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
384화. 위험천만
10대 금제라니 이름만 들어도 쉽게 깨트릴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한립의 얼굴에 미세하게 의아한 기색이 스쳐 사라졌다.
“왕 형이 진법에 대가라는 이야기는 일찍부터 들었지만 이런 상고시대 금제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남롱후와 백의 노인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칭찬을 해댔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이름을 주워들었을 뿐 금제의 구체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왕천고가 마치 무언가를 눈치 챈 듯 바로 겸손하게 물러났다. 백의 노인이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
“몇 년간의 연구 끝에 금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물리적인 충격을 가해 금제를 깨는 것과 여덟 명의 강대한 의식을 지닌 수사를 찾아 의식 화형을 통해 금제를 푸는 것이지요. 강제로 금제를 부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영기 수사 둘이 며칠 밤낮으로 공격을 해대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곳은 모란 초원이니 그렇게 눈길을 끄는 짓을 할 수야 없지요. 다만 의식 화형으로 금제를 풀 경우 여러분의 강대한 의식이면 하루 안에 금제를 푸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제야 모인 이들이 남롱후의 의도를 이해했다.
아마 원영 중기 수사들로 모임을 구성했다면 일은 더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남롱후와 백의 노인은 자신들이 수행으로 밀리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원영 초기 수사들만을 모은 것이다.
원영 중기인 두 수사가 협공하면 다른 이들이 연합을 해도 비등비등할 테니 평형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마골의 보물이라니 한립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하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란 초원이 아무리 위험지대라 해도 백의 노인의 말대로 그 정도 위험을 감수할 만한 기회였다.
다들 생각에 잠긴 가운데 남롱후가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아무도 제의를 거절하는 이가 없었다.
“그럼 먼저 당부 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동굴 내부로 진입하면 우리 두 수사가 먼저 한 사람당 하나씩 보물을 고를 것입니다. 나머지는 공평하게 배분하고요. 다른 수사들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우호적인 분위기에 남롱후가 미소를 보이며 조건을 내걸었다.
남롱후와 백의 노인의 조건에 다른 이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수행과 정보를 알아온 공로를 따지면 보물 하나씩을 더 챙긴다는 조건이 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래 시간을 끌면 변수가 생길까 두려워 그들은 교환회가 끝나기도 전에 이틀간 준비를 한 후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다들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로 명세를 하고 차례로 그곳을 떠났다.
그런데 한립이 보기에 남롱후와 백의 노인이 너무 자신만만했다. 아무래도 다른 수사들이 뒤에서 무슨 수작을 벌이든 제어할 자신이 있는 듯했다.
동굴의 위치나 금제를 풀 방법이 두 사람 손에 있으니 사실 다른 꿍꿍이를 품기 어렵기도 했다.
이번 일을 수락한 데에는 한립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원영에 성공한 이후 결단기 때 복용하던 단약들은 쓸데가 없어졌고 청원검결 수련도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아마 그의 자질로 수련에만 매진해서는 300년이 지나도 원영 초기의 정상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는 이번 교환회가 끝나면 익히고 있던 비술과 공법을 백 년 정도 수련하고 나서 곳곳을 떠돌며 고대 유적지와 보물이 있을 만한 곳을 탐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도 찬란한 추마골의 보물이 눈앞에 있으니 이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게 또 한 번의 기연으로 작용해 그의 수행을 크게 늘려 줄지도 몰랐다.
다른 원영기 노괴들도 원영 초기의 수준에서 아무런 진보가 없은 지 한두 해가 아닐 테니 그만큼 절박할 것이다.
게다가 추마골에 묻힌 마도 수사들은 일반적인 고대 수사들이 아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당시에 거의 최고의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고 하니 그들이 지니고 있던 단약이나 공법은 수준이 높을 것이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 한립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귀령문 소주와 기왕 다시 만났으니 기회를 보아 없애버릴 수 있다면 절대 주저할 생각이 없었다.
죽이고 난 다음에야 귀령문 왕천고에게 발각된다 해도 어쩌겠는가? 어차피 마도와 천도맹은 적대관계인데. 살의를 굳힌 한립이 돌길을 걸어 거처로 돌아갔다.
같은 시각 다른 길에서 왕천고가 걸어가고, 그 뒤를 왕선과 연여언이 조용히 따랐다.
“돌아가면 당시에 은원에 대해 상세히 다시 말해 보거라. 보아하니 상대가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으니 절대 내 곁을 떠나지 말고.”
“예! 한 순간의 실수로 그 자를 살려 보낸 것이 이렇게 큰 화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결단과 원영을 해낸 것이 이상합니다!”
공손히 대답을 하면서도 왕선은 속으로 꽤나 풀이 죽어 있었다.
“흥! 낙담할 것 없다. 혈령대법의 위력이면 너희 부부의 협공을 받아낼 자가 몇 없을 터이니. 게다가 혈령대법을 7성까지 익히면 너와 연이가 동시에 원영을 응결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때가 되면 누가 감히 너를 건드릴까! 다만 모란 초원에서는 조심해야 할 것이야. 만일 나와 떨어지더라도 너희 부부는 한시도 떨어져 움직여서는 안 된다.”
“예!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둘째 숙부님!”
왕선이 왕천고의 말에 마음이 한결 편해져 얼른 고개를 숙였다.
“허허, 너희 형제들 중 내 너를 가장 아끼지 않더냐. 그러지 않고서는 이번 교환회에 데려올 리도 없었지. 그런데 저 녀석이 황풍곡 수사였다니…… 령호 노괴가 이번에 친히 교환회에 참석한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왕청고가 중얼중얼 거리며 황풍곡 령호 노괴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쓰는 듯 말했다. 왕선과 연여언은 그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 * *
거처로 돌아온 한립은 잠시 눈을 붙이고는 이튿날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하루 종일 바삐 움직이며 필요한 재료들을 구비해 놓고 모패령을 데리고 려락에게 향했다. 낙운종에 돌아가는 길에 그녀를 함께 데려가 달라 부탁하려는 생각이었다.
려락은 교환회가 끝나기도 전에 어딘가를 가봐야 겠다는 한립의 말에 조금 당황해 했지만 자세히 캐묻지 않고 그러라고 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려락에게 꽤나 큰 호감이 생겨났다.
남은 하루 동안에는 한립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숙소에서 홀로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누각을 떠난 그가 홀로 전천성 남쪽 천 리 아래의 어느 산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남롱후와 백의 노인이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남롱후는 자색 금포와 옥관을 벗어던지고 노란색의 문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후 다른 이들도 하나둘 오기 시작했고 마지막은 귀령문 왕천고 3인이 장식했다.
한립이 그들을 보며 순간 안색이 달라졌다 돌아왔다.
남롱후의 ‘출발’ 소리에 맞춰 아홉 수사가 전천성을 떠나 남쪽 모란 초원 방면으로 날아갔다.
* * *
전천성이 있는 계국은 모란 초원과 굉장히 가까이에 위치한 국가였다. 구국맹과 모란 초원은 실은 국토를 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 만 리 정도 되는 황무지를 끼고 있었다.
초목이 자라지 않아 연중 모래 바람이 불어대는 황무지에는 돌풍이 끊이지 않았다. 위치 상 자연히 구국맹 수사들과 모란 초원 법사들의 전투 장소가 되기도 했다.
몇 년 간 무수히 많은 수사들이 이곳에서 죽어나갔다. 물론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지금도 이곳은 위험지대였다.
이유를 막론하고 이곳에 진입하는 수도자는 모두 자신의 수행에 꽤나 자신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축기기 수사였지만 가끔 결단기 수사도 나타나고는 했는데 결단기 수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 다른 이들은 달아나기 일쑤였다.
만 리 정도면 한립과 같은 원영기 수사에게는 반나절 거리에 불과했다.
남롱후와 백의 노인이 길을 안내했고 왕천고 등 3인이 가장 뒤에서 날아갔다. 한립은 다른 수사들과 뭉쳐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오는 길에 몇몇 저계 수사들을 보기는 했으나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그 위를 지나쳤다. 그런데 황무지를 반 시진 정도 지나는데 백의 노인의 신형이 멈칫하더니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운 형, 무슨 일입니까!”
“전방에 거대한 바람이 몰려오는데 심상치가 않습니다!”
운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 어딘가를 주시했다.
“거대한 바람이라니 뭐가 이상하단 겁니까. 이곳에서 그런 돌풍이야 흔한 것이죠.”
남롱후가 이상하게 여기며 자신의 의식을 방출했다. 그도 백의 노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러지는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뒤쪽의 한립과 노부인 등도 남롱후와 운 수사의 대화소리를 듣고 각자 행동에 들어갔다.
비록 아직 모란 초원에 진입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다들 의식이 강대하니 스스로 확인하고 넘어가야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 결과 다들 의식을 방출하자마자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합니다. 절대 자연적으로 형성된 돌풍이 아니에요!”
노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립은 의식을 통해 하늘을 뒤덮을 듯 커다란 모래 바람이 백여 장까지 치솟는 것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모래 뿐 아니라 바위 같은 것도 섞여 있어서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의식은 거의 원영기 후기 수사에 맞먹을 만큼 강대했지만 모래바람 속에 진입한 후로는 모호하게 흐려져 수십 장 밖에는 감지하지 못했다.
모두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수사들이 의식을 회수했다.
“모란인의 풍영술(風靈術)입니다. 이전에 법사와 싸울 때 상대가 쓰던 영술도 이랬어요. 일단 영술이 펼쳐지면 우리 같은 수사들의 의식을 제한할 수 있는데다 적을 광풍 안에 가둘 수도 있어 무척 까다롭습니다. 다만 이렇게 광범위하게 펼쳐진 것은 처음 봅니다.”
남롱후가 어두운 얼굴로 설명했다.
“모란인이요?”
다른 이들도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왕선과 연여언도 즉시 안색이 창백해 졌으나 이곳에서 가장 수행이 낮은 처지라 함부로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했다.
“남롱 형의 말씀 대로입니다. 법사의 영술만이 이런 엄청난 모래바람을 일으킬 수 있지요. 위력으로 보아서 저 안에 몇 명의 법사가 숨어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급의 법사가 있을 확률도 간과할 수 없지요.”
백의 노인의 말투도 진중해졌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갑자기 이렇게 많은 모란 법사들이 몰려오다니!”
“태 부인, 지난번 모란족과의 휴전이 벌써 언제 적 일입니까?”
노부인의 의문에 왕천고가 질문으로 답했다.
“대략 100년은 되었겠죠! 왕 형의 말씀은…….”
“100년이면 모란족이 다시 법사들을 양성하고 전쟁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요.”
왕천고의 얼굴에 냉기가 스쳤다.
“왕 형의 말씀 대로입니다. 또 한 번의 전쟁이 일어날 때가 되기는 되었지요.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수도자들이 죽어나갈지…… 하지만 우리가 움직일 때 하필 모란족 선봉과 마주치다니.”
남롱후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 또한 이번 일이 너무 공교롭게 느껴졌다.
“온갖 우연과 기연이 범람하는 세상이니 이상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권이 있겠군요. 첫째는 이대로 다시 돌아가 모란족 선봉을 피하는 것입니다. 보물은 나중에 찾는 것이죠.
보물이 발이 달려 도망갈 것도 아니니 법사들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하지만 모란족 진공은 한두 해 사이에 끝날 일이 아니니 근시일 내로는 불가능하겠지요. 게다가 이렇게 많은 동급 수사들이 한데 모이는 일도 어려울 테고요.”
백의 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들을 것도 없네요. 두 번째는 돌풍을 실력으로 돌파하는 것 아닙니까. 허나 그러면 위험이 너무 큽니다. 저들을 피해 돌아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노부인은 두 가지 모두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모란인이 이미 진공을 시작했는데 어찌 선봉이 저들뿐이겠습니까? 달아나는데 성공한다 해도 다른 모란인을 마주칠 뿐입니다. 그러느니 일단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저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낫겠지요. 법사들이 위치한 정중앙만 피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저들이 정말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다면 모란 초원에서 보물을 갖고 나오는 일은 더욱 쉬어질 겁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노인이 신중히 다른 계책을 내놓았다. 다들 그의 의견이 최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언제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물론 다들 원영기 수사이기에 가능한 과감한 결정이었다. 아니었다면 아무리 보물에 욕심이 났어도 당장 자리를 털고 달아났을 것이다.
그들은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구국맹 수사들의 거점으로 전음부를 날려 보냈다. 이렇게 하면 구국맹에서 미리 방비를 할 수 있을 테니 모란족의 기습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