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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05화 (162/2,000)
  • # 405

    405화. 령호의 초대

    “오 형께서 말을 아끼시는 것은 가능성이 낮은 일이라 여겨서 그러시는 겁니다. 차라리 제가 말씀 드리지요!”

    화의문 척 부인이 빙긋 웃으며 오붕을 대신해 나섰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려나 싶어 모두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사실은 상황이 이러합니다. 대전을 지켜보았던 제자들이 두 원영기 법사의 외모가 무척 기이했다고 전해 왔습니다. 거기다 죽은 수도자들의 영혼을 집어 삼키는데 법사와 수사를 가리지 않는다더군요.

    아마 오 종주께서는 두 명이 인류(人類)가 아니라 다른 종족이 모습을 바꾼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계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 분명한 요기나 마기를 느낀 것이 아니라서 아직 판단을 내리기에 이른 감이 있지요.

    그래도 갑자기 강력한 만황시대 거대 요수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그들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는 일단 모란족이 다른 세력과 공모해 우리 천남을 침공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중입니다.”

    “다른 종족이라면 부인의 말씀은 화형(化形)을 한 요수를 뜻하는 겁니까?”

    모두 놀란 가운데 령호 사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라리 그러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요수가 아니라면 사악한 마공이나 사술을 익힌 사수(邪修)일 텐데 그들과 마주치는 것보다는 요수가 낫지요.”

    오붕이 가라앉은 얼굴로 척 부인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이 소식을 오 종주께서는 언제 들으셨습니까?”

    줄곧 한 마디도 하지 않던 한립이 담담히 물었다.

    “지난번 전황을 보고 받으며 들은 소식입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닙니다. 그저 괴이한 두 법사가 수사이든 요수이든 이렇게 빨리 정체를 드러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예전과 달리 모란인들은 장기전을 벌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군요. 수사의 주력(主力)을 찾아 단번에 승기를 잡으려 할지도 모릅니다. 모란초원 쪽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걸까요?”

    한립이 턱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의 분석에 오붕과 척 부인이 안색이 달라져 서로를 쳐다보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도 한립이 말한 변화의 의미를 못 알아 들을 리 없었다.

    이전에는 모란인들이 침략을 했어도 전부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지난번 대전은 짧은 편이었지만 길면 수십 년까지 전쟁을 치르고는 했던 것이다.

    구국맹 수사들이나 모란족 법사들이나 일회성의 대규모 결전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면 한쪽이 철저히 멸망하거나 쌍방의 세력이 크게 꺾여 공멸할 테니 말이다. 천남 수사들이나 모란 법사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모란 법사들은 다수의 부락들이 연맹하는 것이고 천남 수사들도 크고 작은 종문들이 연합을 해서 싸우는 터라 뜻을 모으기가 더욱 어렵기도 했다.

    그런데 모란족들의 흉흉한 기세며 괴이한 법사들의 출현 그리고 만황 요수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란족 내부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한 형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지금의 모란족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천남의 모든 종문들은 제자를 파견해 바로 두 번째 원군을 전방으로 보내야 합니다. 안 그랬다가는 모란족들이 각 문파를 각개격파하기 시작하면 큰일 아닙니까. 다들 본문으로 돌아가 상황을 전달해 주시고 서둘러 움직여 주세요. 저희 구국맹의 힘만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한참 후 오붕이 쓴웃음을 지으며 정중히 공고했다.

    “한 수사께서 말씀하신대로 될 가능성이 높으나 아직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원영기 수사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오늘 회의한 내용은 비밀에 붙이기로 하지요.

    허나 만일 모란족이 전면전을 원한다면 반드시 그들 중 수행이 높은 신사(神師)들도 나설 것입니다. 이런 원영 후기 법사들은 우리가 상대할 수 없으니 맹의 위무애 장로에게 연락을 드려 삼대 수사들이 모여 이 일을 대비해 주실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척 부인이 생각 끝에 건의했다.

    “척 부인 말씀이 맞습니다. 이런 일에 허술하게 대비할 수는 없지요. 저도 즉시 본 문으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조금 초췌해 보이는 마른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다른 수사들도 중대한 사안임을 알았기에 연신 고개를 끄덕여 이의가 없음을 밝혔다.

    이어 그들은 세부적인 일에 대해 논의했고 일단 원군을 꾸려 보내 모란족의 진공 속도를 늦추고 천남의 각 세력들이 제자들을 차출할 시간을 벌기로 결정했다.

    그 후, 회의를 마친 수사들이 급히 의사대전을 나서기 시작했다.

    한립은 려 수사 그리고 화룡동자와 나란히 걸어가다가 전당 정문을 나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가?”

    려 사형이 고개를 돌려 한립의 표정을 보곤 놀라 물었다.

    “아닙니다. 고인이 저를 보자고 하니 아무래도 잠시 다녀와야겠습니다. 사형과 려 형께서는 먼저 돌아가십시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더니 바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일이 있다면 가봐야지. 난 그럼 돌아가 천도맹 수사들에게 오늘 회의 내용을 알리고 그 김에 사형에게도 연락을 하겠네. 우리 천도맹에서는 이 일을 어찌 처리할지 의견을 들어봐야지.”

    려 수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화룡동자는 입 꼬리를 슬쩍 끌어당기며 히죽거렸다. 한립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는 거처와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려 수사가 전당 정문을 나서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옆에선 화룡동자가 그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째 걱정 되십니까?”

    “걱정 될게 무엇입니까.”

    려 수사는 내심 찔렸지만 겉으로는 태평하게 반문했다.

    “내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걱정하는지 려 형이 가장 잘 알겠지요. 한 수사는 이전에 황풍곡 출신이 아니었습니까. 령호 노괴 역시 려 형의 사형처럼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고요. 다른 원영기 수사가 없는 마당에 령호 노괴는 더욱 애가 타겠죠.

    중소 문파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황풍곡 같은 거대 문파에 원영기 수사가 없어지면 멸문을 당할 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방금 한 수사에게 전음을 보낸 이가 령호 노괴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남 형은 한 수사의 출신을 어찌 아신 겝니까. 저는 말한 기억이 없는데요.”

    려 수사가 대답 대신 침묵하다 물었다.

    “허허, 낙운종에 갑자기 저렇게 젊은 장로가 생겨났는데 당연히 고검문에서도 조사를 해보았지요. 뭐 알아내기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동자가 숨김없이 얘기하자 려락이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한 사제가 옛 지인을 만나러 간 일이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정말 황풍곡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면 벌써 돌아갔겠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령호 노괴 같이 간교한 늙은이가 한 수사를 불러냈을 땐 설득할 자신이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요.”

    화룡동자의 말에 려 수사가 드디어 근심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모든 것은 운에 맡겨야겠죠. 한 수사가 돌아가고자 한다면 저와 사형이 잡아둘 수야 있겠습니까.”

    려 수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 * *

    그 시각 한립은 외각으로 빠져 쉼 없이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멈춰 서서 2층짜리 누각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큰 규모의 누각은 아니었는데 정문에 작은 깃발이 달려 있었고 깃발에는 큼지막하게 ‘차(茶)’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누각 앞에는 노란 의복을 입은 축기기 수사 둘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립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자 두 수사가 예의바르고 신속하게 한립에게 예를 취했다.

    “한 선배님을 뵙습니다! 사조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잠시 주저하다 바로 2층으로 향했는데 계단을 오르자마자 텅 빈 공간에서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노란 장포의 노인이었는데 바로 전당에서 방금 헤어진 령호 사조였다. 그는 2층 정중앙에서 홀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한립이 망설임 없이 걸어가 그를 마주보며 앉자 령호 사조가 아무런 말없이 한 손을 뻗어 한립의 잔을 채웠다.

    “이곳에서 직접 담근 영차(靈茶)가 마실 만하니 괜찮다면 들어보시지요.”

    노인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고 한립이 빙긋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영기가 가득한 찻물을 살폈다.

    “과연 좋은 차입니다. 일반적인 영차와는 다릅니다.”

    “허허! 한 수사도 차를 즐기시는군요. 노부가 이곳에서 만나고자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어요.”

    령호 사조가 차분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를 이곳으로 부른 연유가 영차를 즐기고자 함은 아닐 것입니다.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하시지요.”

    “그럼 노부도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한 수사는 다시 황풍곡으로 돌아와 장로를 맡을 마음이 있습니까?”

    “황풍곡으로요?”

    한립은 차를 마시며 겉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노부도 변명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저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려는 겁니다. 기껏해야 20년이면 다하겠지요. 돌아오기만 한다면 황풍곡은 바로 수사의 것이 되는 겁니다. 당시의 일로 지금까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시의 일은 저도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수사의 입장이었다면 혹시 같은 결정을 내렸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미 낙운종에 들어갔기에 굳이 황풍곡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령호 수사께서는 다른 수사를 찾아보시지요.”

    “노부도 수사가 현재 낙운종 장로인 것은 알고 있어요. 허나 낙운종에는 이미 장로가 둘이나 더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장로라 하나 홀로 대권을 장악하는 즐거움만은 못하겠지요.”

    “크게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권력을 차지하려 종문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저 수련할 적당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은 게지요. 대권이니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노인의 말에 한립이 입 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령호 사조가 순간 미간을 좁혔지만 바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한 수사께서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떤 문파의 대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진귀한 영초며 재료도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고 수도계에서의 위상도 달라지지요.

    게다가 이런 것에 전혀 욕심이 없다 해도 황풍곡에 남아있는 이전의 동문들이 가련하지도 않습니까?  원영기 수사가 사라지면 하루아침에 멸문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에요.”

    령호 사조가 인정에 사정하기 시작했다.

    “영초나 재료는 낙운종 장로로 있으면서도 부족함 없이 누리고 있습니다. 수도계의 위상도 허명일 뿐이지요. 또한 종파의 흥망성쇠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수많은 문파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세상 순리이지요. 이전 동문들은 각자의 운대로 살뿐이니 더욱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한립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차분히 웃으며 제안을 거절했다.

    령호가 얼굴이 어두워져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한 수사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노부에게 황풍곡은 이미 천 년 넘게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니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죽는 것으로 황풍곡이 사라지게 둘 생각은 없다는 뜻입니다.

    수사께서 이런 조건에는 흥미가 일 것 같지 않지만 노부의 명이 다하면 지닌 가산을 전부 수사에게 주는 것은 어떠합니까?  수년간 소장하던 귀한 보물들이 꽤나 있으니 앞으로의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령호가 한립이 예상치 못한 조건을 내걸었다.

    “지니고 있는 보물들을 모두 말입니까?  기억하기로는 황풍곡에 제자들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립이 이번에는 마음이 흔들려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인을 응시했다.

    “제자들 중 수행이 가장 높은 아이가 겨우 결단 중기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보물을 남겨줘 봐야 화근이 될 뿐이지요. 만일 수사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물건을 따로 처리해 황풍곡에 남겨 두지는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한립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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