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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91화 (148/2,000)
  • # 391

    391화. 분배

    번뜩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립이 막 움직이려는데 백의 노인의 신영이 반짝이더니 먼저 방석으로 다가갔다.

    그가 방석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을 보고 미간을 좁힌 한립은 창가의 화초로 다가가 자세히 관찰을 시작했다.

    “한 선배님은 음응초(陰凝草)에 관심이 가시나 봅니다. 보기 드문 것이 흠이지만 음한(陰寒)한 기운이 단약의 약성을 끌어올리기에는 가장 좋은 재료이지요.”

    그가 화초를 살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이채를 띤 한립이 천천히 몸을 돌리니 뜻밖에도 연여언이 서 있었다.

    “음응초는 다른 영초와 달리 100년째가 되었을 때 음기가 극에 달하지. 이것은 여기서 얼마나 있었던 것인지 쓸모가 없어졌군.”

    담담히 답을 해주며 살피니 왕선과 왕천고는 다른 이들과 보물에 대해 떠드느라 이쪽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진법 외에 연단술에도 이리 해박하시다니 정말 탄복하였습니다!”

    연여언이 빙그레 웃으니 눈에서 별이 빛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명백한 수작에 한립이 경계심을 키웠다.

    “잔재주가 많은 것뿐이다. 허나 연 수사도 나와 왕 수사의 관계를 모르지 않을 텐데 이리 한담을 나누고 있어도 될지 모르겠군?”

    “어찌 모르겠습니까. 잘 알고 있기에 신첩이 선배님과 부군 사이의 오해를 풀고자 나선 것입니다.”

    연여언이 미소를 지으며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오해를 푼다?  어차피 마도와 우리 천도맹은 적대 관계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연여언이 뭐라 대답을 하려는데 멀리서 남롱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모여주시지요! 일단 1층의 보물을 배분하고 2층으로 함께 올라가 봅시다.”

    그 소리에 한립은 연여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먼저 걸음을 떼었다. 연여언의 아름다운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으나 말없이 일행에게 걸어갔다.

    왕선이 한립을 따라 다가오는 연여언을 보고 놀랐으나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을 뿐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자, 함께 확인을 해본 결과 이곳에는 고보 6개와, 법보 10개가 있었습니다. 재료와 단약도 비슷비슷하게 여덟 등분을 해놓았고요. 제련 없이 최상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고보를 다들 가장 원할 겁니다.

    하지만 여기 법보들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지요. 당년 창곤 상인이 무수히 많은 적들을 물리칠 때 사용했던 위력적인 법보들이기에 제련이 필요하고 본 위력에 7할 밖에는 사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귀한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각자 무엇을 선택할지는 알아서 정하시고. 왕선 수사와 연여언 수사는 둘이서 한 명 몫을 가져가야 합니다.”

    남롱후가 물건들을 탁자 하나에 모아놓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 나이에 언제 법보를 제련하고 있는 답니까. 고보로 하겠어요!”

    노부인이 체면도 차리지 않고 나이를 내세워 자신이 고보를 갖겠다고 주장했다. 다들 표정변화는 없었지만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왕천고가 남롱후와 백의 노인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남롱 수사와 운 수사는 먼저 안 고르십니까?  2층에는 두 분이 원하는 보물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왕 형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갑자기 남롱후가 표정이 달라지더니 목소리도 조금 싸늘해졌다. 백의 노인도 불쾌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이라뇨?  그저 두 분께 우선권이 있는데 혹시라도 기회가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되어 하는 말입니다.”

    왕천고는 가볍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거두었다.

    “흥! 여기에는 나나 운 수사가 선점할 만한 물건은 없습니다. 혹시 한 수사는 원한다면 이 중에서 고르면 되겠습니다.”

    안색이 싸늘해진 남롱후는 여전히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저도 이번에는 욕심 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2층에 가서 다시 이야기 하시지요.”

    턱을 쓰다듬던 한립도 고민 없이 선점권을 뒤로 미루었다.

    “그러면 이번 배분은 공평하게 세 개씩 가는 겁니다. 일단 우선 고보를 선택하면 두 번째 선택 시에 법보는 고를 수 없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왕천고가 바로 진행을 했다.

    “좋습니다.”

    “그러지요!”

    다른 이들이 공평하다 여겼는지 잇달아 동의했다.

    한립은 위력은 알 수 없었지만 대나무로 만든 통 모양의 죽통 고보를 선택해 주저 없이 저물대 속으로 집어넣었다. 두 번째로는 약속한대로 법보 대신 재료와 단약 뭉치를 가져왔다.

    마지막 세 번째에서 모두가 법보를 하나씩 선택해 1층 보물들의 배분이 끝났다. 다만 방석의 경우 백의 노인이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던져 버리는 것을 보고는 한립도 관심을 끊었다.

    음응초 화분 쪽으로도 몇 명이 다가가 살폈지만 무엇인지 알아보고는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서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모두 누각 안의 모든 물건들을 샅샅이 점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보물 외에도 이런 유적지에는 숨겨진 보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수색을 마친 수사들이 무리를 지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2층으로 올라가던 이들은 전부 중간에 멈춰서고 말았다.

    2층으로 향할수록 단향목(檀香木) 냄새가 코를 찌르더니 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제단에는 머리는 셋에 팔은 여섯, 뿔이 하나 달린 요신(妖神)의 금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금색 요신 동상은 얼굴이 아주 흉악했으나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제단 앞에는 하얀 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내는 새빨간 화로가 놓여있어서 목단향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한립은 삼두육비(三頭六臂)의 요신 조각상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조각상은 그가 지니고 있던 범성진편 조각에 새겨진 요수와 꼭 닮아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분노해 눈을 부릅뜬 표정이나 여섯 팔을 하늘 높이 쳐든 것까지 똑같았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한립은 제단 이외의 것도 샅샅이 빠르게 훑어나갔다.

    제단 좌측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평범해 보이는 책상과 의자가 보였고 그 위에 벼루와, 붓, 서책 등이 쌓여 있었다.

    우측으로는 옥으로 만든 남색 침상이 보였는데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 특수한 옥을 깎아 만든 것 같았다.

    침상의 머리맡에 크기가 제각각인 옥함이 세 개 놓여 있는 것이 굉장히 눈에 띄었다. 누각의 2층은 창곤 상인이 침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인영이 어른거리더니 백의 노인이 돌연 침상으로 다가가 옥함 중 하나를 잡아채려했다.

    “잠깐 기다리시죠!”

    거의 동시에 또 다른 인영이 검은 빛을 쏘아 노인의 등을 노렸다.

    “뭐 하는 짓이오! 지금 노부와 해보겠다는 거요!”

    운 노인이 손을 물려 기습을 피하면서 사나운 눈초리로 공격한 자를 노려보았다.

    공격한 자는 뜻밖에도 소매를 나부끼고 있는 왕천고였다.

    “운 형, 너무 서두르지 마시죠! 전 그저 우선권을 그 옥함에 쓸 건지 확인하려했을 뿐입니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고 결정해야겠지요. 쓸모없는 물건이라면 노부가 가져가봐야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운 노인이 평정을 되찾고 왕천고를 응시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두 분이 보물을 하나씩 선택해 가진 후 나머지 사람들이 공평하게 분배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2층에 그 옥함들을 제외하면 나눌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는데요?”

    왕천고는 두려운 기색도 없이 옥함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설마 약속을 어길 작정입니까!”

    이번에는 남롱후가 백의 노인과 나란히 서서 귀령문 세 사람을 향해 음산한 시선을 던졌다.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2층에는 모두가 나눠가질 충분한 양의 보물이 없는 것 또한 사실 아닙니까?  옥함 속은 의식으로도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십중팔구 누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 들어있겠죠. 창곤 상인의 심오한 공법이라던가 추마골에 대한 비밀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 분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한 후에 선택을 하는 것은 너무 과분해 보입니다!”

    왕천고는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과분하다?  우리가 먼저 보물을 고르기로 약조를 해놓고는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이오!”

    백의 운 노인이 얼굴을 굳히며 냉랭히 소리쳤다.

    “그리 말할 수는 없지요. 여전히 두 분에게 우선권은 있습니다. 하지만 꼭 함을 열어서 안을 확인한 다음에 가져가란 법은 없지요. 싫으시면 다른 것을 고르십시오. 저 침상도 한기를 필요로 하는 공법을 익히는 수사에게는 더없이 귀한 보물일 것 같은데요.”

    예상을 깨고 갑자기 노부인이 왕천고를 두둔했다.

    그 말에 남롱후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며 동시에 온 몸에서 기세를 발산했다. 순간 왕천고와 노부인도 안색이 변해 한 발짝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원영 초기와 중기의 차이는 적지 않았던 것이다.

    “또 왕 형과 같은 생각인 분은 나서보시지요. 왕 형이 이리 말하는 것을 보니 이미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있을 테니!”

    남롱후가 칼날 같은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쓸어 보았다.

    “남롱 선사, 그리 화내실 일이 아닙니다! 왕 형의 말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약속을 했더라도 다른 이들도 나눠먹을 거리는 남겨주셔야죠.”

    까무잡잡한 사내가 침묵을 하다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룡 수사가 그간의 불화도 잊은 듯 조용히 왕천고 뒤편으로 이동했다.

    이제 한립을 제외하면 누각 안의 수사들이 두 편으로 갈라섰다. 남롱후와 백의 운 노인이 그들을 보고는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보아하니 벌써 작당을 마친 것 같은데. 언제 상의를 하셨소?  오는 길에는 기회가 없었을 것인데.”

    남롱후가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물었다.

    “작당까지는 아니고 출발 전에 잠시 회동을 하였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거나 위기에 처하면 어찌 해결을 할지 의논을 해두었는데, 마침 지금 상황이 그 중 하나에 해당되는 군요.”

    왕천고의 유유자적한 대답에 남롱후가 어두워진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한 수사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원영 중기 수사 둘이서 원영 초기 수사 넷과 결단 후기 수사 둘을 상대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룬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아무런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있는 한립의 선택이 중요해진 것이다.

    한립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슬쩍 꺾어 왕천고 쪽의 동태를 살폈다.

    왕천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보였는데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만 뒤쪽의 왕선과 연여언은 그들이 따로 연합한 것을 모르고 있었던지 상당히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태 부인과 룡 수사 역시 당황하는 기색 없이 한립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한립은 단번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경계심을 높였다.

    그가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서 두 패거리와 모두 거리를 벌리며 웃었다.

    “저는 별 다른 의견이 없으니 왕 선사와 남롱 형이 상의를 하셔서 결론을 내시지요. 한 모는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남롱은 놀라지 않았다. 평소 한립의 태도로 보아 중립을 택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방금 물어 본 것도 그저 확실히 해두자는 생각에 불과했다.

    남롱후는 훨씬 온화한 시선으로 한립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냉랭히 왕천고를 바라봤다. 그러나 남롱후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백의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남롱 형, 저런 자들과 무슨 말을 더 한단 말입니까! 너희가 몇몇이 힘을 합친다고 우리를 어찌 할 수 있을 것 같더냐!”

    백의 노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입을 벌리니 하얀 빛이 번뜩였다. 당장이라도 법보가 튀어나올 모양새였다.

    “운 형, 잠시만 기다리시오! 잠깐만 상의를……. 헛, 네 놈이!”

    남롱후가 급히 운 노인의 충동적인 행동을 막으려했다. 사실 정말 이 좁은 곳에서 저들과 결투를 벌였다가는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의 운 노인이 맹렬히 고개를 꺾어 입에서 뿜어낸 은색 바퀴를 지척에 위치한 남롱후에게 날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펑!

    믿기지 않는다는 남롱후의 시선을 받으며 금색 보호막을 뚫은 바퀴가 그의 가슴을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그의 기습에 남롱후는 몇 걸음이나 물러났을 뿐 아니라 앞가슴이 움푹 함몰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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