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
403화. 전천성으로의 복귀
아래쪽에서 붉은 달을 바라보던 한립도 기분이 이상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흠칫 놀랐다. 여인이 남궁완의 륜회신광을 두려워하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장장 일다경이 지나고서야 남궁완의 창백해진 얼굴과 함께 붉은 달이 저물었다.
파리한 여인은 자운두에 감싸여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얼굴에 괴이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어떻게 된 거요?”
한립이 조금 놀라 물었다.
“륜회신광에 갇힌 수사는 원영으로 뚫고 달아나려 해도 그럴 수 없어요. 강력한 미혼(迷魂) 작용에 잠시 정신을 잃을 뿐이죠. 이렇게 해야 목숨을 빼앗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원영기 수사의 원영이 빠져나오지 못하다니 당신 사저가 꺼려할만 하오. 하지만 꼭 살려둬야 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죽이면 됐을 텐데.”
“엄월종 대장로인 사저를 죽이다뇨. 그건 안 돼요! 내가 사라지면 안 그래도 엄월종의 기세가 크게 꺾일 텐데 그녀까지 죽으면 본 종의 미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오래 전 엄월종 대장로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있으니 종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희생하진 못해도 멸문으로 이끌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사저는 사정 봐주지 않고 금제를 걸어 당신을 연금 시켰소.”
“상관없어요. 그녀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 걸로 내가 사문에 입은 은혜를 갚는 셈 치겠어요. 그래야 떠나서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죠! 그래도 아까는 정말 위험했어요. 혈마검과 같은 역천의 마기를 지니고 있을 줄이야. 미리 알았다면 절대…….”
남궁완의 눈빛이 일렁였다. 한립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한립도 그런 기색을 알아챘지만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다.
“금제 영패를 챙겨서 어서 하산 합시다.”
남궁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하지 않았다.
옆에서 기다리던 은월이 손을 터니 자운두가 풀어지며 파리한 여인이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남궁완이 다가가 그녀에게 먼저 몇 가지의 금제를 걸고는 청록색 저물대를 풀어 뒤집었다. 대량의 물건이 쏟아지자 한립이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갔다.
곤심술 영패는 찾기가 쉬워서 남궁완이 제일 먼저 그것을 들고 기뻐했다.
그리고 한립이 무엇을 보았는지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작은 반지가 날아왔는데 무광의 새까만 가락지였다.
“그건 왜요? 평범한 법기 같은데.”
한립이 남궁완의 물음에 웃으며 저물대를 뒤져 옥함을 꺼냈다. 푸른빛이 반짝이고 열린 옥함 안에는 사저의 저물대에서 찾은 것과 똑같은 가락지가 들어있었다.
“어?”
남궁완이 의아해하자 한립이 두 반지를 한 데 놓고 비교해 보았는데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거침없이 검은 반지들을 챙겨 원래의 옥함에 넣어 보관했다.
남궁완이 빙긋 웃고는 무슨 생각에선지 쌓여있는 물건을 두고 파리한 인상의 여인에게 걸어갔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붉은 빛이 도는 손으로 여인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한립은 그녀의 의도를 알 것 같아 지켜보았다.
과연 붉은 빛이 가시고 남궁완의 손에는 핏빛의 작은 검이 들려있었다. 바로 혈마검이었다.
“이 마기는 위력이 커서 우리에게 위협이 되니 가지고 가요. 어차피 난 필요 없으니까 당신이 가지고 있으면 되겠네요. 아까 본 금빛 기운과 상극인 것 같으니 만일에 대비해야죠!”
남궁완이 손에든 검을 보며 고개를 젓더니 한립에게 넘겨주었다.
한립은 혈마검의 자세한 내력은 몰랐지만, 마기를 역류시킨다니 남궁완이 쓰게 둘 수는 없었다.
그가 혈마검을 거두고 다른 물건들은 파리한 여인의 체면을 보아 남겨 두고 떠나기로 했다.
어쨌든 응광보경 같은 법보는 사저가 오래 사용했으니 수도계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때 남궁완이 금제 영패를 양 손 사이에 두고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붉은 빛이 반짝이더니 칠흑 같은 검은 기운이 솟아오르며 영패는 사라져버렸다.
“곤심술도 해결 되었네요. 가기 전에 사저에게 몇 마디만 남길게요.”
남궁완이 금제를 해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한립도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고. 바로 그녀가 품에서 하얀 옥간을 꺼내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옥간이 반짝이더니 남궁완이 의식을 불어넣었고 사저에게 남길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남궁완은 옥간을 땅에 흩어진 물건들과 함께 저물대에 담아 여인의 허리춤에 매달아 주었다.
“가요. 사저는 륜회신광에 오래 갇혀 있었으니 하루 동안은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녀가 한립을 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한립은 남궁완의 부드러운 시선에 가슴이 뛰었고 그녀의 허리를 잡고 날아올라 빛줄기가 되어 대청을 떠났다.
* * *
“나 혼자 낙운종에 가있으라니 무슨 뜻이에요?”
북량국 국경의 이름 모를 야산에서 남궁완이 나무를 등지고 미간을 좁혔다.
“내 시첩과 낙운종 류 사형이 아직 전천성에 남아 있소. 아마 법사들의 침입으로 인해 그럴 확률이 크겠지. 두 사람과는 인연이 있으니 데리고 돌아가야겠소. 그들을 모른 척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한립이 남궁완과 나란히 서서 지척에서 그녀의 그윽한 향기를 느꼈다.
“그럼 나랑 같이 가면 되죠. 왜 따로 가냐고요.”
“완, 당신은 엄월종 원영기 수사라 구국맹에서 알아보는 수사들이 많을 것이오. 비록 내가 환형술을 전수해줬지만 수행이 당신보다 깊은 이들에겐 통하지 않을 거요. 그러니 일단 낙운종에 가 있는 게 좋겠소.”
한립이 웃으며 설명하자 남궁완이 코를 찡그리며 근심을 표현했다.
“하지만 당신도 이미 엄월종과 화의문의 눈 밖에 났잖아요. 전천성에 홀로 보내기엔 안심이 안 돼요.”
“안심하오! 내 실력을 보아 알겠지만. 천남에서 수행으로 나를 넘어서는 이는 많겠지만 나를 제압하거나 죽일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을 거요. 게다가 난 낙운종 장로인데 모란족의 침입을 앞두고 구국맹이 무슨 수를 쓰겠소. 또한 당신의 사저는 아마 당신이 옥간에 남긴 대로 지금의 상황에 대처할 거요. 그렇지 않고서야 위무애에게 할 말이 없겠지. 정말 걱정할 것 없소.”
“그럼 더는 말리지 않을게요. 그래도 조심해야 해요? 아무리 그래도 걱정은 되니까 이건 가져가고요.”
결심이 굳은 한립을 보고 남궁완은 더는 설득하지 않았고 대신 저물대에서 손수건 같은 것을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
한립은 손수건에 이상한 영기를 감지했다.
“종파 밖을 유람하다 얻은 고보인데 사용하기 무척 편해요. 생각만으로도 자동으로 날아와 몸을 보호해 주니까요. 위험한 상황이 있을지 모르니 챙겨둬요. 그래야 나도 안심하죠.”
남궁완은 이미 아내처럼 그를 챙기고 있었다.
한립이 조용히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응시하자 남궁완이 두 뺨을 붉혔다. 남궁완은 담담히 미소 짓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소매 속에서 붉은 빛의 옥패를 꺼냈다.
“이건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벽화패(闢火佩)예요. 예전에 거둔 기명제자가 몇 있는데 엄월종 제자들은 아니에요. 그 중 두 명이 전천성에서 각각 가게를 하니 일손이 필요하면 이걸 보여요. 그럼 무슨 일이든 분부대로 따를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가 그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한립은 그녀의 관심과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지며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 * *
한 달 후, 한립은 홀로 전천성 밖의 황무지에 떠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거대한 성을 보며 그는 침묵했다.
그날 남궁완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묵묵히 우국으로 날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오던 중 수사 대군이 풍원국과 우국의 변경에서 정식으로 대전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결과는 구국맹 주력의 연전연패였고, 세 번을 진 끝에 강력한 진법의 힘을 빌려 몇 군데 주요 거점만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구국맹이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립은 소식을 듣고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아무도 정확한 정세와 패배 원인을 몰랐다. 그저 직접 와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국에 진입해서야 더 구체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모란 법사들이 어디선가 만황시대의 거대 요수들을 구해와 구국맹 수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놀란 한립이 밤낮 없이 길을 재촉해 지금에서야 전천성에 당도했다.
지금의 전천성은 비행을 금지하는 금제는 거둬들였지만 대신 상원멸광진(上元滅光陣)을 다시 가동하고 있었다. 거대한 석조 성곽 전체가 기이한 영기의 파동으로 아른거렸다.
보아하니 구국맹의 수사들이 전시 체제에 들어간 것 같았다.
조용히 살펴보던 그가 몸을 날려 성문으로 날아갔다. 입구를 지키는 수사들은 결단기 노인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축기기에 불과했다.
그가 눈부신 광채를 보이며 날아오자 결단기 노인의 안색이 달라졌다.
“동맹에 참여해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알 수 있을 지요? 완배가 이곳을 책임지고 있기에 확인을 해야 해서 그러합니다.”
노인이 푸른 빛줄기가 가시고 나타난 수사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동맹? 무슨 말이지?”
“동맹에 참여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십니까? 설마 산수신가요?”
“아니다. 천도맹 수사다.”
“모란족들의 기세가 흉흉하여 저희 구국맹만으로는 막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각기 다른 세력에 동맹을 요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천도맹 수사시라면 이름과 종파만 알려주시면 성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천도맹, 한립이다.”
이름을 말해주며 한립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노인이 한립의 이름을 듣고는 검증할 생각도 없이 연신 감사를 표하더니 그를 공손히 안으로 안내했다. 한립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분히 성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천성 안에 들어가자 교역회 때와는 무척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수사들이 줄었음은 물론이고 다들 근심 어린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 초반에 연달아 패전했다는 소식이 떠도는 모양이었다.
한립은 곧바로 자신이 머물던 거처로 향했다. 모패령과 려 사형이 떠나지 않았다면 거처를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 누각 앞에선 그는 미약한 영기파동을 느꼈는데 바로 모패령이었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소리 없이 금제를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자,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그를 보자마자 모패령이 반갑게 외쳤다.
“네가 려 사형과 종파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어찌 안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한립이 유감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곧 모패령을 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네가 그동안 수련에 고비를 넘기고 축기 후기에 들 줄은 몰랐구나. 축하할 일이야!”
“신첩 열흘 전에야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자님께서 주신 단약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기간에 이런 진전을 이룰 수는 없었겠지요.”
모패령도 기뻐하며 아름다움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한립이 그것을 보며 코를 문지르고는 차분히 말했다.
“려 사형과 떠나지 못한 것은 모란 법사의 침입 때문일 테고?”
“이미 알고 계셨군요. 저와 려 장로님은 교역회가 끝나는 대로 낙운종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역회가 끝나기도 전에 법사들이 침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죠. 전천성에 머물고 있는 천도맹 수사로서 려 장로님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세력과 대책을 마련해야 했죠. 저도 따라서 남았고요.”
모패령이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네 탓이 아니니 염려 말거라. 다만 려 사형은 그럼…….”
한립이 계속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돌연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모패령이 무슨 일인지 몰라 그를 바라보는데 누각의 금제 밖에서 젊은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모 수사, 있습니까! 저는 백서군이라 합니다. 내려와 얼굴 좀 보여 주시지요.”
“누구지? 최근에 알게 된 인물인가?”
한립이 의식으로 바깥을 훑어보니 의젓해 보이는 결단기 청년이 금제 바깥에서서 담담히 모패령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