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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94화 (151/2,000)
  • # 394

    394화. 연영(煉嬰)

    “남롱후가 천극문과 연관되어 있단 겁니까?  왜 미리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아, 말씀을 안 드렸나요?  아마 깜빡했나 봅니다. 하지만 남롱후가 아직 천극문에 들어간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래도 근심이 된다면 귀령문에 귀의해 장로가 되세요. 그러면 천극문이 두 분을 어쩌겠습니까!”

    노부인의 표정이 달라지며 묻자 운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유유자적하게 답했다.

    “흥! 이 나이에는 이제 어떤 구속도 달갑지 않습니다.”

    “저는 하릴없이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귀문에 귀의하기 어렵겠습니다.”

    노부인이 코웃음을 치며 단박에 거절했고, 까무잡잡한 사내도 차분하게 의사를 표했다.

    “두 분이 귀령문에 들어오신다면 본문의 실력이 더 커졌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허나 노부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 하시지요. 다만 남롱후를 없애기만 하면 천극문도 죽은 사람을 위해 복수에 나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남롱후과 100년을 알고 지냈지만 추마골에 대해서만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곳에 그의 숨겨진 거처가 있고 창곤 상인이 당년 추마골을 드나들 때 사용했다는 지도가 감춰져 있다는 사실만을 들었을 뿐이지요. 그 지도를 들고 추마골에 들어가면 안전은 보장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추적에 성공해도 일단 원영은 멸하지 말고 수혼술(搜魂術)을 이용해 정보를 빼앗읍시다.”

    노인은 두 사람의 거절에 화를 내기보다는 바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지도가 한 가 녀석에게 있다면 일이 틀어질 텐데요?”

    “그 또한 방책이 있지요. 그 놈은 도망가게 두고 그가 추마골 지도를 지닌 사실을 천남 전체에 알리는 겁니다. 그럼 정마 양도는 물론이고 천도맹에서도 그를 추적해 지도를 빼앗으려 할 걸요?

    그때 가서 혼란한 틈을 타 지도를 빼내면 그만입니다. 겨우 낙운종 따위가 추마골의 보물을 독점할 수야 없을 테니 말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남롱후가 알고 있는 추마골에 대한 정보입니다. 나중에 수사들이 추마골을 드나드는 방법을 알게 되어도 이 정보에 따라 승패가 갈라지겠지요.”

    왕천고가 근심을 드러내자 운 노인이 차분히 설명했다.

    “만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 전에 그 자와 거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상에 거래할 수 없는 물건은 없으니까요.”

    왕천고가 생각을 정리하고는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좋은 말씀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한가 녀석의 수법이 아주 괴이하더군요. 정말 왕 사질과 동년배가 맞습니까?  보아하니 웬만한 노괴들보다 교활한 수법을 쓰던데 단독으로 겨루면 나도 어쩌지 못할 듯합니다.”

    “선이에게 물으니 원래는 황풍곡의 평범한 축기기 수사였답니다. 어찌 단기간에 원영을 이룬 것인지는 모르나 능력이 대단한 것은 확실해졌지요. 그 자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어찌 남롱후가 도망갈 틈을 얻었겠습니까.”

    왕천고도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이 검은 산봉우리로 공격할 때도 기겁했는데 나중에는 태묘신금을 펼쳐 그들을 막다니!

    노부인 등도 기괴한 술법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는 우선 룡 수사에게 돌아가 상태를 살피겠습니다. 원영기 수사이니 아직 구할 방법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또한 조카 녀석도 걱정이 되어서요. 방금 한 가 녀석이 달아나기 전 놀랍게도 본인이 수련한 마혈참과 비슷한 수법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천고가 이어서 덧붙였다.

    “그러시지요. 어차피 지금은 상대를 감지할 수 없으니 일단 돌아가 봅시다. 남롱후의 비술이 효력을 다하면 그때 다시 쫓읍시다!”

    운 노인이 그의 말에 찬성했고 그들은 다시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순식간에 옥기각의 폐허 속에 도착해 보니 연여언은 무릎이 꺾여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고 왕선은 그 옆에 엎어져 꼼짝을 안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선이가 당한 것이냐!”

    왕천고의 표정이 차가워졌지만 목소리만은 여전히 차분했다.

    “아닙니다. 다만 부군의 다리가…….”

    연여언이 머뭇거리면서도 조급한 기색을 드러냈다. 왕천고가 몇 발자국 다가와 상황을 살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왕선의 두 다리가 절단되어 옆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괴이하게도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저와 부군이 혈령대법을 펼쳐 혈무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정체모를 비술이 순식간에 펼쳐졌습니다. 공격이 너무 빨랐고 혈무는 전혀 막아내질 못 했습니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 부군이 뛰어올라 허리가 잘리는 것을 피했으나 다리가…….”

    “그럼 술법을 펼쳐 바로 다리를 붙였으면 될 게 아니냐.”

    유감스럽다는 연여언의 설명에 왕천고가 여전히 냉랭히 물었다.

    “여러 가지 술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어느 것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절단 부위에서 피가 새어나오지는 않지만 검은 기운이 뭉쳐 있어 술법들이 통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부군은 지금 정신을 잃은 상태이고요.”

    “그럴 수 있겠구나. 평범한 술법이었다면 너희가 힘을 합쳐 펼친 혈령대법을 뚫고 공격할 수 없었겠지. 내가 살펴보마!”

    왕천고가 안색을 풀고 신중하게 왕선의 상처를 확인했다. 과연 절단된 다리 부위에 검은 기운이 뭉쳐 있었다.

    왕천고가 손을 들어 검은 기운들을 휘저으니 사기가 콩알만 하게 뭉쳐 떠올랐다. 본래 진화를 불러 일으켜 태워버리려 했으나 그가 문득 허리춤에서 작은 병을 꺼내 그것들을 담아 두었다.

    슉.

    왕천고는 이것을 가져다 한립이 사용한 공법의 정체를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그는 몰랐지만 연여언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왕천고가 다른 쪽 다리에서도 사기를 거둬들이고 흩어진 다리들을 모아오자 연여언이 즉시 술법을 시전해 상처 부위를 연결했다.

    드디어 흡족한 얼굴로 왕천고가 몸을 돌렸는데 운 노인이 등이 룡 수사 주변에 모여 넋을 놓고 있었다.

    “왜 아직도 봉인을 풀지 않으십니까?”

    왕천고가 다가가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봉인이요?  뭘 어떻게 푼단 말입니까?  악독하기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법입니다!”

    노부인이 두려운 기색을 감추며 중얼거렸다. 운 노인 역시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대체 무슨 말입니까?”

    왕천고가 얼음조각을 한 바퀴 돌더니 불현듯 깨달았다.

    “……!”

    “다 보셨습니까?”

    까무잡잡한 사내가 갑자기 한손을 들어 얼음조각을 향해 뻗었고 주먹만 한 비취색 옥이 날아갔다.

    펑!

    비취색 옥은 얼음의 표면에 닿자마자 똑같은 남색 얼음 덩어리가 되어 가루처럼 바스러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까무잡잡한 수사는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불타오르는 하얀 진화를 일으켜 얼음 조각을 향해 날렸는데 진화가 남색얼음에 닿아 번뜩이더니 바로 종적을 감추었다.

    마치 무언가에 흡수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왕천고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런 얼음에 휩싸여 있는 룡 수사의 육체를 살릴 방법은 없겠습니다. 그저 원영이라도 꺼내 적당한 육체를 찾게 해야겠지요. 룡 수사가 이전에 이미 기회를 써버린 것은 아니겠죠?”

    운 노인이 탄식하며 주위 수사들에게 물었다.

    “아닐 겁니다. 룡 수사 본인의 육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까무잡잡한 수사는 룡 수사와 인연이 있는지 얼굴이 어두웠다.

    “그럼 원영이 빠져 나오게 도웁시다!”

    룡 수사도 이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갑자기 육체에서 하얀빛을 뿜어냈다.

    퍽!

    룡 수사의 육체가 재로 변해 사라졌고 남색얼음 속에는 일 촌 크기의 아주 작은 원영이 두 손에 손톱만한 옥패를 들고 나타났다. 조그만 얼굴이었지만 독기가 바짝 올라있었다.

    그가 입을 벌려 붉은 화염을 뿜어냈다. 원양영화(元陽嬰火)가 옥패에 닿자 작은 원영의 전신에서 붉고 하얀 불길이 일었고 기다릴 것도 없이 얼음을 향해 치솟았다.

    “잠깐!”

    운 노인이 당장이라도 얼음을 깨고 나오려는 룡 수사를 급히 말렸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룡 수사의 원영이 그대로 남색얼음에 부딪친 것이다.

    그 결과 수사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할 광경이 벌어졌다.

    강력한 룡 수사의 일격이 남색얼음에 불을 붙이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남색화염이 활활 타오르더니 룡 수사의 원영까지 한 입에 집어 삼켜버렸다.

    원영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이어지며 남색 화염에 휩싸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원영은 얼마 가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며 울부짖었다.

    그마저도 순식간에 끝나 원영은 하얀 빛으로 변해 눈앞에서 사라졌다. 룡 수사의 육체는 물론 혼백까지 완전히 소멸한 것이다.

    뇌둔술을 사용해 단번에 백 리 밖까지 날아간 한립이 그제야 잠시 쉬며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핏빛 피풍의를 꺼내 입고는 다시 허공을 주파했다.

    천 리 정도 날아갔을 때 바로 아래서 수만의 모란족 범인들이 행군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

    낙운종에 있을 때 장로들에게 모란족 법사와 천남 수사간의 교전 상황을 들은 일이 있었다. 모란족의 부족민들은 영술을 익힐 수 없었지만 그들은 매번 진격할 때마다 청장년층을 뽑아 임시 부락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천남 수사들이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천남 각지의 영석이나 재료 등을 훔쳐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모란족 법사들은 패하고 물러나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런 강탈에 구국맹은 입에 거품을 물곤 했지만 전란이 극에 치닫기 시작하면 어쩔 수가 없었다.

    적은 수의 수사들로 원료 산지를 지키게 하면 모란족 고계 수사가 한 명만 나타나도 전멸이었고, 대량의 수사들을 파견해 지키면 전방에서 싸울 전력이 부족해진다.

    유일한 방법은 일단 법사들이 원료 산지를 털게 놔두고 그 다음에 수사들을 파견해 다시 되찾아오며 모란족 범인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은 모란족은 범인들의 죽음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한 무더기를 죽이면 또 새로운 이들을 선발해 임무를 수행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범인들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하고 자원을 바꿔가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수시로 함정 나온 수사들을 없앴다.

    이렇게 적지 않은 수의 수사를 잃은 후 구국맹은 이런 약탈을 모른 척하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짧은 시간 동안 채굴을 해봐야 가져갈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었고, 차라리 재빨리 법사 대군을 공격하여 퇴각시키는 것이 나았다.

    지금 보이는 대열 속에도 마차와 수레가 굉장히 많았다. 그 중에는 젊은 남녀들이 대다수였는데 말로만 듣던 천남 자원을 약탈하기 위한 임시 부락인 듯 했다.

    한립이 의식으로 훑으니 그 안에는 축기기 법사 1명과 연기기 법사 3명이 전부였다. 당연히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을 하던 한립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공기 중으로 숨어들었고 모란족 부족민들의 낡은 마차 위에서 다시 나타났다. 낡은 소가죽과 채굴을 위한 곡괭이들이 쌓여 있는 마차였다.

    한립이 손을 저으니 중간이 깨끗하게 비워지며 그가 가부좌를 하고 쉴 공간이 생겨났다.

    모란 법사들이 몰려가고 있으니 그가 혼자 천남 방향으로 날아가다 보면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물론 법사 중 최상급을 제외하면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수적으로 열세가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모란 법사 뿐 아니라 왕천고 등의 추격도 피해야 했다.

    의식으로 지켜보니 범인들의 행렬은 굉장히 느렸지만 이대로 가면 이삼일 내로 안전하게 모란 초원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모란족들의 세력 범위를 벗어나 황무지에만 이르러도 홀로 천남으로 전속력을 다해 날아갈 작정이었다. 마차에 앉은 그의 귓가에 모란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모란족들의 언어는 당연히 천남의 것과 달랐지만 한립은 이번 여정을 출발하기 전에 관련 서책을 살펴 모란인들의 언어를 파악을 해두었다.

    그의 강력한 의식으로 하루 이틀이면 대강 익힐만한 수준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천남에서 많은 영석과 원료를 가져와 ‘상사’라는 이들에게 공을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해 떠들었다. 그들은 법사에게 믿음과 숭배 그리고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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