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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92화 (149/2,000)
  • # 392

    392화. 화근

    붉은 피를 울컥 토해내며 남롱후 몸에서 금빛이 어른거렸다. 분노한 남롱후가 바로 소매를 털자 금색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와 백의 노인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노인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즉시 왕천고 등이 서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은색 바퀴를 회수해 검을 맞받아쳤다. 백의 노인의 서늘한 시선이 남롱후의 가슴으로 향했다.

    너덜너덜한 옷자락 사이로 푸른 가죽갑옷이 드러났다. 움푹 들어가기는 했으나 완전히 찢어지지는 않았다.

    “청서갑(靑犀甲)! 역시 그런 것을 입고 있을 줄 알았다!”

    백의 노인이 눈을 빛내며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허! 네 놈까지 매수당하다니!”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남롱후의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금색 검이 찬란한 빛을 내며 그의 앞을 막고 있었지만 누구라도 그가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 조심하시죠. 이곳에서 저 놈을 놓쳤다가는 이후 큰 후환이 될 겁니다.”

    백의 운 노인이 남롱후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당부했다. 마치 남롱후와 일면식도 없는 것 같았다.

    “걱정 마십쇼. 수적으로 우세한데다 상대는 중상을 입었으니 날개가 달렸다고 해도 달아나지는 못할 겁니다.”

    룡 수사가 음산하게 웃으며 입에서 희뿌연 비도(飛刀) 법보를 꺼냈다. 이때 왕천고가 한립을 향해 온화하게 물었다.

    “한 수사, 지금이라도 우리와 함께 저 자를 상대한다면, 저 자가 지닌 보물을 똑같이 나눠주겠소. 생각 있으시오?”

    진심 어린 목소리가 그와 왕선 사이의 은원 따위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운 노인의 기습을 보자마자 한립은 놀라 바로 계단 입구를 살폈다.

    역시나 남롱후가 당하는 그 순간 노부인이 소리 없이 입구를 막아서서 지키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한립은 벌써 열두 번은 더 달아났을 것이다.

    이 누각은 온통 하얀빛이 반짝이는 것이 대단한 금제가 걸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늘로 솟으려 해도 땅으로 꺼지려 해도 불가능하단 소리였다. 게다가 그들과 한 패를 먹자는 왕천고의 제안은 말 그대로 헛소리였다.

    아마 남롱후를 제거한후 다음 목표는 그일 것이다. 안 그랬으면 왜 처음부터 그만 빼고 연합을 했겠는가?

    처음부터 남롱후와 함께 그를 죽이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립은 대충 대답을 해주려했다. 하지만 남롱후가 냉소하며 먼저 말했다.

    “한 수사, 저런 얕은꾀에 넘어가지는 않겠지요! 왕 수사가 무슨 수를 써서 내 백년지기와 저렇게 많은 수사들을 포섭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힘을 합치면 아직 희망은 있소이다.”

    남롱후가 말을 하며 가슴을 짚은 손에서 하얀빛을 뿜어내자 움푹 들어갔던 앞가슴이 원상태로 회복했다.

    왕천고 등 다른 이들은 안색이 달라졌지만 운 노인이 차분히 그들을 독려했다.

    “비술을 써서 잠시 안정을 찾은 것뿐이니 다들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한 씨 녀석 때문에 시간을 끌지 말고 그냥 두 패로 나눠서 둘 다 제거하시지요!”

    백의 노인이 싸늘하게 말하면서 은색 바퀴를 가리키자 은색 빛줄기로 변한 법보가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와 보호막을 뿜어냈다.

    강한 빛 속에서 백의 노인은 거의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그도 남롱후가 자신에게 가장 배신감을 느낄 것을 알고 대비를 한 것이다.

    왕천고가 미간을 좁히기는 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서 옆에 선 룡 수사를 쳐다보았다.

    “룡 형, 일단 저 녀석을 맡아 주시지요. 사투를 벌일 것은 없고 시간만 끌어 주시면 남롱후를 없애고 합류하겠습니다.”

    왕천고가 드디어 숨김없이 살의를 드러냈다. 동시에 그의 몸 위로 수 척 가량 검은 기운이 뻗치더니 암흑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노부인과 까무잡잡한 사내도 잇달아 법보를 꺼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그럽시다! 한 수사는 내가 맡겠소!”

    룡 수사가 피식 웃으니 소매에서 스님이 설법을 할 때 들고 다니는 여의(如意) 비슷한 옥 막대가 흘러나왔다. 그는 원영 중기 수사와 상대하느니 원영을 응결한지 얼마 안 된 한립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안전할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한립은 제자리에 서서 다가오는 룡 수사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노부인이 계단 입구에서 물러나는 순간 소매 속에 가려진 한 손에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같은 시각 남롱후가 한 손을 털어 금빛 안개로 침상 옆의 옥함 3개를 휘감아 수중에 넣었다.

    “받으시오!”

    남롱후는 지체 없이 팔을 뻗어 그 중 하나를 한립에게 던져버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기에 누구도 막지 못했다. 가볍게 옥함을 쥔 한립이 약간의 의혹을 드러냈다.

    “수사가 저들과 뜻을 함께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본 후는 이 옥함을 주고 싶습니다. 만일 그 안에 추마골의 비밀이 담겨 있다면, 이곳을 빠져 나간 후 또 하나의 기연이 되어 주겠지요.”

    왕천고와 운 노인 등의 표정이 급변했다.

    고개를 숙여 옥함을 본 한립이 입가를 실룩거렸다. 너무 우스운 일이라 미친 듯이 웃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다.

    다들 갖고 싶어 하던 물건이 도리어 그의 손에 떨어지다니!

    물론 남롱후의 의도는 뻔했다. 화근이 될 옥함을 나눠가짐으로써 수사들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자신이 살아서 달아날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그래도 정말 대단한 결정이었다. 가까스로 얻은 보물의 일부를 양도하면서까지 살 길을 모색하다니 머리가 비상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었다.

    ‘어쨌든 기왕 내 손에 들어왔으니……. 하하!’

    한립이 냉소하며 손을 뒤집자 옥함이 저물대 안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왕선아, 너희도 룡 수사 쪽을 도와 저 녀석이 절대 달아나지 못하게 하거라. 이쪽은 우리로도 충분하다.”

    왕천고가 일순 안색이 어두워져서 왕선에게 분부했다.

    다른 이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보물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남롱후를 제거하는 것이 겨우 원영 초기인 한립을 없애는 것보다 더 시급했다.

    “예, 백부님! 저도 저 한립이란 놈을 맡고 싶었습니다.”

    왕선이 음산한 눈빛을 하며 대답하곤 뒤 쪽의 연여언에게 손짓 하며 한립을 향해 걸어갔다.

    연여언이 일순 복잡한 표정을 드러냈지만 아무 말 없이 왕선의 뒤를 따랐다. 한립은 그들을 보면서도 전혀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우습게도 누각 안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오히려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정이 남아 있어서 머뭇거리는 것은 절대 아니었고, 남롱후는 상처 입은 짐승과 같은 상태였으니 비장의 한 수를 써서 한두 명쯤은 데리고 같이 동귀어진 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원영기 수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펼치는 술수가 얼마나 악랄한지는 다들 잘 알고있으니 굳이 먼저 공격했다가 덤터기를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시간을 끌어 불리한 쪽은 왕천고 무리가 아니었다. 가부좌를 하고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는 남롱후의 부상은 점점 억누르기 어려워질 테고 그럴수록 승산은 높아졌다.

    이상한 일은 남롱후 역시 부상을 걱정하지 않고 꼼짝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의 뺨은 점점 붉어져서 거의 핏방울처럼 빨개지고 있었다.

    혹시나 이런 현상이 남롱후가 어떤 비술을 펼치고 있어서 나타나는 것일까 봐 왕천고 쪽 인물들은 더더욱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룡 수사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만 끌면 되는데 굳이 먼저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왕선은 당장이라도 한립을 공격해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수행이 부족해 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게 살기가 자욱한 가운데 누각 안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잠시 후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한립이 돌연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고요한 누각 안에서는 아주 도드라졌다.

    그러나 누각의 교활한 원영기 노괴들은 어느 누구하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시선을 끌어 남롱후에게 기습할 기회를 주려는 잔꾀라 여긴 것이다.

    정면에 있던 왕선이 입 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다들 남롱후와의 일전이 시작된 후에야 한립이 움직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모두 정신없는 틈을 타 달아나야 성공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한립이 한숨을 내쉬고 바로 행동에 들어갈 것이라 예측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룡 수사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한립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공중에 던져버렸다. 빙글빙글 돌던 거무튀튀한 물건이 미친 듯이 불어나더니 순식간에 일고여덟 장 크기로 커져 룡 수사와 한립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룡 수사는 그것이 놀랍게도 거무튀튀한 산봉우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축소된 산봉우리에 불과했지만 전신에서 검은 빛을 산발하는 것이 한 눈에 보아도 보물이었다.

    그러나 룡 수사도 잠시 멈칫 했을 뿐 당황하지 않고 옥 막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옥 여의가 웅웅거리며 빛을 뿜었고 그 안에서 집채만 한 백호가 튀어나왔다.

    비록 백호의 몸이 흐릿하기는 했으나 시뻘건 입을 벌려 사발 굵기의 광선을 뿜어내 검은 소형 산을 공격했다.

    쿠루릉!

    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산봉우리의 대부분을 휘감았다.

    옆에 서 있던 왕선도 주저 없이 수결을 맺어 핏빛 안개 속에 몸을 감추었다. 이제 누각 전체에 진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무표정한 연여언도 같은 수결을 맺어 핏빛 안개를 불러냈지만 피비린내 대신 괴상한 향기를 뿜어내 냄새를 맡는 이의 의식을 흐트러트렸다.

    룡 수사가 그들의 협공에 더욱 마음을 놓으며, 다시 한 번 백호가 빛기둥을 발사하게 조종하면서 다른 손으로 저물대를 스쳐 호리병을 불러냈다.

    그가 막 수중에 호리병을 넣었을 때 돌연 정면에서 천둥소리가 울려왔다.

    깜작 놀란 룡 수사가 얼른 수결을 맺어 두꺼운 보호막을 펼치자 거의 동시에 은색 번갯불이 번쩍이며 등 뒤로 날개를 단 한립의 신형이 그의 보호막을 스치듯 날아왔다.

    “헛!”

    대경실색한 룡 수사는 재빨리 호리병에서 남색 번갯불을 뿜어냈다.

    그러나 한립은 전혀 피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입을 벌려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숨결을 타고 가느다란 남색 화염이 뿜어져 나오더니 막힘없이 룡 수사의 보호막을 뚫고 그에게 분사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보호막을 뚫고 들어온 남색 화염은 당연히 룡 수사의 예상을 벗어났다.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가느다란 화염이 그의 목을 스쳤다.

    촤ㅤㄹㅘㄱ!

    한 호흡 만에 룡 수사가 수정처럼 얼어버렸다.

    한립은 저번에 목 수사와 싸웠던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특별히 목을 노렸다. 이렇게 하면 다른 비술을 시현할 틈을 주지 않고 상대를 얼려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건람빙염으로 상대를 얼려버림과 동시에 호리병에서 튀어나온 남색 번개도 한립의 얼굴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카캉!

    남색 번갯불이 한립의 얼굴에 닿기 전에 금빛 그물망이 순식간에 나타나 그의 전신을 에워쌌다. 금빛이 반짝이고 남색 번갯불은 순식간에 그물망에 흡수되어 종적을 감추었다.

    한립이 주저 없이 손을 뻗어 남색 호리병을 잡아챘다.

    그가 풍뢰시를 발동하고 룡 수사를 얼려버린 뒤 보물을 회수하는 과정은 일순간에 불과했다.

    막 핏빛 안개로 몸을 보호하고 룡 수사를 도우려고 했던 왕선은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꽁꽁 얼어있는 룡 수사와 마주했다.

    놀라운 광경에 그가 눈을 부릅떴다.

    한립이 냉랭한 시선으로 돌아보았을 때 왕선은 황급히 연여언에게 붙어 소리치고 있었다.

    “같이 술법을 펼쳐 혈영대법으로 저 자를 가두자.”

    그가 과격하게 연여언의 한손을 낚아채 쥐고는 서둘러 주문을 외자 핏빛이 급속도로 불어났다.

    연여언은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행동을 혐오하는 듯했다. 그녀가 잠시 주저하다가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하자 서로의 핏빛 안개가 융합되며 자줏빛이 섞인 핏빛이 한 데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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