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
407화. 화섬(火蟾)
“추마골로 진입하는데 꼭 필요한 물건이라! 검은 가락지를 말씀 하시는 겁니까.”
한립이 바로 무언가를 떠올리고 차분히 되물었다.
“과연 양의환(兩儀環)은 수사의 손에 있었습니다!”
남롱후가 정신이 번쩍 들어 혈색 없던 얼굴에 약간 홍조가 돌았다.
“양의환.”
한립이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머리를 굴리다 번뜩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예전 현황 노인이 천외운철(天外隕鐵)로 제련했다는 그 양의환 말씀입니까? 평소에는 아무 쓸모도 없지만 북극원광(北極元光)을 맞닥뜨리면 제어가 가능해 수도계의 계륵 중 하나라는 그 보물 말입니다.”
“한 수사의 견식이 대단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양의환은 본래 음양을 뜻하는 두 개의 반지로 음기를 품은 음환을 품에 지니면 북극원광에서 무사할 수 있고 양기를 품은 양환이 있으면 북극원광을 조종해 적을 섬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사가 지닌 것은 아마 음환이겠지요. 예전 창곤 상인이 그것의 힘을 빌려 추마골의 북극원광을 이겨내고 빠져나왔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다른 방법으로도 북극원광을 피할 수는 있지만 많은 수사가 대규모 결계를 펼치거나 다른 보물들이 필요한데, 그 보물들은 이미 종적을 감췄다고 하네요.”
“남롱 형의 말씀은 그러니까…….”
한립이 두 수사를 보며 내심 고민에 빠져들었다.
“간단합니다. 저와 선기자 수사는 한 수사와 함께 추마골로 들어가 보물을 가져오고 싶습니다. 보물을 통해 수행을 크게 늘릴 수 있다면 앞으로 두려울 것이 없겠지요.”
남롱후가 눈을 빛냈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한립이 바로 답하지 않고 두 수사를 바라보았다.
검은 반지가 말로만 듣던 양의환 중 음환이라는 소리를 듣자 바로 남궁완 사저에게 얻은 다른 검은 반지가 떠올랐다.
그의 추측대로라면 그것은 바로 양환일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양의환 한 쌍을 모두 지니고 그것의 용도까지 알게 되었으니 한립은 속으로 어이없어하면서도 겉으로는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남롱 수사의 뜻은 알겠으나 양의환과 지도가 있다고 해도 보물을 무사히 꺼내올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 보십니까. 추마골은 천남의 제일 흉지로 명성이 자자한데 가볍게 볼 곳이 아니지요. 그런 곳에 무턱대고 들어갔다 죽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남롱후와 선기자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번엔 남롱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 한 수사가 터놓고 물어 보시니 저도 대답을 해야겠지요. 창곤 상인이 기록해 둔 바에 따르면 추마골은 위험하기 그지없어 한 순간의 실수로 변화무쌍한 공간 균열에 빠질 수도 흉악한 고대 금제에 갇힐 수도 있다 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보물을 찾는다면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은 확실히 따지기 어렵지요. 위험한 곳일수록 대단한 보물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안에서 어떤 일을 당하게 될 지는 본 후는 물론이고 창곤 상인 본인도 모릅니다. 창곤 상인도 당시 중상을 입어 추마골 변두리만 돌아 나왔고 중심부로는 접근하지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진정한 보물들은 아직 그 안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는 위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은은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물론, 수사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에게 양의환을 파는 것도 감사한 일이겠지요. 영석이야 저희 둘이 충분히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상고 시대 수사들이 지닌 어마어마한 단약들이 아쉽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런 것들을 찾아낸다면 원영 중기도 오래 지나지 않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화신기에 대한 비밀이 담긴 서적이라도 찾아낸다면 더없이 좋겠지요! 화신기는 비승(飛昇)을 통해 영계(靈界)에 진입할 수 있다는 전설도 있지 않습니까. 천남에서 이런 정보를 아는 이는 맥이 끊겼으니 다른 곳에서 수소문을 해봐야지요.”
곁에 있던 선기자도 남롱후를 거들었다. 한립의 시선이 불안정해졌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두 분은 몹시도 제가 추마골에 같이 가기를 원하시는 군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원영기 수사가 많지는 않아도 꼭 저일 필요는 없을 텐데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남롱후와 선기자 둘 다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남롱후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그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던 차였습니다. 추마골은 금제와 공간균열의 외에도 만황고수들 그러니까 고대 요수들이 자생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천남에서는 벌써 멸종된 화섬(火蟾)이라는 고대 요수인데. 화섬이 지능은 높지는 않아도 최소 만년은 산데다 전신을 천린요화(天麟妖火)라는 불길로 두르고 있어 강력한 위력을 낸다더군요.
창곤 상인의 기록에 따르면 이 불길이 원영 수사의 영화보다 몇 배는 강력하다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수사가 남색 빙염을 펼쳐 원영 수사를 얼려버린 것을 보고 바로 화섬과 상극일 수도 있을 거라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설마 그 화섬이라는 고대 요수가 추마골 진입로에 자생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어떤 고대 수사의 유해와 관련이 있지요. 이 고대 수사의 유해는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어 고대 금제도 공간 균열도 없다더군요. 다만 하필 인근에 화섬의 서식지가 있어 문제지요.
창곤 상인이 당시 이곳을 노리고 찾아갔다가 화섬과 겨뤄보고는 달아났다 합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달아나는 와중에도 화독(火毒)에 당해 목숨을 잃을 뻔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요.”
선기자도 인자한 표정을 회복하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두 분은 제가 화섬을 상대하는 동안 보물을 취하겠다는 뜻이로군요.”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남롱후가 조금 흥분한 듯 말을 이었다.
“화섬이 금제나 공간균열에 비해서는 훨씬 안전합니다. 그저 잠시 시간을 끌어 보물을 취할 동안만 유인하는 것이니 수사의 얼음 속성 공법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그리하여 고대 수사의 저물대를 갖고 나오면 셋이서 나누시지요.”
“두 분은 일단 추마골에 들어가 고대 수사의 저물대를 취하면 다른 곳은 건드리지 않을 계획인지요?”
“운이 좋아 그 정도만 성공해도 충분합니다. 불필요한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남롱후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 분은 천극문 세력의 힘을 빌려 추마골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셋이서 가자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천극문에 얼음 속성 공법을 수련하는 수사들이 없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건 수사께서 북극원광의 무서움을 몰라 하는 말씀입니다. 양의환을 이용해 비호를 받을 수 있는 수는 기껏해야 세 사람에 불과합니다. 한 사람만 늘어도 일은 어려워지지요.
게다가 천극문 세력의 힘을 빌리다니 이미 귀령문에 크게 당해 놓고 어찌 또 요행을 바라겠습니까? 한 수사는 모란 초원에서 본 후를 노리지 않았고 또 떠나기 직전에 큰 도움까지 주었으니 특별히 함께할 결심을 내린 것입니다.”
귀령문을 언급하면서 남롱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남롱 형께서 저를 믿고 얘기해 주셨다니 일단 영광입니다.”
“한 수사, 우리는 모든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 수사께서도 이제 답을 주시지요.”
선기자가 탄식하듯 말하고는 한립을 응시했다.
“언제 추마골에 들어갈 예정이십니까?”
“바로는 아닙니다. 추마골 내부의 공간 균열은 항시 위험하지만 50년을 주기로 1년간은 안정되는 때가 돌아옵니다. 모란초원에 들어가기 전 미리 살펴보니 적어도 3, 4년은 있어야 안정기가 찾아 올 듯합니다. 그러니 준비할 시간은 충분하지요.”
남롱후가 의심 없이 바로 답해주었다.
“기왕 그리 나중 일이라면 저도 심사숙고할 시간을 갖겠습니다. 공간균열이 안정기에 들어가기 1년 전까지 확답을 드리지요. 그때가 되어 제가 추마골 여정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양의환은 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립이 턱을 쓸며 고심하다 결정을 내렸다.
모호한 답이었기에 남롱후와 선기자가 썩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한립으로서는 생사가 걸린 일이니 아무렇게나 결정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와 두 수사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딱 보기에도 남롱후와 선기자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추마골이 마지막 기회일 테지만 한립은 아직 창창하니 이런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세상만사가 빠르게 바뀌니 그때 가서 생각해 보아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어찌 되든 한립이 먼저 양의환을 빌려주겠다고 하니 두 수사도 더는 강요하지 못했다.
한립은 추마골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 먼저 자리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기자가 한립에게 어떤 영패를 내밀며 이 영패만 있으면 어떤 천극문 제자를 통해서라도 자신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립은 영패를 받고는 다시 점포로 나와 주인장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서 거처로 돌아왔다.
누각에 도착해 보니 려 사형과 화룡동자가 1층 대청에 앉아 있었고 모패령이 곁에 앉아 안주인 노릇을 하며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한립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인이 바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공자, 려 선배님과 남 선배님께서 기다리신지 오래십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아니다. 나는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테니 너는 올라가 이만 쉬어라.”
“예, 공자.”
모패령이 얌전히 인사를 하고는 바로 2층으로 향했다. 한립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총명함에 만족스러워 하다가 문득 남궁완을 떠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어찌 한숨을 쉬시나? 따라 올라가고 싶은 게 아닌가?”
려락이 오랜만에 한립이 감정을 드러내자 흥이 났는지 놀리듯 물었다.
“려 사형과 남 수사께서 기다리신 이유는 오늘 회의에 대해 나눌 말씀이 있어서겠지요?”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 곁에 자리했다.
“그렇지. 우리 둘이 이미 따로 맹으로는 소식을 전했고 성 내의 다른 천도맹 수사들에게도 통지를 했네. 다들 새 둥지가 날아가면 성한 알도 없다는 도리는 알더군. 다들 각 세력에서 원병을 차출하기 전에 일단 구국맹을 도와 모란인들을 막는 선봉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네.
당연히 원영기 수사들이 나서면 보상으로 주어지는 영석도 상당하겠지. 모란인들과 수사들의 전쟁이라지만 어차피 가장 먼저 공격당하는 것은 구국맹 아닌가. 구국맹도 영석을 아끼려 들지는 않을게야.”
려락이 천천히 할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다면 상의할 것도 없겠습니다. 제가 구국맹의 일원이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힘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한립이 미리 마음먹은 대로 이야기하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마 양도에서 누군가 연락을 취해왔는데, 내 생각에도 일리가 있는 소리라 아무래도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이리 모인 겁니다.”
화룡동자가 입을 비죽이면서도 진지하게 말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설마 구국맹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 삼대 세력을 약화시키려 한다는 소리를 하던가요?”
한립이 눈을 빛내며 피식 웃었다. 한립이 단번에 추측을 해내자 놀란 려락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 한 사제는 과연 머리가 비상하구만. 허나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구국맹이 동시에 삼대 세력을 상대로 일을 꾸밀 리는 없고. 아마 암암리에 삼대 세력 중 한 두 세력과 손을 잡고 나머지를 노리는 것일 테지.
이런 일이 벌어지게 천도맹에서도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일세! 그렇게 되면 법사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천남 수도계는 더욱 불안정해 질 테니 말이야. 천남 세력 간의 평형은 유지가 되어야만 하네.”
“두 분의 뜻은 그럼…….”
“우리 삼대 세력의 수사들은 잠시 구국맹의 배정을 따라 행동하겠지만 결코 이 일을 계기로 실권을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우리와 마도 육종 및 정도 수사들이 상의를 해보았는데, 내일 의사대전에서 의견을 제시할 예정이에요.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소한 구국맹이 숨기는 것 없이 전방 운영을 하도록 말입니다. 때가 되면 한 사제도 다른 수사들과 함께 이 의견에 지지를 보내주시겠습니까?”
화룡동자가 차분히 물었다.
“문제없습니다. 저도 법사들을 막는 동안 뒤통수를 맞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럼 됐군. 이미 다른 수사들에게도 연락을 취해 놓았으니 때가 되면 패엽종이나 화의문도 반대할 수만을 없을 거네. 이번 대전이 빨리 끝나서 천남 수사들이 크게 줄어드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인데!”
려락이 길게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