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408화 (165/2,000)

# 408

408화. 황룡산(黃龍山)

“우리 수행에 이렇게 조심을 하는데 아무리 전장이라 해도 목숨 보전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저번 모란인들의 침략 때 적잖은 법사들을 도륙했었는데, 다시 한 번 피를 볼 때가 되었나 봅니다.”

화룡동자의 어린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음산한 웃음이 떠올랐다. 한립이 그 말을 듣고 조금 얼떨떨하게 그를 힐끗 보았다.

화룡동자의 몸에 품은 살기가 다른 동급 수사들을 훨씬 초월하니 그간 죽인 수사들의 수가 상당할 것이다.

려락과 화룡동자가 한립과 내일 일에 대해 상의를 하고는 갑자기 출현한 거대 요수와 정체불명의 법사들에 대해서까지 의견을 나누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립이 직접 그들을 누각 앞까지 배웅하는데 려락이 머뭇거리다 결국에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한 사제, 오늘 누굴 만난 일은 어찌 되었나?”

려락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한립의 얼굴을 주시하는 것이 어떤 실마리라도 찾으려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옛 이야기가 오갔을 뿐이지요.”.

“하하! 그랬구만!”

려락은 큰 근심을 덜어냈다는 듯 웃더니 한립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화룡동자와 함께 멀어져갔다.

* * *

이튿날 대전회의에 참석하니 원영기 수사들이 크게 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정마와 천도맹 장로들은 물론 산수 중의 노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 회의를 주관하는 패엽종 오붕과 화의문 척 부인는 꽤 난감해졌다.

그들이 정말 불순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강제로 다른 세력들이 제시하는 조건을 수락해야 했던 것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은 고계 수사를 필요로 하는 임무에는 사대 세력이 항상 균등한 인원을 차출하는 것이었다. 어떤 세력 하나가 음모를 꾀해 다른 세력을 음해하는 일이 불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 후 한립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도 일어났다. 원영기 수사들로 조직된 천도맹 원로회에서 려락과 화룡동자의 소식을 받고 어떤 종파든 각각 한 명의 원영기 장로와 몇 명의 결단기 수사를 전천성으로 지원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물론 거리가 떨어져 있기에 이들이 전천성으로 결집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려락 등 이곳에 있는 수사들이 잠시 구국맹의 안배에 따라 모란인들의 공세를 막아야 함은 물론이었다.

지원군이 도착하면 이미 전공을 세운 선봉대는 종문으로 돌아가 이후의 전투에는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지원을 나온 이들이 대신 대전을 치르게 된다.

화룡 동자와 려락 등 다른 이들도 의사대전에서의 회의를 거쳐 각각 다른 임무를 맡아 전방 지원을 나가게 되었고, 한립과 다른 두 원영기 수사는 일고여덟 명의 결단기 수사들을 데리고 우국 변경의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떠나기로 하였다.

그곳은 법사들이 천남을 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는데 이런 곳이 변경을 따라 열댓 곳 정도 되었다.

요충지에는 거대한 진법이 설치되어 있기에 법사들은 이곳을 그냥 두고는 다른 전장을 차지해도 마음이 편치 않아 밀어붙이 중이었고, 그곳을 지키는 수사들은 아직 결전 준비가 되지 않아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근근이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란 고계 법사들의 비행 속도면 한 달 만에 전천성 코앞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법사 대군이 아직 한립이 지원을 나가는 거대 결계를 공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구국맹 원영기 수사가 한 명밖에는 없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전에는 원영기 수사 한 명과 거대한 진법의 조합으로 충분히 법사들과 교전을 하며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한립과 동행하게 된 동급 수사는 정도맹 호연각의 마 노인과 첫날 의사대전에서 보았던 녹색 장포의 입이 툭 튀어나온 노인 곡쌍포였다.

한립은 녹색 장포 노인의 허리에서 영수대 하나를 보았는데 은은하게 발산되는 영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안에 들어있는 영수가 비범한 것이라는 증거였다.

세 수사 모두 원영 초기였기에 상하가 나뉘지는 않았다. 그들은 언제 법사 대군이 공격할지 몰랐기에 바로 출발하기로 하고 결단기 수사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마 노인은 입담이 좋아 한립과 곡쌍포를 향해 웃고 떠들며 전쟁을 치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람이라도 가는 얼굴이었다.

반대로 어령종 수사인 곡쌍포는 음침한 얼굴로 반나절이 지나도 말 한 마디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립은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마 노인의 말에 대답해 예의바른 인상을 심어 주었다. 게다가 그들은 한립이 원영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의 실력을 대단치 않다 여기는 듯했다.

* * *

열흘 후 우국 리주 근처 황룡산 정상.

아름다운 누각의 어느 대청 안에서 거한이 초조하게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겨우 등나무에 앉아 차를 마시려는 순간 밖에서 붉은 빛이 쏘아져 들어와 선회했다.

거한이 그것을 보고는 안색이 변해 손을 뻗자 붉은 빛은 화염으로 변해 사라졌다. 겨우 안정을 찾았던 그의 얼굴에 다시 초조한 기색이 떠오르며 거의 울상을 짓기 일보직전이었다.

파래진 얼굴로 잠시 앉아 있던 거한이 품에서 푸른 종을 꺼내들었다.

댕!

듣기 좋은 종소리가 대청을 가득 채우더니 산골짜기를 타고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댕! 댕! 댕! 댕…….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누각 안에서 각양각색의 복색을 한 수사들이 바삐 뛰어나와 훈련된 대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룡산 전역이 짙은 안개로 뒤덮였고 방원 수십 리 범위가 기이한 청록색 안개로 인해 앞을 볼 수 없게 변했다.

이때 거한이 머물던 대청 안에도 수사들이 늘어났다. 모두 결단기 수행의 사내 셋과 여인 한 명이었다.

유일한 여수사는 체격이 작고 아담했으나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다. 네 명의 결단기 수사가 거한 양옆으로 갈라서서 공손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륙 선배님, 법사 대군이 이렇게 빨리 밀고 올라오는 것이 사실입니까?  저번에 연락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복 선배님 쪽에서 막고 있다고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겨우 며칠 만에 복 선배님이 지키시던 천풍현파진(天風玄波陣)이 뚫린 것일까요. 소식이 잘못된 것은 아닐 지요.”

여인이 머뭇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소식이 잘못 돼?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이번 전음부는 복타자 본인이 보낸 것이다. 게다가 그도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대패하고 살아남은 수사들마저 병사들에게 쫓겨 얼마 지나지 않아 황룡산에 도착한다니 더 이상 행운을 바라서는 안 될 것이야. 지원을 기다릴 새도 없이 일단 우리만으로 응전해야 한다.”

초췌한 거한이 냉소하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네 명의 결단기 수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거한은 그들에게 명을 내리고 있을 때 갑자기 붉은 빛 한 줄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거한이 즉시 손을 뻗어 전음부를 손에 쥐었다.

그 결과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륙 선배님 무슨 일이 생겼는지요?  법사들이 벌써 당도한 것입니까?”

그 모습을 본 여 수사가 다급히 물으니 다른 결단기 수사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어렸다.

“지원군이 왔구나! 원영기 수사 셋이 결계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홍릉, 너희는 어서 나가 세 분을 모시고 오거라!”

거한의 얼굴이 활짝 피며 마음 속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네 명의 결단기 수사들도 크게 안심해서는 거한을 향해 예를 올리고는 대청을 나섰다.

* * *

청록색 안개 밖에 세 수사가 허공에 떠서 결계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둘러 날아온 한립과 다른 두 수사였다.

법사들과의 전투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결계였기에 그들은 전음부를 보내놓고 줄곧 결계를 연구하고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안개에서 빛이 일며 녹색 안개들이 요동쳐 통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마 노인과 곡쌍포는 통로를 못 본 것처럼 굴었다. 오직 한립만이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통로를 바라보았다.

곧 통로에서 네 가지 빛줄기가 뻗어 나와 사내 셋과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감히 존함을 여쭤도 될는지요!”

건장한 체격의 단정한 중년인이 먼저 앞으로 나서 한립 등을 향해 인사를 올려다.

“나 한 모는 낙운종 장로이고. 이 두 분은 호연각 마 수사와 어령종 곡 수사이다. 결단기 수사들이 뒤따르고 있으나, 지원이 늦을까 염려하며 우리 셋이 서둘러 온 것이지. 결계를 펼친 것을 보니 모란 법사들도 곧 당도하겠구나!”

한립이 다른 두 수사가 나설 기미가 없자 미소를 유지하며 먼저 소개를 해주었다.

“한 선배님이셨군요. 저는 청허문 충운자이고 이쪽은 황풍곡 모용 형제들 그리고 화도오 이 소저라 합니다.”

중년인이 나머지 결단기 수사들을 소개하자 한립의 시선이 모용 형제들의 얼굴을 맴돌았다.

‘모용 형제? ’

“섭 수사는 잘 지내더냐.”

“선배님께서 섭 사저를 아십니까?  저희는 줄곧 이곳을 지키느라 사형제들을 못 본지 몇 해나 지났습니다.”

한립이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얼굴로 묻자 모용 형제가 깜짝 놀라며 답했다.

“잘 지내겠지. 얼마 전에 너희 사저를 본 적이 있느니라. 그런데 너희는 나를 전혀 몰라보나 보군. 하긴 그저 잠깐 얼굴만 본 사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한립이 쌍둥이 형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외모가 이전과 크게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어릴 적 모습이 남아 있었다.

모용 형제는 깜짝 놀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생각나는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선배’가 저렇게 말하니 눈에 익은 것 같기도 했다.

“기왕 두 수사가 알아보지 못하니 이야기는 차차 나누고, 지금은 일단 들어가지.”

한립이 마 노인과 곡쌍포를 보며 결단기 수사들에게 일렀다.

“예! 저를 따르시지요. 륙 선배님께서 대청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충운자가 한립이 모용 형제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아무 생각이 없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내를 시작했다.

수사들의 안내를 받아 한립 등 원영기 수사들이 운무 속으로 들어가자 다시 안개가 요동치며 입구가 막혔다.

잠시 후 한립과 다른 수사들은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초췌한 거한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까지 지원을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은 마 형과 곡 수사 아니십니까?  이 젊은 수사 분만 얼굴이 낯설군요. 륙 모에게 성함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 지요?”

초췌한 거한이 세 수사를 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나머지 두 수사와는 안면이 있는 듯했다.

“륙 형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한 수사는 몇 년 전에 어린 나이에 원영을 응결해 전도가 유망한 분입니다!”

마 노인이 거한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아아, 그러셨군요. 아무튼 세 분이 이리 와주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 혼자서는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륙 수사가 한립이 막 원영에 이른 수사라는 소리에 약간 실망하는 듯하더니 바로 표정을 회복하며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초췌한 거한의 표정을 한립이 놓칠 리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거한은 곡쌍포와도 인사를 나누곤 안색을 굳히며 전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침 잘 와주셨습니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법사 군대가 벌써 복 수사가 지키던 천태곡을 지났다고 합니다. 이런 기세면 반나절 내로 천태곡에서 후퇴하는 수사들이 이곳에 이르겠지요. 세 분께서 그들을 마중해 주시면 될 듯합니다.”

초췌한 거한이 상황을 설명하고 거침없이 세 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지요! 모두 몰려 갈 것 없이 나 한 사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 수사와 곡 형까지 나갈 것 있나요.”

마 노인이 전혀 개의치 않고 심지어 홀로 나가겠다하니 한립과 곡쌍포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 이상하게 보실 것 없습니다. 바람도 쐴 겸 얼마 전에 얻은 이보(異寶)의 기량을 살펴볼 겸 나가려는 것이니까요. 설마 두 분이 다녀오고 싶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허허! 마 수사가 자신이 있으시다면 저야 뭐.”

곡쌍포가 웃음을 터트리며 담담히 말했고 한립은 그저 미소로 응답했다.

“그럼 한 수사와 곡 형은 잠시 휴식을 취하시고 마 수사께서 수고 좀 해주십시오. 허나 모용 형제를 함께 데려갔다 오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둘의 벼락 속성 공법의 위력이 아주 매섭습니다.”

초췌한 거한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에 노인도 반대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은 초행이었으니 길을 잘 아는 이들이 안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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