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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98화 (155/2,000)

# 398

398화. 잠입

월국 육파는 구국맹으로 퇴각한 이후 아홉 나라 중 수사들이 가장 적은 북량국(北涼國)에 터를 잡았다.

북량국에 다른 수도 문파가 거의 없는 이유는 수련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서였다. 당장 있을 곳이 없던 육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다 육파는 원래 있던 크고 작은 문파들과 100년 가량 암투를 거친 끝에야 가까스로 이곳에서나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제 육파도 원래의 위세를 많이 회복해서 구국맹 내에서 입김이 세진 참이었다.

엄월종은 육파 중 가장 강력한 종파였기에 그나마 영력이 강한 영맥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량국 서쪽에 위치한 영롱산(玲瓏山)으로 이전을 하며 엄월종 수사들은 무수히 많은 전각과 전당을 새로 새웠고 여러 금제와 거대한 진법을 펼쳐 두었다.

이 영롱산은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가장 아래쪽은 저계 제자들이 거주하며 수련을 하는 곳이었고, 산중턱은 축기기 이상의 제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가장 상층부는 자연히 결단기 이상의 수사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축기기 수사들은 결단기 이상의 고계 수사들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었지만 새로 종문을 재건한지 얼마 안 된 엄월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종 내의 일을 도맡아 하는 관사들 역시 축기 수사들 중에서 뽑았다.

그 중 원곤은 전문적으로 속세의 물품을 조달하는 일을 했는데 유일하게 연기기 수사로 관사의 직무를 맡은 이였다.

이유는 원곤의 가문이 북량국의 토착 가문 중 하나로 육파의 북량국 정착에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 보상으로 엄월종은 종파 내의 크고 작은 관사 직무를 원 가의 후손으로 하여금 맡게 하겠다 약속했다.

원곤은 원 가 가주의 친조카로 연기기 제자 중에서도 자질이 떨어져 앞길이 막막했었다. 그를 위해 원 가 가주가 친히 엄월종 고위층에 부탁해 관사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 후, 다른 수사들이 수행이 낮은 그를 가리키며 수군대도 원곤은 허허 웃어넘기며 나름 관사 일을 즐기며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이날도 원곤은 영롱산을 떠나 자신보다 수행이 떨어지는 연기기 제자 몇 명을 데리고 속세의 상점을 도는 중이었다.

그는 까맣게 몰랐지만 인근의 주루에서 강대한 의식이 퍼져 나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원곤은 할 일을 마치고 두 명의 수하와 성을 떠났다. 바로 영롱산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범인들의 성을 다 벗어나기도 전에 허공에서 은빛이 반짝이며 화려한 미모의 여인이 나타나 웃음을 흘렸다.

“저희는 엄월종 제자입니다. 선배님께서는…….”

원곤이 상대의 출연에 긴장하더니 엄월종의 위세를 빌려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젊은 여인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키득거리더니 입에서 분홍색 안개를 뿜어냈다.

안개가 세 수사를 순식간에 둘러쌌지만 원곤의 변변치 못한 수행으로는 막을 길이 없었다. 세 수사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여인이 소매를 펄럭여 그들을 끌어왔다.

새까만 눈동자로 수사들을 확인한 후, 여인은 그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휙.

하얀 빛줄기는 십 여리를 날아 어느 숲속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청포를 걸친 청년이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다.

빛이 가시고 여인이 청년에게 다가가 공손히 보고했다.

“주인님, 모두 데려왔습니다. 스스로 엄월종 수사라 했으니 잘못 데려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는 않았겠지.”

청년이 눈을 뜨며 담담히 물었다. 그는 밤낮없이 길을 재촉해 단숨에 북량국에 도착한 한립이었다.

몰래 숨어들어 남궁완을 만나기로 결정했으니 불필요한 소동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그러려면 영롱산과 엄월종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이를 위해 엄월종 수사들을 수소문한 것이다.

평범한 저계 수사로 시작해 지금의 수행에 이른 한립은 아무리 수도문파에 속한 이들이라도 속세와 인연을 끊지 못하고 왕래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롱산에서 비교적 근거리에 있는 성에 들어가 기다린 것이다.

본래 점찍어둔 다른 저계 수사가 있었는데 관사 신분의 원곤을 발견하고는 목표를 바꾸었다. 저계 수사라도 관사라는 직함을 지녔으면 아는 바가 더욱 많았기에 은월로 하여금 납치해 오도록 시킨 것이다.

“예! 저들의 수행이 낮아 데려오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다른 고계 수사들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 잘했다. 그럼 네 환술과 내 몽인술을 이용해 아는 것을 모두 실토하게 하자꾸나.”

“존명!”

은월이 몸을 돌려 입술 사이에서 분홍 안개를 다시금 분출했고 그들을 완전히 에워싸 버렸다. 한립 역시 몸을 일으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 속에서 푸른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 * *

영롱산은 이름은 ‘영롱’이었지만 처음 본 사람들은 전혀 산세가 영롱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보다는 육중하고 괴이한 것에 가까웠다.

산의 가장 큰 봉우리만 해도 수십 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아래쪽은 완만하다가 급격히 솟아오른 모습이었다.

산세가 험해서 범인들이 오르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그만큼 영기가 많아 결단기 이상의 수사들만이 거처를 마련하고 거주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외부에서의 침투를 막기 위해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어 명을 받아 다녀가는 제자들도 정해진 길로만 오가고는 했다.

한립은 영롱산 아래 돌길에 서서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뒷짐을 지고 선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달리 온화해 보였다.

그는 비술을 이용해 원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수행을 숨겨 연기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엄월종 저계 수사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얻은 후 금제를 걸어 동굴 속에 던져두고 오는 길이었다.

원곤의 관사 영패와 몽인술로 알게 된 정보로 산문에 오르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엄월종이 영롱산 옆에 세운 시장으로 종파 내의 제자들이 물물교환도 하고 물품구입을 하는 곳이었다. 그 중 전문으로 속세의 물품을 거래하는 상점은 자연히 원곤 담당이었다.

한립은 서둘러 산봉우리로 향하지 않고 상점들에 원곤이 가져온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의 기억에 따르면 남궁완은 폐관 수련 중은 아니나 곧 큰 경사가 있을 예정이라 두문불출하며 손님을 받지 않아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남궁완이 어째서 화의문 위리진과의 혼사를 수락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계 제자들은 아는 바가 없었다.

남궁완은 엄월종에서 가장 어린 원영기 수사에다 타고난 미모로 남제자들이 숭배하는 존재였다. 많은 이들이 남궁완을 몰래 사모했는데 원곤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비록 입문을 하고 수십 년 동안 두세 번 보았을 뿐이지만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한립은 원곤이 남궁완의 혼인 사실을 알고 홀로 상심하던 기억을 읽어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어쨌든 원곤의 기억에 따라 할 일을 처리하며 한립은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원래 다른 수사들과 왕래가 많지 않은 성격인지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수사는 없어 보였다.

반나절 후 하늘이 어둑해 지는 것을 보고 그도 다시 움직였다. 원래 원곤의 일정대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원곤은 연기기 제자였으나 관사의 신분으로 영롱산 두 번째 구역에 작은 처소를 갖고 있었다. 올라가는 동안 마주치는 축기기 제자들은 하나같이 불쾌한 내색을 하며 그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원 관사는 수하를 몇 명 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수사들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듯 했다.

두 번째 구역에 진입한 한립이 원곤의 거처로 향하지 않고 저계 법기를 꺼내 산봉우리로 향했고 세 번째 구역의 경계쯤에 도착하자마자 축기기 수사 둘이 나타나 그를 막아섰다.

“원곤! 여기가 어디라고 올라온 것이냐. 이곳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는 것도 모르느냐.”

그 중 새하얀 얼굴의 수사가 원곤을 아는지 바로 일갈했다.

“사숙님들께 고합니다. 사, 사질이 나, 남궁 사조님을 뵙고자 합니다. 고해주실 수 있을지요.”

“뭐라?  미쳤느냐?  네가 감히 남궁 사조님을 뵙겠다고?”

두 수사가 화들짝 놀라 질책했다.

“그게…… 사질이 이번에 재료들을 구입하러 나섰다가 엄청난 수행의 선배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남궁 사숙님에게 전하라며 어떤 물건과 말씀을 남기셨어요. 게다가 남궁 사숙님께서만 풀 수 있을 거라며 몸에 금제까지 걸어버리셨습니다.”

한립이 순식간에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선배?  결단기 수사였더냐?”

새하얀 얼굴의 수사가 놀라 물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궁 사숙님의 오랜 지기라 하였습니다. 사조님의 경사를 듣고 선물과 전언을 남기니 친히 전하라 하셨어요.”

마치 자기도 미치겠다는 듯 한립이 울상을 지었다.

“사조님의 오랜 지기?  그럼 원영기 선배님일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이왕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찌 직접 올라오지 않았을까?”

새하얀 수사도 당황했지만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다른 급한 일이 있거나 직접 본 종을 방문하기 꺼려지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죠. 원 사질, 손을 줘보게. 금제를 확인하고 다시 이야기 하세!”

굵직한 선의 수사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한립에게 명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한립은 바로 손목을 내주며 동시에 영력으로 금제가 걸린 것처럼 꾸며냈다.

한립의 손목을 잡은 수사가 그것을 느끼고는 눈을 부릅떴고, 새하얀 수사도 직접 영력을 주입해 확인하고는 안색이 변했다.

“확실히 네 몸에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구나. 금제의 복잡한 형상으로 보아 십중팔구는 정말 원영기 수사의 솜씨겠지.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너를 마음대로 들여보내 줄 수는 없으니 선물이라는 것을 꺼내 보거라. 우리가 너를 대신해 남궁 사조님께 보이고 말씀을 아뢰겠다. 남궁 사조님이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신다면 너를 부르시겠지!”

새하얀 수사가 한결 온화하게 말했다. 한립이 애가 타는 표정을 하고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해주십쇼. 그리고 꼭 사질의 몸에 금제가 걸려 있다는 것을 말씀 드려주셔야 합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한립이 허리춤의 저물대에서 기다란 목함을 꺼내 넘겨주며 구구절절하게 부탁했다. 목함은 은은한 은빛의 부적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고 영기의 파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알았으니 여기서 기다리거라. 마 사제, 내가 다녀옴세!”

새하얀 수사가 성가시다는 듯 한립을 한번 쳐다보고는 목함을 들고 사라졌다. 한립은 그 자리에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남궁완이 목함 속의 물건을 보고 반드시 그를 만나주리라 믿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을 앞두고 기분이 이상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 * *

장장 반 시진이 흘러서야 새하얀 수사가 돌아왔다.

“남궁 사조님께서 그분이 지기가 맞다 확인해주셨다. 나를 따라 사조님을 뵙고 금제도 풀러 가자꾸나.”

새하얀 수사는 할 말만 딱 하고는 한립을 데리고 다시 날아올랐다. 한립이 내심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긴장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조심하거라. 정해진 길을 조금만 벗어나도 구해줄 수 없으니.”

새하얀 수사가 하는 경고에 한립이야 알겠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어디선가 남색빛줄기가 날아왔고 새하얀 수사가 누군지 알아보고 공손히 멈추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이는 음산한 표정의 비단 옷을 걸친 중년 수사였다.

“손 사질, 어찌 연기기 제자를 데리고 산길을 오르느냐?  법도도 모르느냐?”

금의(錦衣) 수사가 냉랭히 물었다.

“람 사백님, 사질은 남궁 사조님의 명을 받아 산을 오르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연기기 제자를 데리고 이곳을 드나들 수 있겠습니까.”

“남궁 사숙께서?  무슨 일인지 상세히 말해 보거라.”

“그것이 원 사질이…….”

금의 수사가 의아한 기색을 들어내며 묻자 새하얀 수사가 숨김없이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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