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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90화 (147/2,000)
  • # 390

    390화. 두루마리

    쿠쾅!

    뢰화추가 순간 터져나가며 빛을 잃었고 수정벽은 다시 원래의 안정을 되찾았다. 노부인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분노를 드러냈다.

    갖은 고생을 해서 겨우 얻은 고보가 이렇게 망가지다니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여언 만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립을 힐끗거렸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던 노부인은 시간이 잠시 흐르자 평정을 되찾았다.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십대고대금제 중에 하나로 꼽히는 태묘신금은 과연 대단하군요. 다른 수사께서도 도전하고 싶으시다면 하시지요!”

    노인이 고개를 돌리며 쓴웃음을 보였다. 기뻐하던 기색이 싹 사라진 남롱후가 탄식했다.

    “거의 성공할 뻔 했었는데 너무 아쉽습니다. 태 부인 말씀대로 다른 분들 중에는 시도해보실 분이 안 계십니까?”

    그러나 이미 태 부인이 귀한 고보 하나를 날려먹는 것을 본 다른 수사들은 도전할 마음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굳이 실패할 도전을 해서 귀한 보물을 망칠 이유는 없었다.

    왕천고만 해도 대청 한쪽에 서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상고시대 진법에 대해 약간의 연구를 했던 것은 사실이나 십대고금으로 불리는 금제를 깨트려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줄곧 아무 말 없던 한립이 아주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한번 시도해 볼까하는데 괜찮으실지요.”

    별 일 아닌 듯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왕천고와 운 노인마저 예상 밖이라는 듯 주목했다. 남롱후도 놀라기는 했지만 아주 흡족해 하며 반겼다.

    “당연하지요! 한 수사 마음껏 해보시죠!”

    한립이 바로 앞으로 나서 노 부인이 공격했던 벽이 아닌 다른 쪽으로 향했다.

    한립은 수정 벽 앞에 서서 바로 행동에 들어가지 않고 손가락을 펼쳤다. 몸의 영력을 조절해 손끝에서 수 촌 길이의 푸른 검기를 일으킨 것이다.

    푸른 검기에 스친 벽면은 마치 깃털이 스치고 지나간 듯 아무런 손상도 없었다. 그러나 한립은 전혀 실망하지 않고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펼쳐 손바닥을 수정벽에 가져다 대었다.

    한립의 이상한 행동에 다들 의아해했지만 아무도 방해하지는 않았다.

    다들 모르고 있었지만 일부러 그들을 등진 한립의 눈동자 깊은 곳에 미약하나마 남색빛이 일렁였다. 그는 수정벽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중이었다.

    반각이나 그러고 있었지만 아무도 재촉하거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때 한립이 길게 숨을 토해내며 눈동자 속 남색빛의 일렁임도 함께 소실되었다.

    한립이 저물대를 스쳐 무언가를 잔뜩 꺼내들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니 열댓 개의 진법 깃발들이었다.

    ‘뭐 하려는 거지? ’

    “한 수사가 진법에도 정통한지 몰랐습니다. 아마 방금은 태묘신금의 파훼법을 깨우치느라 시간을 보낸 모양이군요?”

    다들 어리둥절한 가운데 백의 수사가 알겠다는 듯 물었다.

    “파훼법까지는 깨우치지 못했으나, 이전에 비슷한 상고시대 진법을 연구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도전이나 해보는 것이지요.”

    한립이 아무렇지 않게 답하고는 입을 벌려 푸른 정기를 진법 깃발들에 불어넣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진법 깃발들이 수정 벽면을 가리킨 채 떠올랐다.

    한립이 수결을 맺자 열댓 개의 깃발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깃발들은 괴상한 배열을 만들었는데 복잡하면서도 현묘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보였다.

    그가 주문을 외우며 손에서 깃발들을 향해 열댓 개의 법결을 뿜어냈다. 동시에 깃발들이 부들부들 떨며 각양각색으로 빛나더니 서로에게 광선을 뿜어내 괴이한 모양을 만들며 연결되었다.

    왕천고, 남롱후 등 진법에 정통한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무언가 익숙하면서도 전혀 보지 못한 수법이라 마음이 복잡해진 것이다.

    다만 한립은 그들이 자신의 진법 배열을 연구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낮은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그러자 진법에서 하얀 빛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와, 뚫어져라 그것을 살펴보던 이들도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나 노련한 노괴들이라 눈에 영력을 주입해 바로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 결과 쪽빛 수정벽에 진법 깃발들이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는데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 마냥 아주 자연스러웠다.

    남롱후와 백의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한립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왕천고는 안색이 슬쩍 변했다가 얼른 돌아왔다.

    그 뒤에 서 있던 왕선은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나타내며 크게 놀란 것 같았고 연여언은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리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수정벽을 보고 있었다.

    이때 한립이 수정 벽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 양 손을 벽에 대고 빛을 뿜었다. 마치 진법 깃발들이 호응이라도 하듯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으니 순식간에 수정벽 전체가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 한립이 벽에서 손바닥을 떼더니 신형이 흔들거린 후 다른 벽면으로 향했다.

    또 한참을 응시하다가 한 무더기의 진법 깃발을 꺼내 같은 일을 반복했다. 하얀 빛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온 후 벽에 깃발들이 꽂혀 있는 광경이 또 펼쳐진 것이다.

    다들 한번 당해본 터라 이번에는 눈에 영력을 주입해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한립이 너무 쉽게 수정벽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는 모습에 다들 혀를 차며 감탄했다.

    동서남북 각 벽면에 일일이 깃발을 설치를 하느라 어느덧 반 시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아무도 초조해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강력한 상고시대 금제를 순식간에 깨버린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물론 한립의 물 흐르듯 막힘없는 거동이 모두에게 믿음을 심어주기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립이 바로 대청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자 청록색 진법 원반이 나타났다.

    한립이 원반에 법결들을 던져 넣으니 사면에 설치된 깃발들과 원반이 동시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깨져라!”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마치 짙은 안개에 휩싸이듯 대청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찼고 귀를 찌르는 듯한 공명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쿠루룽!

    빛이 흩어지고 일순 대청 안에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어둠이 가시자 다른 수사들은 사면의 기이한 수정벽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평범한 석벽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석벽 한쪽에 부채꼴 모양의 널찍한 석문도 생겨나 있었다.

    “한 수사가 진법에 이렇게 고명한 줄이야! 정말 이 어마어마한 금제를 깨트렸습니다! 좋습니다, 이후 보물을 찾게 되면 나와 운 수사가 보물을 고른 후 수사도 보물 한 개를 선점하면 되겠어요.”

    남롱후는 희색이 만연한데다 퍽 격앙되어 있었다. 백의 노인도 석문을 보고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는데 눈빛이 불타올랐다.

    “남롱 형, 어서 들어가서 어떤 보물이 있나 살펴봅시다! 안에 다른 금제가 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룡 수사도 기분은 좋았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럴 리 없으니 걱정 마시지요. 창곤 상인의 유언에 따르면 이곳에는 단 두 개의 금제만이 남아 있습니다.”

    남롱후가 자신 있게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석문을 향해 소매를 펄럭였다.

    가볍게 석문이 열고 드러난 광경에 다른 수사들도 근심을 털어버리고는 서둘러 남롱후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노부인이 석문 안쪽의 전경에 놀라 중얼거렸고 다른 이들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석문 뒤에는 원래 대청보다 몇 배는 큰 공간이 숨어 있었는데 그 중간에 앙증맞게 누각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백옥을 깎아 만든 2층 높이의 누각은 십여 장 높이로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누각의 대문 위에는 ‘옥기각(玉磯閣)’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동굴 안에 세워진 누각이라니 정말 기이했다.

    옥기각 앞쪽에는 새까만 제례용 상이 있었는데 그 낡은 상 위로 수 척 길이의 은백색 두루마리가 은빛을 반짝이며 놓여 있었다.

    널따란 대청에는 다른 물건도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보물들은 누각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인가? ’

    다들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롱후와 백의 노인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백의 노인이 먼저 신중하게 제례용 상으로 다가갔다. 다른 수사들은 그를 주시하면서도 막지는 않았다.

    운 노인이 머뭇거리며 바로 두루마리를 손으로 잡지 않고 입에서 하얀 안개를 뿜어냈다. 그러자 안개에 휩싸인 두루마리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스르륵 펼쳐졌다. 장검을 등에 맨 유생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을 수놓아 남긴 그림이었다.

    “창곤 상인일까요?”

    무표정한 수사가 그림을 보고는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요. 이곳에 모셔져 있으니까요. 다만 별로 귀중한 물건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왕천고는 눈을 빛내며 누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늙은이가 한번 시험을 해보겠습니다!”

    운 노인이 생각 끝에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붉은 법결들을 그림으로 뿜어냈다. 두루마리는 은색 빛을 분출하기는 했지만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다.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평범한 그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운 노인이 자신의 법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두루마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일단은 지니고 있다가 다른 보물들을 찾은 후에 누가 가질지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줄곧 그랬듯 남롱후가 제안을 했다.

    “그러시죠. 남롱 수사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노부인이 두루마리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어차피 다른 보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다른 수사들도 두루마리에 집착하는 이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운 노인이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저물대에 넣어두었다.

    “그럼 가십시다! 누각을 살펴봐야지요!”

    남롱후가 누각을 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였다.

    일행들이 제례용 상을 빙 돌아 굳게 닫힌 누각의 대문 앞으로 다가갔고 남롱후가 이번에는 서둘러 문을 열어젖혔다.

    끼익.

    일행 등은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반짝이는 빛에 눈길을 빼앗겼다.

    누각 1층에는 길고 가느다란 흑단 탁자가 세 개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쌓인 물건들에서 오색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남롱후나 백의 노인은 물론이고 다른 수사들도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다들 연륜이 있는 터라 다른 수사들이 경계를 할 만한 경솔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일행 모두가 마음속의 강렬한 욕망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누각 안으로 들어가 찬찬히 보물들을 살펴보았다.

    3개의 흑단 탁자가 1층 중간에 나란히 놓여 있으니 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탁자에는 화려한 빛을 뿜어대는 고보, 법보가 열댓 개 정도 놓여있었다. 두 번째 탁자에는 희귀한 재료들과 주먹만 한 덩어리들이 쌓여 있었는데 수정부터 갖가지 보석류가 모여 있었다.

    세 번째 탁자에 놓인 물건들의 양이 가장 적었다. 작은 약병들이 몇 개 있었는데 안에는 단약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보물들을 훑어보는 한립의 시선 속에서는 도무지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수사들의 경우 충동을 억누르고 평정을 가장하긴 했으나 보물들의 가치를 가늠해가며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미리 마음을 정해 놓아야 배분할 때 좋은 것을 골라 갈 수 있을 테니까.

    잠시 후 남롱후가 나서서 모두를 대표해 각각의 보물을 점검했다. 다른 이들도 그에게 협조해 보물의 용도나 내력에 대해 토론했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는 와중에 한립은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물이 아닌 것을 둘러보았는데 방석 하나와 창가에 놓인 파릇파릇한 화분을 제외하면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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