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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06화 (163/2,000)
  • # 406

    406화. 옥부(玉符)

    한립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좋은 기회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일단 황풍곡 장로직을 승낙하면 육파와 구국맹과의 관계 등 복잡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풍곡의 유일한 장로가 되면 말이 좋아 대권을 휘두르는 것이지 결국 낙운종에서처럼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고, 남궁완 역시 엄월종과 엮여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호의는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에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령호가 그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을 거부하다니. 한 수사는 정말 육파의 일에 연루되는 것을 꺼리는 가 봅니다. 그럼, 아예 제안을 바꿔보면 어떠합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이렇게 합시다. 한 수사가 반드시 황풍곡 장로직을 맡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수사에게 세 가지 보물을 내줄테니 그 대신 평생 동안 황풍곡을 위해 세 번만 나서주시지요. 물론 수사의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말입니다.”

    령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능력이 되는 한, 단 세 번이라면 과분한 제안은 확실히 아니군요. 그렇다면 수락할 만합니다.”

    한립이 이번 제안에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령호가 드디어 웃음기를 되찾고는 미리 준비한 듯 저물대를 스쳐 세 가지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립이 말없이 탁자에 위의 물건들을 세밀히 살폈다. 남색 방패, 옥으로 만든 붉은 병 그리고 옥패 모양의 물건들이었다.

    한립은 거침없이 일단 방패부터 들어보았다.

    작은 방패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아무 것도 들지 않은 것처럼 가벼웠다. 놀란 한립이 자세히 연구해 봐도 그의 상식으로는 어떤 재료로 제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얻은 고보인데 노부와 오랜 시간 함께한 물건이지요. 남광순(藍光盾)이라 하고 특히 불 속성 공격을 받았을 때 능력이 대단합니다. 아마 때가 되면 수사도 노부가 허언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거예요.”

    령호가 한립의 손에 들린 방패를 보며 은근히 아까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립이 방패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다 다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가 보기에도 평범하지는 않았으니 상대가 괜한 물건을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어 그가 붉은 옥병을 들었다.

    “그것은 예전에 홀로 모란초원에 들어갔다 칠급 철시조(鐵翅雕)를 죽이고 겨우 얻은 내단입니다. 진귀한 재료이니 연단을 하든 다른 곳에 쓰든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칠급 요단!’

    한립이 아무렇지 않게 들으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칠급 요단이면 천남 지역에서는 진귀한 물건이었지만 그에게는 계륵과 같았다. 그래서 미소와 함께 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바로 다음 물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령호가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먼저 설명을 시작하지 않았고 한립은 눈을 빛내며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혹시 상고 시대 수사가 제련한 옥부(玉符)가 아닌지요?”

    그가 살펴보고 확신을 갖고 묻자 령호가 오히려 놀랐다.

    “한 수사는 이전에 이런 옥부를 본 적이 있는 겁니까?  노부가 알기로 상고 시대의 특수 부적들은 천남에서는 거의 실전되어 이것을 알아보는 수사가 거의 없을 것인데…….”

    “우연히 옥부에 대해 알고 있는 수사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노인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갔다.

    “이 옥부는 노부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것입니다. 비록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몰라 겨우 미세한 위력만을 끌어 쓰는데도 이것을 사용해 강적을 몇 번이나 물리쳤었죠. 상고 시대 수사가 꽤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인 듯합니다.”

    령호가 이야기를 하며 탁자 위의 새까만 옥부를 향해 손짓하자 옥부가 순식간에 움직이더니 검은 빛으로 변해 냉기를 뿜어내며 검붉은 손을 불러냈다.

    거대한 손이 다섯 손가락을 활짝 피니 검은 색의 음산한 불꽃이 튀며 누각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한립이 놀라며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게 바로 옥부를 얻고 수 백 년을 연구한 끝에 겨우 알아낸 사용법 중 하나입니다. 검은 기운이 화한 귀수(鬼手)는 극한의 양기를 지니거나 매우 강한 보물이 아니고는 못 잡는 것이 없지요. 일단 귀수에 잡히면 법보든 고보든 모두 효력을 상실하고 최상급 보물들도 영성이 크게 줄어 위력이 급감하게 됩니다.”

    령호 사조가 이야기를 하며 의식으로 귀수를 조종했다.

    새까만 손이 폭발적으로 불어나 나무 탁자를 스치니 검은 불꽃이 소리 없이 타올라 탁자를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마도 공법인 분신(分神)을 통한 화형과 비슷했지만 검은 손은 어차피 옥부에서 기인한 것이니 의식을 나눠도 의식에 손상을 입을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극히 음한 기운을 띠는 불꽃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옥부에 분명 다른 활용법이 있을 텐데,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노부는 알아내지 못할 듯합니다. 젊은 한 수사가 연구를 해보되 이미 함유하고 있는 위력의 대부분을 소모하였으니 아껴 사용해야 할 겁니다.”

    령호가 손짓하자 거대한 손이 다시 검은 빛으로 변해 탁자로 돌아왔다. 옥부의 원형인 옥패로 돌아간 것이다.

    한립이 마지막 옥부에 크게 흥미가 생겨 미소를 머금었다.

    령호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상고 시대의 부적에 대해 연구해 두면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 같아 한립이 소매를 펄럭여 세 보물을 회수했다.

    하지만 탁자 위에는 대신 세 개의 옥으로 만든 하얀 원반들이 출현했다.

    “이 진법 원반들은 제가 직접 제련한 법기라 다른 이들이 모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후 수사가 세상을 떠나고 황풍곡에 위기가 닥친다면,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돕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들어 차분히 령호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그 말이면 충분합니다. 노부도 황풍곡을 위해 최선을 다한 셈이겠지요.”

    할 일을 다 했으니 오래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립은 더 머물지 않고 바로 인사를 하고 누각을 떠났다.

    령호도 그를 말리지 않고 1층으로 내려와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 노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졌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누각을 떠난 한립은 바로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다. 그는 외진 구석을 찾아 천극문 로 장로가 주고 간 옥간을 꺼내들었다.

    옥간을 만지작거리던 한립이 결정을 내렸는지 한 방향을 정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천성을 절반 정도 지나서야 성 외곽의 평범한 잡화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점포 앞에 세워진 검은색 나무판에 옥화헌(玉和軒)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한립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예닐곱 장 쯤 되어 보이는 작은 점표였는데 부적이나 원료 같은 소소한 물품들을 파는 곳이었다. 그리고 옆으로 뚫린 작은 쪽문으로 뒤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다가가 살피니 대문 옆에 회색 의복을 걸친 중년인이 앉아 작은 책자를 살피고 있었다.

    한립이 의식으로 살피니 겨우 연기기 정도의 경지로 외모도 평범해 웬만해서는 시선을 끌지 않을 인사였다. 중년인이 한립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만면의 웃음을 보이며 황급히 맞이했다.

    “선배님, 어떤 물건으로 보여 드릴까요?  저희 가게가 작아도 있을 것은 다 있습니다.”

    하는 언사 역시 어느 장사꾼이나 말할 만한 것이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손바닥을 뒤집어 옥간을 내주었다.

    중년인이 미묘하게 얼굴이 달라져 옥간을 품에 숨기고는 더욱 정중히 물었다.

    “존함을 알 수 있을 지요?”

    “한립!”

    “한 선배님이셨군요. 사조께서 선배님이 오실 것이라 이야기 해주셨지만 이렇게 일찍 찾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중년인이 공손히 말하고는 몸을 돌려 한립을 안내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의 예상과 달리 옆으로 난 쪽문으로 들어가자 창고 비슷한 공간이 나왔고 사방이 막혀 있었다.

    중년인이 먼저 몇 걸음 앞으로 나가 나무 궤짝을 건드리자 곁에 붙은 다른 궤짝들이 벌어지며 벽 사이의 틈을 드러냈다.

    “혹여나 금제를 설치하면 손님들 중 알아차리는 분이 있을까 하여 속세의 수법인 기관을 설치한 것입니다.”

    중년인이 벽 사이의 틈에 손을 넣어 벽돌 중 하나를 건드리자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틈이 갈라지며 음산한 느낌의 통로가 드러났다.

    “저는 이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안 되니 선배님께서는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중년인이 옆으로 비켜나 미소를 띠며 안내했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의식으로 안을 훑자 안에서 미약하게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고 더 안으로 진입하려하자 결계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러나 한립은 이 결계가 단순히 영기의 흐름을 가리는 용도란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강력한 의식으로 단숨에 뚫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안에서 기다리는 이가 알아차릴 것이다.

    한립이 잠시 주저했다.

    비록 천극문 장로가 전천성에서 멍청한 짓을 벌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자의 말을 믿고 결계가 쳐진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꺼려졌던 것이다.

    안에서도 그의 우려를 눈치 챘는지 순식간에 그의 의식을 가로막던 결계를 거둬버렸다. 상대가 한립의 신임을 얻기 위해 고의로 결계를 거둔 것을 깨달은 한립은 거침없이 의식을 퍼트려 안을 살폈다.

    ‘저 자가?  흥미롭군.’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고 칠흑 같은 통로로 들어갔다.

    중년인은 한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기관을 원상복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게로 돌아갔다.

    굉장히 긴 통로는 그가 향하는 곳이 은밀하게 숨겨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참을 걷자 빛이 반짝이며 출구에 도달했는데 몇 걸음 더 나가자 사방이 돌로 만들어진 석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석실은 꽤나 넓었지만 텅텅 비어 있었고 몇 개의 방석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장식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두 사람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립도 석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방석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수사께서 찾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시 수사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한립이 그 중 한 명을 향해 미소로 화답했다. 머리에 관을 쓰고 남색 장포를 입은 이가 한립의 말에 쓴웃음을 보였다.

    “그렇지요. 본 후가 거기서 살아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 형과 헤어진 후 고비를 넘긴 줄 알았는데 상대가 비술을 펼쳐 모란초원까지 추격을 해왔더군요.

    하늘이 도왔는지 마침 우리를 찾아 일대를 수색하던 고계 법사들을 마주쳐 혼전 중에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내게 이런 짓을 한 놈들에게는 이후에 두고두고 갚아줘야지요.”

    원영 중기 수사의 목소리가 갈수록 살벌해졌다.

    그는 뜻밖에도 보물을 찾으러 떠났다가 수사들의 배신으로 죽을 뻔한 남롱후였다. 잿빛 얼굴에 총기를 잃은 눈빛이 그가 얼마나 원기를 크게 상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이는 천극문 장로라던 백의 노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빠져 나오시다니 탄복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남롱 형께서는 거처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지 않고 왜 저를 찾으셨는지 궁금하군요. 게다가 다른 수사의 제자를 시켜 제 시첩까지 희롱하면서 말입니다.”

    순식간에 미소를 거둔 한립이 희미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허허허! 오해십니다. 어찌 감히 본 후가 그런 짓을 할까요. 수사나 저나 상황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모두 그들의 추격을 받고 있으니 말입니다. 혹여나 그들의 암습을 받아 변고를 당하지나 않을까 이런 수를 내어 만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친우인 천극문 선기자 수사라 합니다. 본래 이번 여정에도 함께하려 했으나 하필 문내에 임무가 겹쳐 함께하지 못하였지요.”

    남롱후가 웃음기 어린 해명을 하며 곁의 백의 노인을 소개해주었다. 이때 선기자가 웃으며 한립을 향해 포권을 했다.

    “노부의 행동이 확실히 예의에 어긋났으니 양해를 구합니다. 다급한 상황이라 그리 한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 주세요.”

    “그러지요. 그건 그렇고 방금 남롱 형께서 하신 말씀은 제가 지닌 옥함 때문입니까?”

    한립이 손을 저으며 남롱후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추측대로라면 이번에 여러 수사들을 매수하느라 귀령문이 적잖은 대가를 치렀을 겁니다. 그만큼 창곤 상인이 어떻게 추마골에 들어갔는지 그 방법과 지도를 필사적으로 원하는 걸 테지요!

    그런데 한 수사가 우연히도 추마골로 들어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 하나를 갖고 있습니다. 남롱 형의 지도와 함께라면 추마골을 진입했을 때 닥쳐올 대부분의 위험을 피하고 보물을 취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그런 보물입니다.”

    선기자가 진지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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