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400화 (157/2,000)

# 400

400화. 곤심술(困心術)

“맞아요, 위리진의 친 숙조가 3대 수사 중 하나인 위무애예요. 위무애는 구국맹 태상 장로로 희귀한 독과 관련된 공법을 익혀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의 목숨을 끊어놓는다고들 하죠. 실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더군요.”

남궁완이 낮은 목소리로 설명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위무애가 당신에게 강요한 거요?”

한립의 입가가 비틀리며 눈빛이 사나와졌다.

“그건 아니지만 관여한 건 사실이죠. 현재 엄월종 대장로는 예전의 그분이 아니에요. 예전에 내 사저였던 수사가 물려받았어요. 사저는 공명심이 강해 평소 나와 불화가 있었고요. 다른 장로가 중재를 하려했지만 관계는 악화만 되었죠.”

남궁완의 온화한 얼굴에 분노가 일었고,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연달아 위리진의 구혼을 거절했더니 그 자가 그 사저를 찾아가 담판을 지은 거예요.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 겨우 반년 후 내가 소녀륜회공법(素女輪回功法)의 윤회 기간에 이르자 사저가 나를 제압하고 혼인을 강요했죠.”

“당신 사저라는 자가 실성이라도 한 거요?  어떻게 동문 원영기 수사에게 그런 짓을!”

듣고 있는 한립도 말문이 막히는 상황이었다.

“내 말이요! 나도 그녀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위리진이 내건 조건이 그만큼 대단한 거였겠죠.

나중에야 알았지만 엄월종은 물론이고 육파 전체가 북량국 밖으로까지 세력을 넓힐 수 있게 협조하고 심지어 혼인 이후 위리진 본인이 화의문을 떠나 엄월종에 들어온다고 약속을 했더군요.

그래서 사저가 내 동의와 상관없이 위리진과의 혼인을 공표하고 혼례까지 일사천리로 준비를 하게 된 거예요. 내가 되돌리고 싶어도 어쩌지 못하게요.”

남궁완이 입 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역시 당신은 원치 않는 혼사였군. 처음부터 말해주지 그랬소.”

한립은 상황을 파악하고 크게 기뻐했다.

“난 오히려 당신에게 묻고 싶은데요?  이미 몇 년 전에 원영을 응결하고도 어째서 날 찾지 않은 거죠?  몇 년 만 아니 1년 만 빨리 찾아 왔어도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잖아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그녀의 타박에 한립이 해명하려 했으나 자세히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하긴 했다.

은연중에 남궁완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직접 만나러 올 생각을 못했을까?  아마 남궁완이 돌연 혼인을 하려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을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이 혼란스러워하자 남궁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비록 오랜 수련을 통해 경험과 능력은 범인을 초월하지만 감정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도 첫걸음을 뗀 거죠. 낯설고 두려운 게 당연해요. 대부분 수사들이 수련의 적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인간적인 감정은 흩어버리거나 마음 속 깊이 묻어 두니까요.

격정적인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고 사라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처음 당신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기뻤지만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이틀 밤낮을 고민한 끝에 마음이 시키는 대로 당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요.”

부드럽게 자신의 마음을 밝힌 남궁완이 손을 뻗어 한립의 손을 잡았다. 이에 한립도 침묵하다 말없이 다른 손으로 그녀의 여리고 부드러운 손을 덮으며 온기를 느꼈다.

남궁완이 부끄러운지 얼른 두 손을 빼고는 눈을 흘겼다. 하지만 한립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완, 여기 갇혀 있으면서도 평온한 것을 보니 그대는 분명 벗어날 방법을 미리 생각해 두었군. 그렇지 않다면 초초해하는 기색이 보였겠지.”

남궁완이 픽 웃으며 영리하게 눈을 빛냈다.

“눈치도 빠른데요?  내가 연금되어 있다는 사실은 몇몇 고위층만 알고 보통 제자들은 몰라요. 그렇지 않았다면 당 사질의 전음부를 받을 수도 없었겠죠. 그들은 내가 달아나지 못하게 몸에 몇 가지 금제를 걸어놓았는데 그 외에 별 다른 구속은 없어요.

하지만 소녀륜회공이 일단 원영기에 이르면 몇 가지 불가사의한 능력이 생긴다는 것은 몰랐겠죠. 그래서 다른 금제들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스스로 풀어 법력을 회복할 수 있는데, 유독 사저가 직접 건 곤심술이 문제예요.

그녀가 혼례 당일 사용하려고 준비한 법술인데, 잠시 동안이라도 나를 조종할 수 있게 자신의 정혈을 써서 금제를 걸었죠. 이 금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금제 영패에요. 그걸 부수지 않으면 백 리 내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비록 그녀와 내 수행 차이가 크지 않아 간단한 동작 밖에는 시키지 못하겠지만요.

“그럼 원래 계획은…….”

“하하! 당연히 혼인 전 감시가 약해지면 법력을 회복할 생각이었죠. 그리고 멀리 달아나 금제 영패의 구속 범위를 벗어나면 그녀라고 어쩌겠어요?  물론 이제 당신이 왔으니 모든 건 당신에게 맡길게요. 들으니 손쉽게 원영기 법사를 해치웠다던데 쓸 만한 수단 한 두 개는 있겠죠?”

남궁완이 홀가분하게 웃어댔다.

“곤심술이라면 확실히 성가시군. 영패를 없애는 것 외에는 간단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오.”

한립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 안 되면 그냥 우리 둘이 엄월종을 멀리 떠나면 그만이에요.”

“겨우 금제 영패일 뿐인데 문제없소. 분명 당신 사저의 수중에 있겠지. 영패를 없애는 김에 당신을 대신해 이 모욕도 갚아 주겠소!”

한립의 눈빛이 싸늘해지며 장담했다.

“그냥 해본 말이지, 정말 영패를 없애 달라는 건 아니에요! 사저는 이미 원영 중기에 이르렀으니 그냥 둘이 몰래 떠나요. 아무리 대단한 금제라도 기껏해야 10년이면 없앨 수 있겠죠.”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를 머금고는 남궁완이 고개를 저었다. 한립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처음 만났을 때의 영민하던 소녀를 떠올렸다.

“상관없으니 시도나 해보겠소. 실패하면 그때 떠나도 늦지 않으니. 내가 보호하는 한 금제의 구속이 있어도 안전하게 떠날 수 있소.”

한립이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음…… 그래요! 당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줄은 잘 모르지만 방법이 있겠죠. 하지만 사저가 머무는 낙일전(落日殿)은 금제가 삼엄하니 내가 그녀를 여기로 불러낼게요. 금제의 도움을 받아 단번에 제압하는 거죠.”

남궁완이 가만히 한립의 두 눈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오. 그런데 거처의 금제를 이용할 수 있겠소?  들어오다 보니 성하지가 못하던데.”

“걱정 마요! 겉으로 보이는 금제들은 사저가 없앴지만 가장 강력한 금제는 들키지 않았으니까요. 그럭저럭 쓸 만할 거예요.”

“그렇게 합시다. 나도 진법 법기들이 몇 벌 있으니 시간을 끌만은 할 거요.”

“진법 법기도 있어요?  그럼 더 좋죠. 반나절만 기다려줘요. 일단 다른 금제들을 풀고 법력을 회복해야하니까 당신은 진법을 설치하면 되겠네요.”

“내가 당신의 사저를 제압하면 엄월종을 움직일 수 있게 될 텐데, 그럼 굳이 달아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아마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엄월종에는 사저 말고도 원영기 사형이 한 명 더 있거든요. 수행도 높은 편이니 내가 명분 없이 대장로에 오르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난 권력 다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안심하고 수련에 정진할 한적한 거처면 족해요.”

남궁완이 주저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나도 됐소.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면 나와 함께 낙운종으로 돌아갑시다. 구국맹 세력이 대단하고 위무애가 위리진을 아낀다 해도 법사들의 침공을 앞두고 천도맹과 원영기 수사 둘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니.”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냉소했다. 그 후 그의 저물대에서 여러 진법 깃발들과 진법 원반들이 나타났다.

남궁완은 그것을 보고는 등나무 의자로 돌아가 정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양 손으로 수결을 맺으면 기괴한 법결을 외기 시작했다.

잠시 후, 새하얀 의복 위로 새빨간 빛이 솟아올라 그녀를 휘감았다.

한립도 바삐 움직였다. 신형이 흔들거리더니 대청의 사방으로 휙휙 이동했고 진법 깃발들이 쉼 없이 날아다녔다. 오색찬란한 빛이 가시고는 진법 법기들이 대청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최고의 위력을 내기 위해 오직 대청 내부에만 설치를 했고 가장 은밀한 것들로 골라 원영기 수사의 의식에도 쉽게 들키지 않게 했다.

그러나 진법 법기들은 모두 결단기 시절 제련한 것이라 원영기 수사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한립이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소매에서 은월의 화신인 하얀 여우를 불러냈다.

“주인님, 저를 다 불러주시고. 안주인께서 질투하실까 걱정도 안 되세요?”

은월이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허, 기령에게 무슨 질투란 말이냐. 이번에 상대하는 원영 중기의 수사는 절대 달아나게 둘 수 없다. 금제의 보조가 있지만 너도 도와야겠지. 중기 수사와 초기 수사의 수행이 천지차이이니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립이 눈썹을 꿈틀하며 여우를 쏘아본 후 진지하게 당부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적시에 이걸 사용해 달아나지 못하게 잡아 두거라.”

한립이 저물대를 훑어 무언가를 은월에게 넘겼다.

“이걸, 제게요?”

은월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래, 나보다야 잘 다루겠지! 내 법력을 허비하느니 네게 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 내주는 거다. 당연히 잠시 빌려주는 것이지만. 어차피 기령의 몸으로 장시간 이 보물을 부릴 수는 없을 것 아니냐.”

“예.”

여우가 조금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손에 든 물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립이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소매 안으로 여우를 불러 들였다.

그리고 다시 대청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어딘가를 내다보았다.

“……!”

망설이던 그가 영수대를 스쳐 대량의 삼색 서금충을 불러냈다.

웽웽웽웽.

머리 위를 선회하는 영충들의 무리에 입을 벌려 푸른 안개를 분출했고, 두 손은 연신 수결을 맺으며 주문이 이어졌다.

웽!

서금충들은 하늘로 솟구쳐 푸른빛을 반짝이면서 대청 천장으로 사라졌는데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한립이 그 모습을 보고 이리저리 살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립이 눈을 감고 술법을 펼치고 있는 남궁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빛들이 소용돌이치며 원형의 붉은 기운을 이루었는데 막 깜빡깜빡 거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대청의 영기가 기운에 이끌려 점점 요동쳤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더니 돌기둥 중 하나에 법결을 쏘아 보냈다. 동시에 푸른 보호막이 생겨나 남궁완 주변을 에워쌌다.

곧 대청의 영기도 안정을 되찾았다.

한립이 그걸 확인하고는 손을 뻗어 등나무 의자를 끌어왔다. 남궁완과 마주 앉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세월 그리워하던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음껏 감상할 좋은 기회였다. 넋을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한립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즉시 그의 신형이 아무 조짐도 없이 모호해지더니 등나무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대청 밖에 숨어 안을 훔쳐보던 누군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벌써 그녀 뒤에서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몰래 보는 중이더냐. 사조의 꾸지람이 두렵지도 않더냐?”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너무 오래 나오지 않아 사조님이 걱정되어…….”

감히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떠듬거리는 여인은 한립을 안내했던 소녀였다. 그녀는 이미 뒤쪽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영기의 압력을 느끼고 덜덜 떨고 있었다.

“오, 그래?  그렇다면 뭐 하러 영은부(靈隱符)까지 지니고 숨어 있느냐. 이렇게 귀한 고계 부적을 겨우 축기기 수사인 네가 어디서 났고.”

뒷짐을 진 한립은 소녀의 뒷모습을 무표정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게…….”

“변명할 필요 없다. 얌전히 나와 들어가자. 네 사조가 법술을 마치면 처리하게 할 터이니.”

냉랭한 목소리에 소녀의 두려움도 극에 달했다.

맹렬히 손에 쥐고 있던 부적을 몸에 부딪치니 순식간에 노란 빛줄기로 변해 동굴의 회랑을 따라 멀어지기 시작했다.

싸늘하게 그것을 지켜보면서도 한립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노란 빛줄기가 채 십여 장도 가지 못해서 공중에서 나타난 분홍색 안개에 갇힌 것이다.

진한 향기가 나는 안개 속에서 소녀의 빛이 사라지더니 그대로 고꾸라져 떨어졌다. 은월이 어디선가 풀쩍 뛰어 내리더니 우아하게 꼬리를 흔들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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