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6
396화. 경악한 뢰만학
“본 상선의 법술까지 깨놓고 언제까지 숨어 있을 겁니까.”
흉악한 황포 법사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지금 그는 여인과 다른 결단기 수사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의 수행이 부족해 나를 찾아내지 못한 게지요. 보아하니 원영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유유자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른빛이 반짝이며 평범한 얼굴의 청년이 나타나니 당연히 한립이었다.
그가 다섯 수사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멀리서 청원검기를 방출해 깃털 법보를 공격한 것이다.
법보가 공격당했으니 소용돌이는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립이 나타난 것에 놀라던 수사들은 그가 원영기의 수행을 지닌 것을 느끼고는 크게 기뻐했다. 목숨을 보전할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여수사가 먼저 멀리서나마 예를 올렸다.
“완배 섭영,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 올립니다!”
‘섭영!’
한립이 자기도 모르게 힐끗 그녀를 보고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기에 손을 저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아무래도 여인과 노인 둘 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면식이 있을 뿐인데 200년 만에 바로 알아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생각을 마친 그가 황포 법사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아직도 안 가고 뭐하십니까? 배웅이라도 기다리는 겝니까?”
대머리 법사가 열이 받았는지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핫하하! 그쪽도 원영 초기에 불과하면서 그리 건방을 떨다니. 아무래도 담 모가 본때를 보여줘야겠소이다!”
말을 마친 대머리 법사는 수결을 맺으며 아래쪽을 향해 손을 뻗었고 두 개의 노란 탄환 같은 것이 땅으로 뿜어져 내려갔다.
한립은 조금 멈칫했지만 굳이 막지 않고 흥미로운 구경을 하는 사람처럼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법사가 주문을 외자 노란 안개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그를 감쌌다.
“가라!”
노란 안개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리고 한립이 사방을 경계하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그때 아래쪽에서 ‘쿠르릉’ 하는 땅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이 의식으로 살피고는 조금 놀라 즉시 소매를 저어 수 장 길이의 거대한 푸른 빛줄기 두 개를 아래쪽으로 쏘아 보냈다.
곧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검기 공격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푸악! 푸악!
이어 길이가 열댓 장은 되는 노란 규룡이 땅에서 솟아올라 대머리 법사와 노란 안개를 감싸고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건?”
두 마리 노란 규룡들은 전신이 돌로 만들어진 것 같았는데 살아 있는 생물 같았다. 그러나 모든 기운은 미간 사이에서 빛나는 노란 탄환에 응결되어 있었다.
“구령수(拘靈獸)의 위력을 받아 보시오. 가라!”
노란 안개 속에서 미친 듯이 웃어 재낀 법사가 법결을 쏘아 보내자 토룡(土龍)들이 기세등등하게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립이 머뭇거리지 않고 한숨을 쉬듯 무언가를 불어냈다.
그의 입에서 건람빙염 한 오라기가 뿜어져 나와 허공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날아오는 토룡들의 머리를 노리고 흩어졌다.
촤르륵!
토룡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르딩딩한 얼음갑옷을 챙겨 입은 듯 뻣뻣하게 굳어 한립과 수 장 거리에서 멈춰 섰다.
펑! 펑!
바로 푸른빛을 번뜩이며 날아간 검기에 토룡들은 가루가 되었지만 한립이 손을 뻗어 노란 탄환 두알 만을 회수했다.
“또 뭐가 있는지 더 해보시지요. 안 그래도 법사들의 영술에 관심이 많으니.”
거침없이 저물대 속으로 노란 탄환을 넣어 버린 한립이 담담하게 법사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토룡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노란 안개 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느 파의 장로이시며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원영기 수사 중에 당신 같은 외모를 지닌 분을 들은 적이 없는데. 설마 원영기에 이른지 100년도 안 된 겁니까?”
한참 후 들려온 법사의 목소리에서는 조금 전의 흉흉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 같은 무명 잡졸을 일일이 알아 두실 것은 없고. 그쪽에서 공격을 하지 않겠다니 그럼 제가 갈까요?”
한립의 얼굴이 싸늘해지며 한 손이 영수대를 스쳤다.
금빛이 찬란한 비충들이 영수대 속에서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정성을 다해 기른 금색 서금충들로 적을 공격해볼 요량이었다.
“서금충!! 이렇게나 많은 서금충을 지니고 있다니!”
한립의 예상과 달리 그가 서금충으로 공격을 개시하기도 전에 황포 법사가 바로 영충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두려워했다.
그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즉시 몸을 돌려 노란 빛줄기로 변해 달아나 버렸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빨라 한립은 생각 끝에 추적을 포기했다.
그런데 수행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대머리 법사가 단번에 서금충을 알아본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한립이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일단 금색 서금충들을 불러 들여 영수대에 넣은 후 담담히 결단기 수사들에게 돌아갔다.
“저희를 살려주신 큰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배님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황풍곡 뢰만학 인사 올립니다!”
비대한 몸집의 노인이 서둘러 앞으로 나서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미 섭영이라 밝힌 여인과 다른 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거검문 석제운, 엄월종 당명화, 천궐보 전환 인사 올립니다!”
세 사람이 거의 이구동성으로 소개를 하며 극히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선배라!’
한립이 턱을 쓰다듬으며 표정이 묘해졌다.
비대한 노인은 단약의 제조법과 영약을 교환한 적이 있는 그 ‘뢰 사백’이었다. 그런 노인네가 자신에게 선배님이라니.
수도계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섭영이라는 절색의 여인도 일면식이 있는 여인이었는데, 천둥 속성의 뢰영근을 지닌 모용 형제들을 보호하며 나타났던 ‘섭 사저’였다.
비록 그녀와 이렇다 할 친분은 없었지만 엄청난 미모와 자질로 수많은 남수사들의 애간장을 태웠던 여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못 본 사이에 그녀도 결단기 수사가 되어 있었다.
한립이 한 마디도 없이 묘한 얼굴로 그와 섭영을 바라보자 뢰만학도 의아해했다.
눈앞의 ‘선배님’은 너무 젊을 뿐 아니라 너무 평범한 얼굴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마치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에 뢰만학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섭영도 아름다운 눈으로 한립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깨달은 듯 했다.
이에 한립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뢰 사백께서 저를 기억 못하시나 봅니다. 허나 당년 사백이 주신 단약 제조법으로 수련에 큰 도움을 받았지요.”
“사백이요? 단약 제조법! 다, 당신은…….”
뢰만학이 한립이 자신을 사백이라 칭하는 것을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단약 제조법이란 소리에 혀가 꼬였다.
다른 이들도 눈을 부릅뜨기는 마찬가지였다. 원영기 수사가 뜬금없이 뢰만학에게 ‘사백’이라 칭하다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섭영만이 한립을 자세히 보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당신은 이 사숙님의 제자였던, 한립…… 한 사제?”
“섭 수사가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연기기일 때는 워낙 수행이 낮아 그를 신경 쓰는 자가 없었지만 혈금시련에서 살아나와 이화원의 제자가 되면서 그는 많은 주목을 받았었다.
‘섭 사저’도 그를 유심히 봐두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거기다 마도 육종이 월국을 침입하고 다수의 마도 수사를 홀로 죽인 전적이 있기에 이후 만날 일은 없었지만 인상이 깊었던 것이다.
한립의 용모가 그때와 똑같았으니 약간의 실마리만 듣고도 바로 ‘한 사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수도계에는 기인기사가 허다해서 자질이 뛰어난 자가 배분을 뛰어 넘어 성장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축기기 수사였던 자가 갑자기 원영기 수사가 되어 나타나는 일은 뢰만학 평생에 처음이었다.
“뢰 사백, 여기는 오래 머물 곳이 못되니 이동하시지요.”
한립이 사방을 살피며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사백이라는 칭호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한 선배님께서 원영을 이루셨으니 선배님으로 모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뢰만학이 심란한 감정을 정리하며 쓴웃음을 보였다. 말투나 태도 역시 더없이 공손한 것이 절대 실례를 저지를 수 없다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이전에 어떤 관계였든 원영기 선배가 자신을 사백이라 칭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수사들도 결국에는 한립과 뢰만학의 관계를 알아차리고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한립도 예상했던 반응이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뢰 수사가 그렇게 말하니 그리 하겠네. 그럼 이제 출발하지. 너희의 둔술이 느릴 수 있으니 함께 데려가주마.”
한립이 저물대를 스쳐 작은 물체를 허공에 던졌다. 네모난 무언가가 하얀빛을 내며 몸집을 키우니 최근에 얻은 어풍차였다.
날개 달린 네모난 마차가 법결을 맞고 신속히 커져 십여 장 크기로 불어났다.
“모두 타거라!”
뢰만학 등이 주저 없이 어풍차에 오르니 한립이 영력을 주입했다.
마차가 가볍게 흔들리고는 하얀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가르는데 그 속도가 평범한 법보의 속도를 훨씬 초월했다.
법사가 다른 이들을 몰고 추격해 오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이들은 크게 기뻐했다.
“풍원국은 이미 법사들의 수중에 떨어진 것 같은데 여기서 뭘 하던 거지? 이곳이 변경 지역이 아니었다면 내가 나섰어도 달아나기 힘들었을 게다.”
다섯 수사가 그 말을 듣고 서로 눈치를 보는데 뢰만학이 가장 연배가 있는 만큼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맹의 명령을 받아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며칠 만에 풍원국이 모란인들에게 침공당한 것을 알았습니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려다 저계 법사들과 마주쳐 그들을 죽이는 바람에 근처에 있던 원영기 수사의 눈에 띈 것입니다. 흩어져 달아난다면 죽는 것은 시간문제라 한데 모여 버티고 있었는데 운이 좋아 한 선배님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뢰만학이 감지덕지한다는 얼굴로 ‘한 사질’을 살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한립이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아 다른 것을 물었다.
“뢰 수사, 이화원 사부는 안녕하신가?”
“이 사제는 100년 전 모란 법사와의 결투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 때문에 그 부인 역시 금단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못가 명을 달리했습니다.”
속일 일도 아니라 뢰만학이 성실하게 답변했다.
“그럼 사형제들 중에는 금단을 이룬 이가 없고?”
“없습니다. 이 사제 문하의 제자들 중에 자질이 뛰어난 이들도 몇 있었지만 결국에는 연이 따르지 않았던 게지요.”
한립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며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우곤’, ‘송몽’, ‘종위랑’ 같은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더 물을 것도 없이 결단기에 이르지 못했다면 대부분은 한참 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한 선배님 황풍곡으로 돌아오실 마음은 없으신지요.”
섭영이 갑작스런 질문을 던졌다.
“황풍곡으로? 전혀. 지금은 천도맹 낙운종 장로로 있는데다 대우도 썩 괜찮은데 그럴 리가.”
한립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 말에 섭영은 실망한 빛을 보였고 뢰만학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른 세 수사는 한립과 모르는 사이이니 함부로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혹시 선배님께서는 소취인을 아시는지요!”
잠시 주저하던 섭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취인! 알다마다. 너도 아는 아이더냐.”
한립이 영리하던 여자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