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3
393화. 만척일선(万尺一線)
왕선과 연여언이 그 안으로 모습을 감춘 뒤 희미하게 주문을 외는 소리와 귀곡성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핏빛 속에 괴물이라도 태동하는 분위기였다.
“하하! 한 수사에게 그런 엄청난 능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우리 둘이 손을 잡는다면 정말 승산이 있겠어요!”
누각 한쪽에서 남롱후가 뜻밖이라는 듯 크게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한립이 무표정하게 그에게 살짝 시선을 주었다.
“나와 손을 잡겠다면, 내 나머지 옥함 중 하나도 수사에게 넘기겠습니다!”
“옥함이요? 하하…….”
한립이 말은 아꼈지만 남롱후의 회유에 넘어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손쉽게 원영기 수사를 없앤 것은 전부 상대가 건람빙염의 위력을 몰라서였다.
게다가 아직도 원영 초기 수사 셋과 원영 중기 수사가 남아 있었다. 남롱후가 멀쩡하기만 했어도 같이 싸워볼만 하겠지만 그는 이미 중상을 입은 후였다. 지금 그와 손을 잡았다가는 같이 죽자는 것 밖에는 되지 않았다.
옥함이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생각을 마친 한립이 날개를 펄럭이자 천둥이 치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도망가게 둬선 안 됩니다! 옥함을 들고 있어요!”
그 모습에 운 노인이 급히 소리쳤지만 방금 한립이 동급 수사 한 명을 죽이는 것을 보았기에 노부인이나 까무잡잡한 사내는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왕천고 역시 주저하며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어쨌든 한립을 이대로 보내주면 남은 남롱후를 처리하는 것은 간단해지고 옥함 두 개는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한립까지 잡으려다가 남롱후와 연합해 맞붙게 되면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한립이 지닌 옥함 속에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빼앗아야할 추마골의 비밀이 담겨 있을 수도 있었다.
운 노인도 다른 수사들의 생각을 알아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일단 그도 한립의 검람빙염을 보고 주눅이 들기도 했고 그가 한립을 쫓으면 나머지 수사들만으로 원영 중기인 남롱후를 상대하게 두는 것이 꺼림칙했다.
번갯불이 번뜩이며 계단 입구에 나타난 한립이 왕천고 등을 향해 피식 웃고는 검은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검은 산봉우리가 진동을 하더니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소실되어 돌연 왕천고 등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운 노인과 왕천고는 한립이 마지막까지 이런 짓을 하고 달아난 것에 분노했다.
하지만 산봉우리의 위력을 직접 맞받아칠 수야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왕천고 쪽 수사들이 흩어지며 산봉우리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되니 남롱후에게 공격 기회가 돌아갔다. 그가 눈을 빛내며 금색 빛줄기로 화해 바로 노부인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노부인이 노란 빛을 뿜어 황토 색깔의 방패로 그를 막았다.
금빛과 노란빛이 교전을 했지만 남롱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이 너무 강했기에 당장이라도 뚫릴 기세였다. 다른 수사들이 바로 법보를 이용해 그를 공격했다.
그런데 무슨 비술을 펼쳤는지 금빛이 더욱 짙어지며 남롱후가 여러 고보들과 맞붙어 밀리지 않았다.
놀란 왕천고 등은 한립을 신경 쓸 틈이 없어졌다.
한립이 그 모습에 만족해하며 검은 산봉우리를 가리키자 거대한 고보가 ‘훅’ 하고 수축해 그의 수중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끊임없이 꿀렁거리는 자홍빛 혈무(血霧)를 보는 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한립의 눈동자가 남색으로 일렁이더니 한 팔 전체가 검은 빛으로 부풀어 오르며 검붉은 무언가가 혈무 속으로 사라졌다.
바로 오래전 익혀둔 음마참 비공을 펼친 것이다!
혈무 안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그는 천둥소리와 함께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음마참에 당했으니 왕선이 죽지는 않았더라도 중상을 입었을 것은 명백했다.
지금 왕선의 정신과 육체를 한데 멸해버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왕천고가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까지 한 것이었다. 어차피 고작 결단 후기의 수사는 마주치기만 하면 없앨 수 있었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일격을 날리고 결과도 확인하지 않은 채 뇌둔술을 펼쳐 그곳을 떠나온 것이다.
한립이 누각 1층의 대문에 나타났을 때 돌연 대청 어디선가 하얀 빛이 날아들어 그의 소매 속으로 쏙 들어갔다. 설핏 보이는 모습이 눈처럼 새하얀 새끼 여우였다.
“주인님, 저…….”
은월이 흥분해 무어라 떠들려 하는데 한립이 그대로 대문을 날듯이 스치며 명령했다.
“나가서 다시 이야기 해!”
태묘신금을 깨트리며 한립은 고의로 화려한 광채를 터트려 다른 이들의 이목을 속였다. 그 사이 은월을 금제 틈으로 들여보냈기에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이다.
사실 다른 목적이 없었다면 한립이 겨우 우선 선택권을 위해 태묘신금 파훼를 자처했을 리 없었다. 은월이 이리 좋아하며 돌아온 것으로 보아 누각에서 쏠쏠한 수확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미리 선수를 쳐두었기에 과감히 남롱후와의 연합도 거절하고 먼저 달아난 것이다.
한립의 신형이 막 누각의 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경천동지할 굉음이 뒤쪽에서 터져 나왔다.
그가 서둘러 고개를 돌려 보니 옥기각(玉磯閣) 전체가 폭발하며 금빛이 치솟더니 그 가운데 희미하게 인영이 어른거렸다. 아마 남롱후가 어떤 비술을 사용한 듯했다.
과연 원영기 노괴의 목숨을 건 공격은 남달랐다!
한립은 이제 맨 처음 들어왔던 대청까지 빠져나왔다. 그가 굳게 봉해진 벽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자 수척 길이의 푸른빛이 뿜어져 나가 벽을 공격했다.
푸슉!
벽에 사발만한 구멍이 뚫리기는 했으나 순식간에 다시 메워졌다. 미간을 좁힌 그가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다가 돌연 몸을 휙 둘려 뒤로 물러났다.
본래 그가 서 있던 수 장 밖에 남롱후가 소리 없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가 온 몸에서 뿜어내는 금빛이 굉장했지만 얼굴은 창백해 무척 피로해보였다.
한립이 무표정하게 누각 쪽을 바라보니 거대한 금 대접을 엎어놓은 것처럼 옥기각이 남롱후의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안에서 검은빛과 흰빛이 번뜩이며 폭음이 들려왔다.
남롱후가 어떤 역천(逆天)의 술법을 사용했는지 놀랍게도 왕천고와 운 노인을 잠시나마 가둬둔 것이다.
“바깥 금제는 반드시 개산기(開山旗)를 이용해야 풀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개산기가 한 개 뿐이니 시간이 더 걸릴 테지요. 한 수사, 수고스럽겠지만 시간을 끌어주시겠습니까? 내 고보의 위력이 강대하다지만 저들을 오래 가둬두지는 못할 것입니다.”
남롱후가 쓴웃음을 지으며 들어올 때 외부금제를 풀었던 깃발 중 하나를 품에서 꺼내들었다. 그가 주문을 외우자 노란색 작은 깃발이 쉼 없이 돌기 시작했다. 마치 한립이 반드시 저들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는 표시였다.
한립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주저 없이 저물대에서 청록색 진법 원반을 꺼내들었다. 바로 태묘신금을 깨트릴 때 사용했던 진법 법기였다.
허공에 푸른 주술을 그려낸 한립이 숨결을 불어넣자 주술들이 표표히 원반위로 떨어지며 푸른빛이 범람했다.
“가라.”
그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냉랭히 명령을 내렸다.
남롱후가 마주하고 있는 벽을 제외하고 나머지 벽들에서 사라졌던 쪽빛 수정들이 다시 생겨나 대청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태묘신금을 펼친 것입니까?”
놀라운 광경에 남롱후가 주문을 외우던 것도 잠시 멈추고 물었다.
“본래 위력의 1할도 되지 않습니다. 저들을 오래 막지는 못할 것이니 어서 길을 열어 주시지요.”
태묘신금을 펼치고도 한립은 신중했다.
그제야 남롱후도 쪽빛 수정벽이 이전에 비해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희색을 지우고 주문에 집중했다. 노란 깃발이 빛줄기로 변해 벽을 뚫고 사라져서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려오며 한립이 펼친 금제가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왕천고 등이 남롱후의 고보를 깨버리고 수정벽에 맹공을 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미세하게 하얀빛을 뿌리기 시작한 석벽과 암담해진 쪽빛 수정벽을 번갈아 보던 한립이 결국에는 한 손을 영수대로 가져갔다.
웽웽웽웽.
동시에 삼색 서금충들이 날아올랐고 그의 수결과 함께 충갑술이 펼쳐졌다. 삼색 영충들의 구름이 그를 감싸고 미친 듯이 춤을 추더니 충갑을 형성한 것이다.
남롱후가 한립의 술법에 표정이 달라졌지만 지금은 살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니 상황을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잠시 후, 수정벽이 깜빡이는 정도가 심해져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았는데 동시에 정면의 석벽에서 쿠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석벽이 하얀 빛을 뿜으며 외부로 통하는 돌계단을 토해낸 것이다.
남롱후가 즉시 금색 빛줄기로 변해 쏘아져 나갔고 한립 역시 풍뢰시를 이용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남롱후를 앞질러 통로 중간까지 이르렀는데 뒤쪽에서 무언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풍뢰시를 써서 다시 한 번 통로 끝부분으로 이동했고 전력을 다해 뇌둔술을 펼쳐 눈 깜짝할 사이에 아주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가 막 수백 장 거리를 벗어났을 때 통로 안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리곤 눈부신 금색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달아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똑똑히 기억해라! 본 후가 네 놈들의 혼백까지 찢어 죽일 것이다!”
저주를 퍼부은 빛줄기에서 금빛이 크게 솟아올라 형태가 모호해지더니 통로에서 은색 빛줄기가 쫓아 나왔을 때는 가느다란 실처럼 변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종적을 감췄다.
한립 역시 하늘 끄트머리를 날고 있었기에 곧 작은 점으로 변해 사라졌다.
“무슨 둔술을 펼치기에 둘 다 이렇게 빠른 것입니까!”
검은 빛 속에서 왕천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롱후가 시전한 것은 당년 창곤 상인이 창립한 비술인 만척일선(万尺一線)입니다. 대량의 원기와 정혈을 대가로 순식간에 원거리에 도달하는 둔술인데 실처럼 가늘게 변해 이동하기에 추적이 어렵지요. 아마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텐데 의식으로는 감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한 가 녀석의 둔술은…… 기이한 날개와 천둥소리로 봐서 소문으로만 전해오던 뇌둔술 같군요!”
은색 빛 속에서 어두운 얼굴의 운 노인이 나타났다. 그때 노부인과 까무잡잡한 사내도 통로를 벗어나 마침 운 노인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괴이한 둔술을 사용한다면 둘 다 멀리 달아나 버릴게 아닙니까! 이제 어찌 한단 말입니까.”
노부인이 불안한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한 가 녀석이야 관심 없지만 남롱후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왕 선사, 운 선사, 나는 이번에 반드시 남롱후를 제거한다는 조건으로 이번 일에 끼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까무잡잡한 사내의 표정도 노부인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걱정 마시오! 방금 남롱후가 모두를 제압한 술법이 그의 수행으로 가당키나 하오? 중상을 입고 비술을 사용해 강제로 법력을 끌어올려 만척일선을 사용했으니 우리가 쫓지 않아도 원기를 회복하는데 100년은 걸릴 겁니다. 원영 중기의 수행을 회복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겠지요. 게다가 내가 추적이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했소?”
운 노인이 냉소했다.
“아, 운 형의 말씀은…….”
까무잡잡한 사내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계획을 물었다.
“이미 그를 죽이기로 결심을 하였으니 당연히 미리 손을 써두었습니다. 그가 단번에 300리를 날아가지 않는 이상 언제든 추적이 가능하단 소리지요. 게다가 그의 몸 상태로 만척일선을 얼마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소? 때가 되어 추격을 한다면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운 노인이 미리 단단히 준비를 해두었던 것이다.
“그럼 다행입니다. 이번에 왕 수사가 미리 흑옥련(黑玉蓮)을 주시고 이후 추마골의 비밀을 공유하겠다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이 늙은이가 모험을 감수하지도 않았을 테지요. 원영 중기 수사에게 원한을 사는 일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까무잡잡한 사내는 물론이고 노부인도 크게 안심하는 눈치였다.
“추마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번에 두 분이 애쓰셨습니다! 하지만 운 수사가 산수가 아니라 원래는 귀령문 장로였다는 사실은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설마 마도육종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장로들이 수없이 많은 것 아닙니까?”
까무잡잡한 사내가 조금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노부는 젊은 시절부터 귀령문 출신이지만 문파의 대소사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수사들을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귀령문 내에서도 이런 장로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지요. 본래 남롱후는 창곤 상인의 후인으로 노부와도 오랜 세월 교분이 있어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허나 얼마 전부터 정도 천극문 장로들과 어울리더니 그쪽에 귀의하려는 기색을 보이는 겁니다. 눈치를 줘가며 말려도 듣지 않더군요. 게다가 천극문의 세력을 이용해 추마골에 다녀올 생각을 하니 노부가 정도 세력의 확장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운 노인이 담담히 사정을 이야기 하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