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9
389화. 뢰화추(雷火錐)
삼베옷을 입은 법사가 차분하게 불꽃으로 손을 뻗으니 뜻밖에도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전음부였다.
“뭐라? !”
삼베옷 수사가 재빨리 의식을 불어 넣어 전음부의 내용을 파악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수백 장 밖의 수사들도 그의 놀란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그가 입술을 달싹여 옆에 있는 녹의 수사에게 전음을 보냈고 사나운 인상의 녹의 법사도 안색이 변했다.
그리고 두 법사가 눈을 부릅뜨고 수사들 틈의 한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한립은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아마 목 노인이 중상을 입고 원영이 되어 달아난 일을 전해들은 것이겠지. 저들은 목 노인과 친분이 있는 자들인가? ’
그들이 노려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담담하게 서 있는 한립을 보고 두 법사가 머뭇거렸다.
둘은 서로 전음을 주고받더니 지체 없이 빛줄기로 변해 왔던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모습에 수사들도 당황했지만 추격을 하지는 않았다.
곧 두 점으로 변한 법사 둘이 영영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둘이 한 수사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아는 사이입니까?”
왕천고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물어왔다.
“모릅니다. 모란 초원에는 처음 오는 것인데 어찌 법사들과 안면이 있겠습니까.”
전혀 망설임 없는 답변이었다. 남롱후가 슬쩍 눈썹을 끌어올렸다가 금방 얼굴을 풀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움직이시죠. 금제를 풀고 보물을 찾아 어서 모란 초원을 떠납시다. 모란 초원이 오래 머물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롱후가 시간이 없다는 듯 재촉했다. 왕천고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남롱후의 제안에 반대하지 않았다.
두 법사의 표정만 봐도 한립에게 원한이 있다는 것은 명명백백했는데 이유가 뭔지 따져 보아야 뭐하겠는가?
이렇게 남롱후와 백의 노인의 안내를 받으며 빛줄기가 신속하게 구릉지대를 벗어났다.
* * *
반나절 후, 수사 일행들이 석산에 도착했다. 겨우 수백 장 높이에 풀 한 포기 없는 돌산은 주변의 거대한 석산과 비교되었다.
다른 수사들은 이런 별 볼 일 없는 곳에 정말 창곤 상인의 거처가 숨겨져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영기가 희박하기까지 한 초라한 돌산이라 남롱후가 안내하지 않았다면 절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여깁니다. 나와 운 수사가 일단 외부의 금제를 열 테니 따라오시면 됩니다.”
남롱후가 백의 노인과 나란히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각자 품에서 작은 깃발을 하나씩 꺼내들었는데 하나는 녹색 빛이 반짝이고 다른 하나는 노르스름한 면에 은은하게 주술이 나부끼는 것이 평범한 물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수사들이 그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차분히 주문을 외자 깃발의 빛이 강해지며 날아올라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가라!”
남롱후와 노인의 손에서 깃발들이 튀어나갔다. 빛이 사라지고 깃발들이 평범해 보이는 돌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한참동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몇몇 수사들이 의문을 나타내려는 찰나 땅이 흔들리고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발밑의 진동을 타고 돌산 아래부터 꼭대기까지 금이 가더니 은은하게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놀랍게도 돌산 자체가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다른 수사들이 이런 일을 벌인 남롱후와 백의 노인의 능력에 한층 경계심을 키웠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든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는 원영기 수사들과 달리 수행이 가장 낮은 왕선과 연여언은 왕천고의 뒤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립이 슬쩍 둘을 훑어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보아하니 보물을 가지고 돌아 나오기 전에는 왕선을 처리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드디어 남롱후와 백의 노인의 중얼거림을 멈추었고 돌산은 이미 갈라져 십여 장 정도의 거대한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속으로 지하로 연결된 푸른 돌계단이 보였다.
“가시죠.”
백의 노인이 눈을 빛내며 먼저 걸어갔고 남롱후도 미소를 보이며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에 한립이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백의 노인은 원래도 수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보니 남롱후 쪽도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다른 수사들도 눈치 챈 것 같았지만 다들 워낙 간교하여 티를 내지는 않았다.
계단이 꽤나 길게 이어졌고 양쪽에 월광석이 박혀는 있었지만 내려가면 갈수록 더욱 어두침침해졌다.
일행들은 곧 돌산 아래 백 장 깊이까지 내려갔다.
본래 하얀빛을 내뿜던 월광석도 음울한 녹색 빛으로 바뀌더니 주변의 기운 또한 한층 음산해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한립이 앞에서 걸어가던 까무잡잡한 수사와 거리를 벌렸다. 의외의 상황이 발생해도 반응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한립 뿐 아니라 남롱후와 백의 노인을 제외한 모든 노괴들이 다들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다들 거리를 벌리다 보니 일행들이 십여 장이나 늘어져 걷게 되었지만 남롱후와 운 노인은 뻔히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장 한 시진을 걸어 내려가서 일행들이 하나둘 신비로운 분위기의 대청 안으로 빠져나왔다. 대청의 네 면이 쪽빛 수정처럼 빛났기에 마치 청자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수십 장 너비의 거대한 대청 안에 들어선 이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한립은 대청에 들어서는 순간 의식을 퍼트렸으나 벽에 반사되어 고스란히 튕겨 나왔다. 예상한 일이라 놀라지 않고 차분히 대청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왕천고와 룡 수사들도 탐색을 마쳤는지 조금 인상을 굳히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태묘신금(太妙神禁)이 펼쳐진 곳인가? 남롱 수사의 말에 과장이 없었군.’
한립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청이 흔들거리며 연달아 굉음이 들려왔다.
노부인 등 일행들이 서둘러 소리가 난 곳을 보니 그들이 내려온 입구가 사라지고 다른 벽과 마찬가지로 쪽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남롱 수사, 무슨 뜻입니까?”
까무잡잡한 사내가 어두운 얼굴로 따졌다. 왕천고와 다른 수사들도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걱정도 많으십니다. 바깥 금제가 스스로 닫힌 것이니 걱정 마시지요. 우리가 저번에 왔을 때도 이렇게 이곳에 갇혔으나 3일 정도 기다려 금제가 가장 약해진 틈을 타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외부금제가 닫혔으니 우리를 쫓는 법사들에게도 발각되지 않을 거 아닙니까?”
남롱후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 말을 정말 믿는지는 모르겠으나 까무잡잡한 수사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안색이 한결 평온해졌다.
“그렇군요! 방금은 제가 실례 하였습니다.”
“실례는요 무슨! 어서 금제나 풀어봅시다. 태묘신금은 결코 만만하게 볼 금제가 아닙니다.”
“이 금제가 그리 대단하단 말이지요? 이 늙은이가 일전에 얻은 보물이 하나 있는데 금제를 푸는데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체할 것 없이 제가 한번 금제를 깨보아도 될런지요?”
노부인이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예상 밖의 제안을 했다.
“호오! 태 부인에게 그런 보물이 있다면 그리하시지요. 어차피 우리가 준비한 의식 화형의 수법이 꼭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으니까요.”
백의 노인과 남롱후가 기뻐하며 동의했다.
“그럼 만일 제가 금제를 깨버린다면 두 분과 마찬가지로 먼저 보물 하나를 선점할 수 있을 지요?”
노부인이 자신이 나선 이유를 밝혔다. 그 말에 무표정한 수사는 물론이고 왕천고 등의 안색이 변해 남롱후와 백의 수사의 답을 기다렸다.
남롱후도 의외였던지 슬쩍 백의 노인의 표정을 살피고는 모두를 향해 공표했다.
“태 부인뿐 아니라 누구든 금제를 깨트린다면 우리와 같이 보물의 선점권을 공유하는 것으로 하지요.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그러면서 남롱후가 다른 수사들의 표정을 세세히 살폈다. 한립과 왕천고는 상관없다는 얼굴이었고 까무잡잡한 수사와 룡 수사는 조금 불쾌해 보였지만 굳이 반대를 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다른 수사들도 동의하는 듯 하니 태 부인은 하고 싶은 대로 하시지요.”
“예, 그러지요.”
노부인이 흐뭇해하는 것이 자신의 보물에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았다.
환영진과 같은 무형의 금제만 아니면 충분히 깨트릴 수 있다고 자신했기에 다른 수사들의 심기를 거스를 각오를 하면서라도 나선 것이다.
태 부인이 소매를 펄럭이니 수 촌 크기의 작은 물체가 나타났다. 앞은 뾰족한데 뒤로 갈수록 두툼해 지는 것이 붉은 송곳과 비슷했다.
부인이 입을 벌려 밝은 빛을 토해 송곳에 쏟아붓자 붉은 빛이 대청 전체를 채워버렸다. 견문이 넓은 원영기 수사들은 태 부인의 보물이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파팟!
빨간 송곳에서 하얀빛이 반짝이며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른 수사들이 놀라 자세히 살피니 화염 속에 희미하게 하얀 번갯불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 보물은 놀랍게도 벼락과 불의 속성을 모두 지닌 고보였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노부인이 벼락을 품은 불타오르는 송곳을 쪽빛 벽으로 투척했다. 그러자 천둥소리와 함께 불길도 더욱 거세졌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다들 안색이 변했다. 한립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고보는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만일 풍뢰시가 없다면 달아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가라.”
노부인의 음성과 함께 뢰화추가 쪽빛 수정벽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펑!
벼락을 품은 불길이 벽을 전부 휘감아 일순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한립이 동공을 수축하며 집중했다.
비록 뢰화추의 위력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영기의 파동만으로도 대단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 부인이 자신 있게 나설 만 했다.
‘그래도 고대 금제 중 이름 난 태묘신금(太妙神禁)인데 이 정도로는…….’
한립이 분석을 마치기도 전에 불길은 사라졌다. 뢰화추가 벽 앞에 둥둥 떠 있었고 쪽빛의 벽은 멀쩡하기만 했다.
금도 가지 않은 쪽빛 벽에 다들 실망한 기색이 다분했으나 그래도 남롱후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태묘신금에 비해서는 능력이 떨어지더라도 대단한 보물을 지니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도전해 볼 생각이 없으십니까?”
“제가 이게 끝이라고 했던가요? 진정한 위력은 아직 펼치지도 않았습니다.”
노부인은 체면이 상했다고 여긴 건지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아! 그렇다면 마음껏 시도하시지요.”
남롱후의 웃음기가 짙어졌다.
노부인이 즉시 수결을 맺으니 허공에 떠있던 뢰화추가 그녀의 머리 위로 돌아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뢰화추를 감싸고 있던 불꽃과 벼락이 합쳐지고 있었다.
다들 이 신기한 현상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뇌화추의 벼락과 화염이 융합되어 붉은색의 요사스러운 번개 불이 번쩍였다.
“깨라!”
촤락!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괴이한 벼락이 사라지더니 다시 한 번 쪽빛 벽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불길이 폭발하지 않고 ‘ㅤㅍㅠㄱ’ 하는 작은 소리만 울렸다.
뇌화추가 고속회전과 새빨간 번갯불의 힘을 이용해 쪽빛 벽에 박혀 들어간 것이다. 비록 쪽빛 벽에 박힌 이후 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여전히 노부인의 조종을 받아 앞으로 전진 하고 있었다.
백의 노인과 남롱후는 기뻐했지만 왕천고와 룡 수사 등 다른 수사들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립이 몰래 냉소하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다른 이들은 모두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연여언 만이 그를 주시하다 그의 조소를 발견했다.
여인이 멈칫하며 의아해했다.
그때 쪽빛 수정벽 안으로 한 자나 파고 들었던 뢰화추가 역습을 당했다. 본래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던 수정벽이 쪽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하얀 실 같은 것이 튀어나와 뢰화추를 꽁꽁 감아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