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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95화 (152/2,000)
  • # 395

    395화. 옛 사람과의 조우

    모란족에게 법사란 거의 신앙에 가까운 존재여서 범인들은 법사들을 위해 죽는 것이 아주 큰 영광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했다.

    거기까지 듣고는 한립이 탄식하며 손을 저었다. 그러자 은은한 푸른 보호막이 마차 내부를 봉쇄했고 모란인들이 떠드는 소리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은월, 이제 어떤 수확이 있었는지 보고 해야지!”

    한립이 소매를 털어 하얀 새끼 여우를 불러냈고 은월이 허공에서 빙글 돌아 그의 앞에 내려섰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인님도 아시다시피 1층에도 고보가 상당히 많았지만 들키지 않고 들고 나올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2층의 옥함들은 원래 6개였는데 그 중 절반을 챙겼죠! 은월이 눈치껏 티 나지 않게 절반은 일부러 남겨둔 것입니다. 다른 수사들의 의심을 사면 오히려 화를 입을 수 있으니까요.”

    하얀 여우가 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입 안에서 3개의 옥함을 꺼내 한립 앞에 내려놓았다. 한립이 옥함들을 보다가 허리춤을 스쳐 또 다른 것을 꺼냈다.

    “창곤 상인이 총 6개의 옥함을 남겼는데 그 중 4개가 내 손에 들어오다니. 이번에 오기를 잘 했구나.”

    “그런데 주인님도 담이 참 크십니다. 원영기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를 몰래 들여보내다니 걸릴까 걱정도 안 하셨어요?”

    은월이 간담이 서늘하다는 듯 탄식했다.

    “하하! 걱정할 게 무엇이냐. 걸리면 혈영둔을 펼쳐 달아나면 그만이지. 게다가 성공할 가능성이 꽤나 높은 일이었다. 다만 네가 보물을 챙기고 숨어 있다 들키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 네 둔술의 신묘함이 내 예상을 벗어나는구나.”

    한립이 피식 웃었으나 은월을 보는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우리 은월족의 둔술이 비록 신묘하기는 하지만 옥함 자체에 영기를 숨기는 효과가 있어 들키지 않은 것입니다. 안 그랬으면 노괴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겠지요.”

    은월이 그것을 알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온화하게 미소 지은 한립이 더는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곧이어 옥함을 든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반짝였고 다섯 손가락을 쥐자 옥함에서 반짝이던 하얀빛을 감쪽같이 집어삼켰다.

    파삭.

    옥함의 뚜껑이 자동으로 열렸는데 안에는 연한 남색의 옥간이 들어 있었다. 뚫어져라 옥간을 응시하던 한립이 작게 숨을 토하고는 그제야 손으로 그것을 들어 의식을 불어넣었다.

    새끼 여우가 까만 눈을 반짝이며 한립을 올려다보는데 아주 흥미진진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한립은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이에 은월이 오히려 눈을 깜빡이며 의아해했다.

    장장 일각이 지나고 의식을 회수한 한립이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옥간을 잘 챙겨두고 두 번째 옥함을 들어 올리면서도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은월은 너무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두 번째 옥함도 같은 방식으로 개봉되었고 이번에는 아무런 광택도 없는 새까만 반지가 들어 있었다.

    “고보예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영기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구나.”

    궁금해 하는 은월을 보며 한립도 확신을 하지 못했다. 그가 두 손가락으로 작은 반지를 들어 올려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재료가 조금 특이하지만 평범한 법기에 불과해. 어떤 용도인지는 알아봐야겠지.”

    “그냥 법기라고요?”

    은월의 눈에 실망하는 빛이 스쳤다.

    “걱정 마라. 창곤 상인이 소장하고 있는 물건인데 분명 다른 용도가 있겠지.”

    “주인님, 어서 나머지도 살펴봐요. 어떤 보물이 들어 있을지 모르잖아요!”

    하얀 여우가 목을 길게 빼고 기대감에 차서 말했다.

    한립이 남은 옥함도 연달아 열어보니 각각 녹색 병과 주먹만 한 자홍색 물체가 들어 있었다.

    일단 대수롭지 않게 녹색 병을 꺼내 향을 맡았는데 심상치 않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립이 안색이 급변해서는 재빨리 병을 다시 막아두고는 묘한 눈빛으로 병을 쳐다보다 저물대 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자홍색 물체를 들어 만져보니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오!”

    동그란 물체가 갑자기 빛줄기를 내뿜으니 한립이 놀라 의식을 집중했다.

    잠시 후 그가 한 손을 털어냈고 빛 덩이가 자홍색 안개로 변해 선회하다가 그의 법결을 맞고 다시 원형으로 돌아와 떨어져 내렸다. 아주 얇은 자홍색 망태기는 망사로 돼 결이 무척 고왔다.

    “이건 자운두(紫雲兜)인데요?  만황 시대 꽤 유명했던 고보예요.”

    하얀 여우가 자홍색 망태기를 알아보았다.

    “아는 물건이더냐?  유명했다면……. 설마 이것도 통천령보?”

    오랜만에 한립은 희색이 스쳤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자운두가 고보 중에서 최상급이긴 해도 통천령보랑 비교하면 훨씬 부족하죠! 하지만 방어 측면에서만 따지면 쓸모가 무궁무진합니다. 어떻게 제련하는 가에 따라 한번 펼치면 백 장에서 넓게는 천 장까지 덮을 수 있는 아주 보기 드문 광범위 방어 고보니까요. 최상급 자운두 고보라면 심지어 백 리 안의 모든 생명을 보호하기도 한다지만 사실인지는 모르겠어요! 물론 공격할 때는 옥양진화(玉陽眞火)를 뿜어 강력한 적을 섬멸할 수도 있고요.”

    은월이 마치 자기 집안 가보라도 되는 것처럼 설명을 늘어놓았다.

    “은월, 자운두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데. 이전에 본 일이 있어?”

    한립이 부드러운 망태기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 말에 은월이 조용해지더니 한참 후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알겠네요.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어 보니 기령으로 제련되기 전에 자운두 고보를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겠죠.”

    은월이 말을 하면서도 눈빛이 흔들렸다. 문뜩 무언가 떠오르는 것 같았는데 우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젓기도 했다.

    “자운두가 그렇게 대단한데 창곤 상인이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십중팔구 그가 추마골에서 꺼내온 보물이겠지. 안타깝게도 옥함 4개에 추마골과 관련된 정보가 없으니 아마 남롱후 수중에 있겠구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한립은 진짜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추마골의 비밀을 얻었다면 앞으로 큰 보물을 얻을 기회가 생겼겠지만 그만큼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소식이 새어나가면 수많은 노괴들은 물론 거대 세력에 공격 받을 가능성도 높았다.

    이득과 폐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주인님, 그 옥간 속에는 뭐 없나요?”

    은월이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옥간에는 창곤 상인의 공법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더군. 그가 주로 수행했던 망월결(望月決)은 내가 수련할 수 없겠지만. 다른 비술들이나 수련상의 깨달음은 도움이 되겠어.”

    그 말에 은월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옥함을 다시 회수한 한립이 은월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가부좌를 한 채 두 눈을 감아버렸다.

    은월이 거침없이 한립 곁에 붙어 몸을 말고는 새까만 눈으로 아무도 없는 어딘가를 주시했다. 그렇게 모란족 행렬 속에서 이틀 밤낮을 보낸 것이다.

    한립은 모란 초원을 벗어나자마자 은월을 데리고 귀신처럼 행렬을 빠져 나가 천남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강력한 의식으로 백 여 리의 상황을 파악하며 성가신 일이 생기지 않게 피한 결과 구국맹의 풍원국(豊原國)에 도착할 수 있었다.

    풍원국은 모란 초원과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세 국가 중 하나로 항상 구국맹 수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었다. 구국맹은 모란 법사들의 습격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잠시 퇴각한 듯 했다.

    쌍방 간의 진정한 대전은 아직 시작 전인 것이다.

    한립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외진 길을 골라 사나흘 정도 날아갔는데 이름 모를 산을 지났을 때 돌연 고개를 꺾었다.

    방금 멀지 않은 곳에서 격렬한 영기의 파동을 느낀 것이다. 흉흉한 기세와 영기의 파동으로 보아 수도자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자세히 상황을 살피니 그 중 하나의 파동은 원영기의 수사였고 나머지 네다섯 명은 결단기 수사였다.

    그런데 결단기 수사들의 기운 중에 익숙한 것이 있었다. 한립이 이전에 알던 이들인데 재빨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일순간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잠시 주저하다 한립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쪽으로 날아갔다. 그의 둔술이면 순식간에 도착할 거리였다.

    전방에는 다양한 색깔의 영력들이 터져 나가면서 폭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투가 아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다섯 명의 다양한 복장을 한 남녀 수사가 법사 한 명을 상대로 연합해 싸우고 있었다.

    슬쩍 보니 다섯 명의 결단기 남녀가 최선을 다해 본명 법기를 휘두르는데도 중간의 노란 장포를 입은 대머리 법사를 어쩌지 못하고 그가 방출한 기운에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험상궂은 얼굴의 법사는 원영 초기의 수행으로 어떤 법보도 꺼내지 않았지만 신묘한 공법과 심후한 수행으로 손쉽게 승기를 점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결단기 수사들 중 절색의 여인에게는 살수를 쓰지 않는 것이 살려서 포획하려는 마음이 엿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섯 수사가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립은 절색의 여인이 어딘가 눈에 익었지만 살이 뒤룩뒤룩 찐 노인에게 시야가 가려 확실히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노인의 주위로 은백색 번갯불이 번뜩였고 부리는 법보 역시 전광을 방출하는 거검이었는데, 그의 실력이 다섯 결단기 수사 중 으뜸이었다.

    ‘저 자는?  세상 일이 참 묘하구나!’

    살찐 노인 얼굴의 공법을 본 한립이 중얼거리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드러냈다.

    “네 이년, 아직도 포기를 안 했더냐?  본 상사가 수련한 공법에 최상급 화로가 되어줄 계집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넌 죽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본 상사를 따라 나서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게다!”

    황포 법사가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끄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절색의 여인에게 흉악하게 지껄였다.

    그가 입을 벌리자 노란 깃털 부채가 나와 영광(靈光)을 발산했다.

    그 모습에 살찐 노인과 그 밖의 결단기 수사들이 모두 식겁했다. 그들이라고 상대가 손속에 사정을 두어 지금까지 버텼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원영기 법사가 전력을 다하면 죽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다섯은 얼굴을 굳히며 또 한 번 전신의 법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공격에 위력을 더했다. 동시에 다섯 개의 법보가 일순 위력이 증가해 법사의 노란 안개를 적잖이 흩어냈다.

    법사가 눈썹을 꿈틀하며 허공의 부채를 향해 노란 정기를 뿜어내곤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깃털 부채가 주문을 외는 소리에 부들부들 떨더니 수사들을 행해 가볍게 펄럭였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광풍이 불며 별안간 수십 장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 다섯 결단기 수사를 휘감아 버렸다.

    거대한 소용돌이에 법보들이 허공에서 비틀거렸고 광풍의 금제 속에 갇힌 수사들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하하! 봐주면 알아서 기어야지. 그렇게 날뛰어서야 쓰겠느냐?”

    대머리 법사는 흉악한 낯으로 만족스럽게 웃어댔다.

    그가 한 손을 허공에서 쥐자 소용돌이 속에서 거대한 노란 손이 나타나 절색의 여인을 잡아채려 했다. 일단 여인을 포획하고 나머지를 죽일 생각인 것이다.

    여인이 부리는 법보는 불타오르는 듯한 비검이었는데 거대한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강풍에 통제를 잃은 법보를 불러들일 수가 없었다. 곱고 보드라운 얼굴이 한순간에 창백해졌다.

    다른 수사들도 여인을 구하고는 싶었으나 몸도 가누기 힘든 판에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비대한 체구의 노인만이 수행이 깊어서인지 간신히 손에서 수척 길이의 뇌전을 뿜어 거대한 손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런 공격이 통할 리 없었다.

    여인이 잡히기 일보직전 거대한 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동시에 다른 수사들을 가둔 소용돌이 역시 급격히 느려지며 별안간 사라졌다.

    마치 광풍과 거대한 손이 모두 환영에 불과했던 것처럼.

    다들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해 서둘러 대머리 법사를 쳐다보는데 그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며 분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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