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
402화. 혈마검
“사저가 목숨을 걸고 싶지 않다면, 곤심술 영패를 내주고 우리 둘을 보내주면 될 것입니다.”
“흥! 륜회신광의 위력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나를 이길 수 있을 성 싶더냐?”
남궁완의 차분한 언사에도 파리한 여인이 표독한 얼굴로 입에서 핏빛의 검을 뿜어냈다.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 핏빛의 수정으로 만들어진 검에서 괴이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인이 구동하기도 전에 이미 대청 전체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혈마검(血魔劍)! 언제 그런 마기를 얻은 거죠? 사저, 마기의 역류가 두렵지도 않은가요?”
남궁완이 핏빛 검을 알아보고 싸늘하게 여인을 응시했다.
“역류? 사매, 그럴 틈도 없이 끝내 줄 테니 쓸데없는 걱정 말게! 이걸로 공격하는데 오래 걸릴 리가 없지. 마지막으로 묻겠네. 본 종의 번영을 위해 위리진과 혼인 하겠나? 일단 혈마검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나도 완벽히 위력을 조절할 자신이 없으니 빨리 선택 하라고.”
파리한 여인의 말투에서 혈마검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물을 것 없습니다. 완이 엄월종을 위해 희생하겠다고 해도 내가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시죠.”
한립이 혈마검을 보고는 담담히 말했다. 마치 그런 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죠? 수행으로 보아 무명 잡졸은 아닌 것 같은데. 완? 사매를 그렇게 경박하게 부르다니……. 사매가 지금까지 혼인하지 않겠다고 고집한 이유가 전부 당신 때문이었군요.”
파리한 여인의 눈에 냉기가 서리며 한립을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소. 혈마검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는 모르나 전혀 두렵지 않으니 곤심술 영패를 내놓고 우리가 떠나게 두시오. 너무 자신만만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한립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대청을 울렸다.
“두렵지 않다? 혈마검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그리 말하다니! 일단 당신을 죽이고 남궁 사매를 설득해야겠군요.”
파리한 여인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어 사납게 혀를 깨물어 정혈 한 모금을 울어대는 핏빛 소검에 먹였다.
그러자 작은 검이 핏빛을 반짝이며 삼 척 길이로 커지더니 피비린내와 요사스러운 빛이 더욱 강해졌다. 여인이 거침없이 그 흉물스런 검을 잡고는 전신의 영력을 불어넣었다.
“이런, 먼저 공격해야 해요. 절대 공격하게 두면 안 돼요!”
남궁완이 초조하게 한립을 향해 외쳤다.
혈마검의 무서움을 잘 아는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직 응집하지 못한 륜회신광을 신속히 가리켰다. 반월(半月) 모양의 거대한 빛 무리가 진동하며 쾌속으로 돌기 시작했고 잠시 후 빛줄기를 뿜어냈는데 무지개처럼 화려했다.
긴 꼬리를 남기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빛줄기에 파리한 여인이 방금 꺼낸 삼각형 깃발을 쏘아 보냈다. 깃발이 여인의 손을 벗어나자마자 음산한 분위기의 청록색 안개를 방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기다란 빛줄기가 승천하는 용처럼 날아왔지만 청록색 안개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청록색 안개는 마치 시체를 파먹는 구더기처럼 여인의 조종에 따라 끊임없이 빛줄기를 파고 들었다.
이에 남궁완의 안색은 급변했고 파리한 여인은 미미하게 기쁨을 드러냈다.
여인이 손에 든 장검을 휘둘러 한립의 머리를 향해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허공이 미친 듯이 요동치더니 한립의 머리 위로 사악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핏빛의 검기가 떨어져 내렸다.
검을 휘두른 파리한 여자는 즉시 정기를 빨리기라도 한 듯 안색이 나빠졌고 손에서 빛을 뿜어 원래 크기로 변한 혈마검을 회수했다.
검기는 떨어져 내리며 중력처럼 주변의 영기들을 흡입했다. 그런데 한립이 그것을 지켜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검기가 나타난 순간 구속을 당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곧 피비린내가 덮쳐왔다.
그 순간, 남궁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파리한 여인은 비웃음을 머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꽈릉! 콰쾅!
벼락이 내리치는 소리와 금빛이 터져 나오며 금빛의 전호(電弧)가 한립의 전신에 나타났다. 파리한 여인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핏빛 검기는 이미 금빛 그물을 가르고 있었다.
쿠콰콰쾅! 파츳! 츠츠츠츳!
거대한 울림과 빛, 피비린내가 동시에 퍼져나갔다.
엄청난 기운의 검기가 금빛 그물에서 허덕이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금빛 번갯불로 엮인 얇은 그물을 도저히 끊어낼 수가 없었다.
도리어 금빛 그물이 조금씩 검기를 감싸 대어를 잡은 어부처럼 포획에 들어갔다.
한립이 느끼던 구속은 벽사신뢰가 변한 금빛 그물의 출현과 동시에 자연히 사라졌다. 그는 지금 의아한 눈빛으로 금빛 그물을 보고 있었다.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벽사신뢰로 형성된 그물은 핏빛 검기를 가두기는 했어도 스스로 조금씩 소모되는 중이었다. 만일 단번에 전신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벽사신뢰를 방출하지 않았다면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벽사신뢰가 완전히 제압할 수 없는 마기나 사기가 있다는 소리를 한립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장기간 놔두면 검기를 감싼 벽사신뢰의 대부분을 잃게 될 것이다.
한립이 얼굴을 굳히며 두 손을 뻗어 더없이 굵직한 번갯불을 양손에서 분출했다.
금빛 번갯불의 맹공에 검기가 울부짖음을 멈추고 작은 핏빛 안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립의 손짓에 따라 금빛 그물이 핏빛 기운을 동그랗게 말아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들고 한립이 무표정하게 파리한 여인을 응시했다.
여인은 생각하지 못한 결과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혈마검을 이용한 일격을 이렇게 간단히 막아내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이 검은 천남에서 갑자기 출연한 이후 아무도 고보인지 법보인지 정체를 몰랐다. 고보처럼 주인을 인식하게 할 수는 없어도 법보처럼 체내에 흡수할 수 있어 그 위력이 굉장했다.
혈마검을 휘두르기 전에 피하는 것 외에는 막을 방법이 없는 극강의 무기였다. 웬만한 공법이나 법보로 막으려 해봤자 십중팔구는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 났다.
물론 그것을 사용하려면 대량의 정혈과 원기를 소모해야 하고 마기의 역류를 당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짧은 시간이라도 이 검을 운용하면 점점 체내의 진원이 마성으로 물들고, 그게 누적되면 마기 역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성을 상실하고 완전히 마성에 잠식되어 날뛰다 죽게 되는 것!
이런 유형의 보물을 통틀어 천남 수사들은 마기(魔器)라고 명명했다.
한립은 멍하니 서있는 두 여인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주술을 외쳤다. 허공에 떠있던 금색 비충들이 웽웽 거리며 엄청난 기세로 파리한 여인을 덮쳤다.
이에 여인이 분노하며 입에서 검을 뿜어냈다. 그녀의 양손이 재빨리 수결을 맺자 은색 검에서 빛이 범람했다.
퓨퓨퓨퓨퓨ㅤㅍㅠㄱ!
은색 검이 부들부들 떨더니 급작스레 수천 개의 가은 은사로 변해 터져나갔다.
“화검위사(化劍爲絲)로군.”
한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알고 보니 그녀는 검 기반 공법을 익힌 검수(劍修)였던 것이다.
‘그러니 비검 법보가 저리 많았지.’
수천 가닥의 은사와 금색 날벌레들이 충돌했다.
피피파파팍!
날카롭지만 엄청나게 큰 소리가 쾌속으로 울려 퍼지며 금빛의 서금충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보고 한립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심혈을 다해 키웠건만 아직도 원영기 수사에게는 안 된단 말인가?
은사들은 금빛 서금충 무리를 빠져나와 다시 솟구쳤고, 당연히 또 한 번 대량의 서금충들이 떨어져 내렸다.
파리한 여인이 그것을 확인하고 내심 안도했다. 대량의 비충들이 죽어나가자 위력이 변변치 않다고 여긴 것이다.
반대로 한립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닥에 떨어진 비충들을 의식으로 훑고는 희색을 드러냈다.
웨앵! 웽웽웽웽!
동시에 죽어 나동그라진 줄 알았던 서금충들이 꿈틀했고 또 다른 무리를 만들어 파리한 여인의 보호막으로 몰래 다가갔다.
게다가 그때 녹색 안개 속에서 봉황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며 빛이 번졌다. 모든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고 새빨간 반달 모양의 빛무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빛무리가 번쩍이며 파리한 여인의 보호막을 공격했다.
대경실색한 여인은 보호막 속에서 훽하고 돌아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빛줄기로 변해 동굴의 천장으로 솟구쳤다.
혼자서 두 사람을 상대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여인은 이곳을 빠져나가 다른 이들을 부를 생각이었다.
아무리 한립과 남궁완이 대단해도 수천수만 명의 엄월종 제자들과 싸울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또한 엄월종을 지키는 대규모 진을 가동하면 아무도 단시간에 빠져 나갈 수 없다.
남궁완의 새빨간 반월 빛무리가 쫓기도 전에 흑백의 빛줄기가 호선을 그리며 천장에 도착했다.
펑!
호된 일격에도 천장이 뚫리지 않고 파편만 떨어져 내렸다.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세 가지 색깔의 비충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나와 거대한 방패 모양으로 응결했다.
여인이 고민 없이 은색 부적을 불러냈다.
남궁완이 밑에서 지켜보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닫고는 어두워진 얼굴로 륜회신광도 돌보지 않고 저물대에서 붉은 진법 깃발을 꺼내들어 바닥에 꽂았다.
스르륵.
깃발이 붉은 연기로 변해 땅에 스며들었다.
파리한 여인이 즉시 수중의 부적을 발동해 노란 빛에 휩싸여 방패와 충돌했다.
파칫!
노란 빛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 거대한 방패를 지나 천장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남궁완의 주문도 끝나 동굴 전체에 숨겨진 강력한 금제가 작동했다.
대청 전체가 붉은 빛으로 반짝이더니 벽은 물론이고 바닥과 천장까지 눈부신 빛의 장막으로 둘러 싸여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파리한 여인은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노련하게 이게 어떤 종류의 금제인지 생각해냈다. 그녀가 노란빛 속에서 손을 뻗어 하얀 검기를 분출하니 붉은 빛이 잘려나갔다.
파리한 여인이 희색이 만연해서 금제를 뚫고 나가려는데 신형이 절반도 사라지기 전에 눈앞이 자홍빛으로 반짝이더니 무언가에 감싸여 강제로 끌려 나왔다.
그 후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하얀 빛이 어른거리고는 백의를 입은 매력적인 자태의 여인이 천장에서 나타났다.
그녀는 한 손으로 수정처럼 반짝이는 자홍색 끈을 쥐고 있었는데 다른 쪽 끝이 파리한 여인의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엄월종 대장로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둘러싼 자홍색 망태기를 발견했다. 이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하고 있었다.
분노한 여인이 열손가락을 튕기며 십여 개의 흑백 검기를 분출했고 그마저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입을 벌려 녹색 화염까지 뱉어냈다.
그러나 은은한 자색이 크게 번지며 흑백 검기는 물론이고 녹색 화염에도 망태기의 망사 천은 멀쩡했다.
파리한 여인이 당황하며 원기를 크게 허비하는 비술을 펼치려는데 백의 여인이 웃으며 손에든 자색끈을 붙들었다.
“잡아라!”
원래 어느 정도 느슨했던 망태기가 일순 쪼그라들며 안에 갇힌 수사를 움직일 수 없게 구속했다.
파리한 여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원영을 응결하고 항상 경외심 어린 시선만을 받아 왔는데 중기에 이르러서 이런 수모를 당할 줄이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여인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영력을 끌어올렸다.
은월이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상을 감지하고 자운두가 머금은 옥양진화를 일으키려는데 남궁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숨을 취하지는 말고, 내게 넘기면 된다.”
곧 붉은 만월(滿月)이 솟아올라 파리한 여인을 휘감았다.
저속에서 고속으로 돌며 붉은 기운을 뿜어내는 둥근 달빛이 대청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