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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04화 (161/2,000)
  • # 404

    404화. 천극문(天極門)

    모패령도 사내의 목소리를 듣곤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황급히 해명했다.

    “공자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 자는 천극문 어느 장로 문하의 제자인데 어느 날 저를 보고는 그 뒤로 계속 저럽니다. 분명 공자님의 시첩이라고 밝혔음에도 저러니 당장 나가 돌아가라 하겠습니다.”

    “그런 일이?  려 사형은 알고 있느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담담히 물었다.

    “려 장로님께 고했지만 저 자의 사부인 천극문 장로를 불편해 하는 기색이셨습니다. 모든 것은 공자님이 돌아오시면 다시 이야기 하자고 하셨습니다.”

    모패령은 한립이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자 내심 한숨을 돌렸다.

    “오, 천극문! 정도맹의 사대문파 중 하나이지. 려 사형이 조심스러워 할 만 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한들 겨우 결단기 수사가 이리 소란을 피우다니 담도 크구나. 나가서 무슨 의도로 저러는 것인지 한번 보자꾸나.”

    “존명!”

    한립이 먼저 방을 나섰고 모패령이 단아한 자태로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모 수사, 드디어…… 헛! 선배님은…….”

    누각에서 내려오는 인영을 보고 청년은 여인인 줄 알고 좋아하다가 한립을 보고 멈칫했다. 그의 수행을 알아본 것이다.

    모패령은 그 뒤를 조용히 따라 나와 한립의 곁에 섰다. 백서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 표정이 연달아 바뀌었다.

    “천극문 제자라고?”

    한립이 약간 굳은 얼굴로 청년을 향해 물었다.

    “예, 완배는 천극문 로 장로님의 문하에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혹시 한 선배님이십니까?”

    백서군은 제법 배짱이 있는지 원영기 수사를 앞에 두고도 점잖고 예의 바르게 질문까지 던졌다.

    “네 생각에는 누굴 것 같더냐. 무슨 일로 내 시첩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지?  이런 멍청한 일을 하는 것은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텐데.”

    한립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맞습니다. 사실 사부님이 선배님을 뵙고자 하시는데 소식이 없어 완배가 이런 무례를 저지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모 수사를 좋아합니다. 선배님께서 제 소망을 이루어 주신다면 감격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네가 감격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 난 내 시첩을 누군가에게 양도하는 습관이 없으니 헛꿈 꾸지 않는 게 좋을 게야. 그리고 나와 천극문은 아무런 왕래가 없는데 갑자기 보자는 연유가 무엇이지?”

    한립이 어딘가를 쳐다보며 피식 웃는데 동시에 몸에서 엄청난 영기의 압력이 뻗어 나왔다.

    놀란 백서군은 그의 압력에 저항해 몸을 일으키려 해보았지만 덜덜 떨리기만 할 뿐 조금도 몸을 펼 수가 없었다. 결국 휘청거리며 물러서다 무릎을 꺾었는데 하얀 인영이 허공에서 나타나 청년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그러자 백서군은 겨우 한립의 압력에서 벗어나 제 자리에 설 수 있었다.

    희끗희끗한 백발의 백의 장포 노인이 단정한 이목구비와 자애로운 표정을 하고는 한립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한 수사 화내지 마시지요. 모든 것은 노부가 제자에게 시킨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만나 뵐 수가 있어야지요.”

    “누구시며 저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귀 문과는 그간 왕래가 없었을 텐데요.”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한립이 영기의 압력을 감쪽같이 거두었다.

    “허허! 노부는 로위영이라 하고 천극문에서 장로 자리를 하나 맡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수사를 만나고자 한 이유는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 어려우니 오늘 밤 따로 만나시죠! 그때가 되면 한 수사도 상황을 이해할 겁니다.”

    로 장로는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손을 저어 미리 준비해온 녹색 옥간(玉簡)을 날려 보냈다.

    한립이 무표정하게 소매를 펄럭여 푸른 기운을 내보냈다. 옥간을 가져와 내용을 확인하니 위치가 기재되어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물으려는데 노인은 재빨리 포권을 하고는 제자를 데리고 사라졌다.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상대방은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계속 전천성에 있었지만 일부러 만나기를 피했다는 듯.

    한립이 턱을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생각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이 일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모패령을 데리고 누각으로 돌아갔다.

    “려 사형은 지금 어디 있지?”

    “전방의 상황이 긴박하여 대책을 상의하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대책을 상의한다?  어디에서 회의를 하는 것이냐.”

    “전천성의 의사대전(議事大殿)에서 회의가 이뤄진다고 합니다. 듣기로는 원영기 이상의 수사만 참석할 수 있다는데 공자께서도 가보시겠습니까?”

    ‘의사대전!’

    한립이 낮게 읊조리며 전에 봐두었던 전천성 한 가운데의 거대한 전당을 떠올렸다. 금제가 겹겹이 둘러진 그 전당이 모패령이 말하는 의사대전일 것이다.

    “안 그래도 법사에 관한 소식을 알아보려던 참이니 다녀오마. 너는 여기서 머물며 기다리거라.”

    한립은 이미 생각해 놓은 일정이 있기에 려 사형의 행방을 듣고는 바로 누각으로 떠났다. 의사대전은 전천성 정중앙에서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기에 찾기 쉬웠다.

    구국맹의 존망과 관련된 중대한 일이 아니고서는 이 건축물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100년 만의 모란족 침공 소식을 들은 구국맹은 주저 없이 의사대전을 개방해 회의 장소로 제공했다. 몰려오는 법사들의 기세를 구국맹이 꺾기에 어려웠던 것이다.

    한립이 의사대전 앞에 이르자 정문을 지키던 수위가 그의 수행을 알아보고 이름을 물어 얼른 안에 보고했다.

    잠시 후 한립은 또 다른 수사의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었다. 대전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겨우 열댓 명에 불과했다.

    그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수였으나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었다.

    전천성에 머무는 원영기 수사들이 많다하나 그들은 각기 다른 거대 세력에 속해 있었다. 그들 중 몇을 대표로 보내면 될 뿐 전부 와 있을 이유는 없었다.

    려 장로가 탁자의 좌측에 앉아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익숙한 얼굴의 화룡동자가 붙어 있었다.

    다른 이들은 노란 장포의 노인을 제외하면 모두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한립이 노란 장포의 노인을 잠시 보다가 속으로 탄식을 했다. 그는 이전 황풍곡에서 보았던 령호 사조였던 것이다.

    령호 노인은 한립을 보고서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겨우 축기기 수사였던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립은 곧 다른 이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는데 대전의 정중앙에는 시퍼런 얼굴의 노인과 화려한 외모의 궁장차림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립이 그들의 수행을 확인하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둘 다 원영 중기의 수행인 것이 회의를 주관하는 이들인 것 같았다. 한립이 대전에 앉은 수사들을 훑어볼 때 그들도 갑자기 나타난 젊은 청년을 살피는 중이었다.

    대부분 그의 외모를 보고 의아해 했다. 남수사 중에서 젊음을 유지하는 비술이나 관련 공법을 익히는 이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제, 드디어 돌아왔군. 이리와 앉지. 오 종주님 그리고 다른 수사들과 모란족 일에 대해 상의를 하는 중이었네.”

    려 수사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반겼다. 옆의 화룡동자 역시 웃는 낯으로 그를 보았다.

    한립이 평온한 얼굴로 전당 내의 여러 수사들에게 포권을 해보이고는 려 수사 옆 나무 의자에 앉았다.

    “아, 낙운종 한 수사시겠군요. 저는 패엽종(貝葉宗) 오붕이라 합니다. 려 형에게 들으니 겨우 200년 만에 원영기에 이르렀다던데, 천남에서 보기 드문 기재십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가 됩니다.”

    시퍼런 안색의 수사가 그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말을 걸어왔다. 비록 현재 한립의 수행은 조금 처지지만 잠재력으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운이 좋았을 뿐인 것을요.”

    패엽종은 구국맹에서 화의문과 함께 가장 큰 수도 종파였다.

    한립이 몇 마디 겸손을 떨고는 노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인이 패엽종 수사라면 그 옆은 화의문 수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과연 그의 시선을 보고 오붕이 헛기침을 하며 소개했다.

    “아, 이쪽은 화의문 척 부인이십니다. 저와 더불어 잠시 구국맹 관련 사무를 맡고 계시죠. 또 다른 분들은…….”

    노인이 전당 내에 모인 이들을 차례로 한립에게 소개해 주었다. 령호 사조의 차례가 되었을 때 노인은 무표정하게 대답을 하고는 특별한 언동은 하지 않았다.

    한립은 의아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를 마친 오붕이 다시 정색하며 본론에 들어갔다.

    “한 수사께서 적시에 회의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저희는 지금 법사들의 세력이 예상을 초월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전방에 나가있는 여 장로 등이 또 대패했다더군요. 심지어 주요 거점 중 두 곳의 결계마저 상대가 거대 요수를 부려 뚫었다고 합니다.

    저희 쪽 사상자가 적지 않고 암영종(暗影宗) 풍 수사는 전투 중에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벌써 전투에서 원영기 수사를 두 명이나 잃었습니다. 이번 모란족의 기세가 심상치 않고 밀고 들어오는 속도도 빠르니 여러분의 협력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패엽종 수사가 심각한 전세를 거론하자 다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오 종주, 그건 우리도 알고 있는 소식입니다. 전방에서 법사들과 대전을 하는 수사들 중에는 귀 맹의 제자들 뿐 아니라 교대로 파견을 나간 각파의 제자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풍 수사가 어떻게 당했는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오 형께서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원영기 수사들이 연달아 죽어나간다는 것이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설마 상대 쪽에서 벌써 대량의 고계 법사들을 내보냈단 말입니까?”

    푸른 장포를 입은 노인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는데 목소리가 탁했다.

    한립이 보니 방금 오붕이 소개해준 마도 어령종 장로였다. 그는 류옥이나 함운지와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고계 법사들은 아직 정식으로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풍 수사와 그 전에 명을 달리한 신 수사 또한 전부 상대 법사와 일대일 대전 중에 그리된 것이지 협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붕이 녹의 노인에게 난감한 얼굴로 설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원영 중기 법사를 만나도 달아나는 것은 가능할 텐데……. 설마 모란족 중에 신사(神師)가 나선 겝니까!”

    “그도 아닙니다. 그저 원영 초기의 법사들이었어요. 허나 두 명의 법사 모두 이상하기는 합니다. 영술의 위력이 너무 강해 평범한 법사를 훨씬 초월하고 괴상한 보물을 사용하는데 심지어 패배해 달아나려는 수사의 원영이 순간이동을 못하게 붙들어 놓았다더군요.”

    오붕도 이런 질문을 받을지 예상했다는 듯 탄식하듯 이야기했다.

    “원영이 순간이동을 못하게 막는 보물이라니. 고보랍니까?  아니면 법보랍니까?”

    어떤 수사가 그 말을 듣고 놀라 끼어들었다. 한립을 포함한 다른 수사들도 안색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원영기 수사를 죽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원영 때문이었다. 원영으로 육체를 빠져나와 순간이동을 펼치면 순식간에 달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막을 수 있는 보물을 지닌 법사들이라니 놀라웠다.

    “구체적인 정보는 대전을 지켜본 본 맹 제자들도 확실하게 알아내지 못했답니다. 다만 손을 뻗으니 검고 붉은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었다고 하던데…….”

    “오 종주님 지금 상황에서 못할 말이 무엇입니까.”

    녹의 노인이 그가 주저하는 것을 보며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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