사라고 해도 자라극화에 닿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직접 원영 후기 수사과 교전해본 경험이 없으니 죽일 수 있을 지는 판단내리기 어려웠다.
안타까운 일은 건람빙염 제련에 어려움이 있어 조종할 수 있는 자라극화의 양도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을 다룰 수 있다면 원영 후기 수사라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감축 드립니다, 주인님! 자라극화의 위력이 처음에 비해 훨씬 강력해 진 듯 합니다.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지, 앞으로가 기대되는 화염입니다.”
한립의 머릿속에 은월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입을 벌려 숨을 들이 마시니 자라극화가 순식간에 세밀한 실처럼 변해 그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자라극화의 위력이야 대단하지만 양이 적은 것이 흠이구나. 지금으로서는 어서 허천정을 여는 것이 최선이겠지. 만일 통천령보의 위력이 허언이 아니라면 천남을 좌지우지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야. 그렇게 되어야 마음 놓고 지낼 수 있겠지.”
두 눈을 뜬 한립이 담담히 말했다.
“걱정 마세요, 주인님! 허천정의 신통력은 제가 말씀 드린 것 이상이면 이상이었지 절대 그 이하는 아닐 것입니다.”
은월이 간드러지게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는데 돌연 빛줄기가 들어오며 이영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한 사백님, 어서 대전으로 와주셔야겠습니다! 마 선배님이 돌아오셨고 모란인들도 곧 들이닥친 답니다.”
하얀 빛이 누각을 돌아 다시 뻗어 나갔다. 한립이 얼굴을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 * *
대청에 들어서니 곡쌍포와 초췌한 거한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고, 마 노인과 금포 수사가 창백한 얼굴로 그들에게 무어라 이르는 중이었다.
모용 형제, 이영아 그리고 낯선 결단기 수사 둘이 곁에 서서 이야기를 듣는데 얼굴이 더 없이 어두웠다.
이영아가 한립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미소를 보였다.
“한 수사도 왔군요. 제가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천태곡을 지키던 복운학 수사입니다. 이쪽은 낙운종 한립 수사입니다.”
초췌한 거한이 겨우 미소를 지으며 두 수사를 소개시켰다. 천천히 걸어 들어오던 한립이 상황을 보고 미묘하게 얼굴을 굳혔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륙 형에게 복 형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무사히 빠져 나오셨다니 다행입니다.”
한립이 호의를 보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이런 꼴을 보여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행히 마 수사가 마중을 나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위험할 뻔 했습니다.”
복 수사는 다른 이들에게 이미 한립의 존재에 대해 들었기에 전혀 놀라지 않고 답했다.
“허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저 추격하던 병사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퇴각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그야 수사의 고보가 위력이 엄청나, 감히 법사들도 교전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번 법사들의 침공은 이전과 양상이 너무 다른 듯합니다. 병사들도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상고시대에나 돌아다녔을 법한 거대 요수들의 위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예요.
피부가 두꺼워 웬만한 무기로는 타격을 입히기도 힘들고 덩치도 어마어마합니다. 게다가 몸에 기괴한 금제들을 걸고 있어 일단 진법 내로 침입하게 놔두면 거대한 결계도 순식간에 깨버리고 맙니다.”
복 수사의 얼굴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설마 원영기 수사이신 복 형께서도 요수를 어찌하지 못한단 말씀입니까?”
그 말에 순간 흠칫한 한립이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벌써 법사 대군들이 거대 요수들을 대동해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원영기 수사가 저리 말할 정도면 너무하지 않은가.
“제 수행과 법보의 위력을 합치면 요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당시에는 두 법사의 공격을 막느라 겨를이 없었지요. 그러는 동안 거대 결계가 요수들에 의해 깨져버린 것입니다. 륙 수사가 지키는 거점은 지원군이 도착했으니 천태곡처럼 쉽게 지지는 않을 겁니다.”
복운학의 얼굴도 한결 편해졌다.
“복 수사, 법사 무리 중에 대상사 급의 법사는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수가 적다면 우리 다섯이 한 번에 진격해 상대를 제압하지요. 원영기 급 법사를 죽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고 중상을 입혀 퇴각시켜도 나쁘지 않겠지요.”
곡쌍포가 음울한 얼굴로 제안했다.
“실망스럽게도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일일이 교전을 해본 것은 아니나 정체를 드러낸 대상사 두 명 외에도 한 명을 더 보았습니다. 비록 직접 손속을 겨뤄보지 못했지만 지닌 기운이 기이하기 그지없더군요.
아마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 변신한 것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들 외에도 얼마나 많은 고계 법사들이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복운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까? 일단 상대의 전략 파악이 급선무겠군요. 상대의 실력이 강력하다면 결계의 힘을 빌려 버티는 방향으로 가야겠습니다. 현재 우리의 임무는 시간을 끄는 것이니 말입니다.”
초췌한 거한이 복 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곡쌍포가 미간을 좁혔으나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한립과 마 노인도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