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401화 (158/2,000)
  • # 401

    401화. 간파

    낙일전은 역대 엄월종 대장로들이 기거하던 공간이었다. 반드시 영안이 있는 곳에 지어야 하며 금제가 첩첩이 쌓여있어 극소수의 장로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허락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쉬익!

    이때 멀리서 붉은 빛이 날아들어 낙일전 금제 바깥을 맴돌다가 놀랍게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대전 안으로 사라졌다.

    붉은 빛은 몇 층의 금제를 뚫고 돌고 돌아 어떤 석실 속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수려한 외모의 여인이 자리에 앉아 수련을 하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의 여인은 몸에서 은은하게 한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붉은 빛이 그녀 앞까지 도착하자 천천히 눈을 뜬 여인이 미간을 좁히며 손을 뻗었다. 동시에 붉은 빛이 주먹만 한 화염으로 변해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냉랭한 여인의 손에서 화염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무슨 바람이 불어 나를 불러들이는 게지?”

    여인의 주변에 급작스레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하얀 빛줄기가 되어 낙일전을 빠져나갔다. 빛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궁완의 처소 앞에 도착했고 주위를 살핀 그녀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이미 이곳의 금제들은 거의 없앴기 때문에 별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제야 마음을 놓고 석문을 향해 하얀 법결을 쏘아 보내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너무 하얘서 파리해 보이기까지 한 여인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사조님을 뵙습니다.”

    석문 안에서 곧 노란 의복을 입은 소녀가 나타나 예를 갖추었다.

    “저번보다 수행이 늘었구나. 내가 준 단약을 복용하며 수련에 매진한 모양이군.”

    파리한 여인이 의식으로 소녀를 훑고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나아갔다.

    “모두 사조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자의 성취가 이렇게 빠를 수 없었을 겁니다.”

    소녀가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그녀를 뒤따랐다.

    “알면 되었다. 남궁 사매는 조용히 지내더냐.”

    “남궁 사조님은 오늘 어떤 제자를 만나신 것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으셨습니다.”

    “이미 람 사숙을 통해 들었다. 무슨 선물을 전하러 온 제자라지?  돌아갔더냐?”

    “예. 저계 관사 직무를 맡은 제자이온데 이미 한참 전에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남궁 사조께서는 선물을 받으신 이후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소녀의 공손한 대답에 여인이 흥미를 보였다.

    “호오?  어떤 물건이기에 사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지?”

    “별 것은 아니고 은색 검 법기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는 심란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 남궁 사매가 종파 밖에서 만났던 산수와 관련 됐겠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예, 남궁 사조님께서 은검을 받으시고 고심하시다가 방금 전음부를 날리신 것입니다.”

    “남궁 사매의 마음을 바꾸게 할 만 자가 있다니, 흥미롭구나! 앞으로도 계속 일거수일투족을 주시 하거라. 네게 준 고계 영부의 능력이면 법력을 봉인 당한 사매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다. 이 일만 잘 처리하면 단약뿐 아니라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게야.”

    엄월종 대장로의 당부와 함께 둘은 대청에 가까워졌다.

    “존명! 남궁 사조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녀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대청 입구로 여인을 안내했다. 파리한 여인이 항상 그렇듯 들어가기 전에 신중하게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는데 안에서 남궁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저, 들어오시죠. 생각해 보라던 문제의 답을 정했습니다. 본 종을 위해 사저의 요청에 응할 것이나 조건이 있습니다.”

    남궁완의 목소리에 사저가 기뻐하며 더 살필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 사매! 잘 생각했네. 정말 잘 됐어! 어떤 조건이든 사매가 화의문 위 장로와 혼인만 한다면 고려해 봐야겠지. 위무애의 힘을 빌려 엄월종이 번영할 수만 있다면 못할게 무엇이겠어!”

    남궁완은 등나무 의자에 정좌한 채 손에 든 볼품없는 은검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파리한 여인이 잠시 멈칫하며 걸음을 늦추었지만 결국엔 대청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그녀가 의아해 하며 남궁완을 향해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돌연 안색이 달라지며 한 팔을 뒤쪽으로 휘둘렀다. 날카롭게 솟은 수 촌 길이의 검기들이 서늘하게 빛났다. 바로 노란 의복의 소녀가 서 있던 자리였다.

    소녀가 여인의 공격에 기이하게 웃더니 몸이 줄어들며 노란 빛이 번뜩였다. 이후 반질반질한 돌바닥에는 소녀의 의복만 남고 소녀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비범한 토둔술을 펼쳐 달아난 것을 한 눈에 파악하고 파리한 여인이 당장 빛줄기로 변해 대청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빛줄기로 변하기도 전에 몇 장 길이의 푸른 거검이 쇄도했다. 여인이 안색이 변해 열 손가락을 맹렬히 펼쳤고 각 손가락마다 한기가 검기처럼 솟구쳐 거검을 공격했다.

    쿵!

    푸른 빛과 하얀 빛이 접전을 하다가 거검과 여인이 동시에 튕겨나갔다.

    여인이 물러나 멈춰 보니, 푸른 거검이 흩어지며 수십 개의 비검으로 변해 한 청년을 둘러싸고 선회하고 있었다.

    사내가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남궁 사매?  방금 옥이인 척 했던 여인은 또 누구고?”

    한립의 수행을 확인한 여인의 얼굴이 더욱 냉랭해졌다. 곧이어 저물대를 스친 그녀의 손에 붉은 영패가 나타났다.

    “금제 영패!”

    한립의 시선이 재빨리 영패를 포착했다.

    “흥! 사매가 벌써 모든 것을 이야기 했군요.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나 우리 엄월종의 일에 끼어들다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파의 추격을 받게 될 거라고요.”

    파리한 여인이 한립을 위협했다.

    “사저도 동문을 이리 대해 놓은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불리해질 텐데요?  게다가 영패를 발동해 날 제어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텐데. 그럴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남궁완이 손에 들어 은검을 회수하고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입에서 즉시 주작환이 뿜어져 나왔다.

    이에 파리한 여인도 얼굴이 음산해지며 소매를 틀어 하얗고 까만 두 자루의 비검을 불러냈다. 비검들이 허공을 한 바퀴 돌며 한 장 길이의 거검으로 커졌다.

    하얀 비검은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품어댔고 검은 비검은 타오르는 화염으로 번뜩였다. 보기 드문 음양빙화검(陰陽氷火劍)이었다.

    냉소한 여인이 붉은 영패를 들고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하자 영패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요사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한립이 그녀가 순조롭게 금제를 발동하게 둘 리 없었다. 즉시 한 손에서 은색 종이 날아올랐다.

    위잉!

    그의 법결이 더해지자 은색 종이 가로로 몸을 꺾으며 파리한 여인을 향해 파동을 분출했다. 동시에 한립이 두 손을 맞붙였다 떼며 붉고 푸른 법결들을 각각 두 개의 기둥으로 쏘아 보냈다.

    곧이어 대청에 펼쳐 놓은 진법이 진동하며 발동하기 시작했다.

    대청의 사방에서 붉고 푸른 안개가 스미기 시작하더니 파리한 여인을 향해 물밀듯이 몰려들며 은색 종의 음파 공격이 여인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위잉!

    파리한 여인이 무심히 두 검을 가리키자 흑백의 거검들이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한기와 열기가 섞인 파동이 몰아쳐 괴이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은색 종의 음파 공격이 괴이한 보호막에 부딪쳤지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방에서 몰려든 금제의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남궁완이 움직였다.

    촤륵!

    주작환이 반짝이더니 거대한 불덩이로 변해 엄청난 기세로 몰려갔고 그와 동시에 남궁완의 손끝이 움직였다.

    새빨간 암기가 불덩이 속에 소리 없이 녹아들어 사라졌다. 한립도 강대한 의식이 아니었다면 남궁완의 이번 공격을 눈치 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보호막 안에서 여인이 낮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사자(誅邪刺)로 날 공격하다니. 이미 다 써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 하나를 남겨두고 있었군, 사매.”

    파리한 여인은 분노해 마치 크게 당했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아직 원기는 충만해 보였다.

    이에 한립이 다른 손을 뒤집자 거무튀튀한 천중봉이 나타났다. 이어 공중으로 떠오른 작은 산봉우리에 몇 개의 법결들이 날아가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때 빛에 가려진 파리한 여인은 잠시 금제의 발동에 신경 쓰지 못하는 듯했다. 주작환이 변한 불덩이가 순간 흉악하게 이를 드러내고는 불 구렁이로 변해 공격을 가한 것이다.

    산봉우리가 이미 대여섯 장 크기로 커진 것을 보고 한립이 공격을 하려는데 멀리서 ‘파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리한 여인을 감싼 불길 속에서 사발 굵기의 빛기둥이 뿜어져 나와 화염을 정리해 버렸다.

    촤르르륵!

    맑은 소리가 울리며 빛기둥들이 서로 엉겨들기 시작했고 새빨간 원형의 고리가 그 안에 갇혀 꼼짝하지 못했다.

    “응광보경(凝光寶鏡)”

    한립이 진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 남궁완이 자신의 공법과 보물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떠올려 보면, 한립이 혈금시련에서 얻었던 법기 청응경은 바로 이 고보를 모방한 일종의 모조품에 불과했다. 본 위력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청응경이 저계 제자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최상급 법기라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오늘 실제로 보니 응광보경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금제에서 뿜어져 나온 붉고 푸른 기운도, 주작환의 화염도 이 빛기둥 앞에서는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겨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파리한 여인은 흑백 복층의 보호막 안에서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다른 한 손으로 거울을 들고 있었다.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거울에서 반사되는 새까만 빛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 끝 모를 어둠 속에서 오색의 빛기둥이 뿜어져 나오니 극렬한 대비가 기이하기도 했다.

    들고 있던 영패는 보이지 않았고 수결을 맺은 손에 얼핏 핏자국이 보였다. 보호막 안에 있는 수사를 피투성이로 만들다니 주사자의 효과가 실로 불가사의했다.

    남궁완의 본명 법기가 응광보경에 의해 제압된 것을 보고 한립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가 조용히 검은 봉우리를 가리키자 천종봉이 몸을 부르르 떨며 사라져 파리한 여인의 머리 바로 위에서 흉흉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래서 검은 봉우리를 올려다본 파리한 여인이 냉소하더니 거울의 방향을 살짝 위로 틀었다.

    그러자 거울에서 빛기둥이 진동하며 둘로 갈라지더니 조금 얇아진 빛기둥 중 하나가 번개처럼 뻗쳐올라 검은 산봉우리의 압력에 맞섰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립은 즉시 수결을 맺어 검은 산봉우리를 멈추고 검은 기운을 분출해 갈려져 나온 빛기둥과 얽혀 들었다.

    검은 기운이 비교적 가느다란 빛기둥을 삼키곤 남은 여파로 여인을 둘러싼 보호막을 공격했다. 이에 보호막이 흔들리더니 영기가 흐트러지며 거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기둥까지 영향을 미쳤다.

    여인은 얼굴을 굳히며 입에서 정기를 뿜어내 거울로 쏘아 보냈다. 산봉우리를 상대하던 검은 빛기둥이 몸집을 키우며 오색찬란한 빛덩이로 변하자 검은 산봉우리의 기운도 더는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남궁완이 그것을 보곤 주작환을 움직였고 동시에 법보에서 봉황의 울음소리가 울리며 몸집을 키웠다 줄였다 했다. 구속에서 빠져나오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세 수사의 진짜 대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세 명의 원영기 수사는 동시에 행동에 들어갔다.

    한립이 영수대를 스치자 무수히 많은 금색 찬란한 비충(飛蟲)들이 솟아올라 공포스러운 장관을 이루었다.

    남궁완 역시 노랫가락처럼 주문을 읊조리니 그녀의 머리 위에 적홍색의 거대한 빛무리가 생겨나 부유했다.

    “륜회신광(輪回神光)! 남궁 사매, 정말 목숨을 걸었군! 감히 륜회신광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파리한 여인도 손에 들고 있던 거울을 머리 위로 띄우고 두 손을 합장해 청록색 깃발을 불러내다 남궁완의 변화를 보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물론 한립이 불러낸 금색 영충 무리도 보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 서금충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