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383화 (140/2,000)

# 383

383화. 밀회

남롱후가 한립을 데리고 내려오는 것을 보며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넌!”

서 있던 남자가 한립의 얼굴을 보고는 대경실색해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한립을 아는 눈치였다. 그 소리에 한립도 결단 후기의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내는 오래 전 그를 추살하려던 귀령문 소주였다. 가면 너머로 드러난 눈빛에는 이미 소년 시절의 객기는 사라졌고 세월의 풍파와 화난 기색만이 더해졌다.

“여기서 뜻밖에 옛 지인을 다 만납니다.”

“말도 안 돼. 네, 네가 원영을 응결했다고?”

귀령문 소주의 목소리에 나이가 묻어났고 그가 놀라고 당황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 버릇이냐. 아는 수사더냐?”

귀령문 소주, 완선 앞에 앉아 있던 흑의 수사가 돌연 냉랭히 물었다.

“둘째 백부님, 저 자는 제가 일전에 말씀 올렸던 한립이라는 황풍곡 수사입니다. 당시 저 자가…….”

“됐다. 한 수사는 이미 원영에 이르렀는데 어찌 말 버릇이 그 모양이더냐.”

전신을 검은 옷으로 가렸지만 점잖아 보이는 중년인이 인상을 쓰며 그의 말을 막았다.

“저는 귀령문 왕천고라 합니다. 예전의 일은 제 조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 생긴 일입니다. 제 체면을 보아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말투가 한립과 완선 간의 일에 대해 얼추 아는 모양이었다.

“지나간 과거일 뿐입니다.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는데 한 모가 이제와 원수를 갚을 리도 없지요.”

한립은 흑의 문사를 향해 웃으며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냉소했다.

당시 귀령문 소주는 끈질기게 자신의 목숨을 노려 그가 어쩔 수 없이 전송진을 이용해 천남 지역을 떠난 것이다. 그런 엄청난 원한을 어찌 잊겠는가!

이렇게 원영기 수사들 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면 귀령문 소주고 뭐고 보는 순간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수사들 중에도 마도 수사로 보이는 이들이 꽤 섞여 있었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복수는커녕 저들이 연합해 자신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허허, 한 수사가 황풍곡 출신이었군요. 원래부터 낙운종 수사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어쨌든 본 후가 여러분을 모신 자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될 테니까요.”

남롱후가 이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왕천고도 웃고는 있었지만 한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수사의 넓은 아량에 왕 모도 탄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걱정은 마시지요. 본문으로 돌아가는 즉시 조카아이를 혼쭐 낼 테니까요. 그런데 겨우 200년 만에 축기기에서 원영까지 성공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마 수백 년 후면 원영 후기에 이르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요. 저 같이 자질이 떨어지는 이들은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이 말에 남롱후는 물론이고 자리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해갔다. 한립이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 않음을 깨닫고 속으로 귀령문 수사에게 이를 갈았다.

자신을 칭찬하는 듯 말하며 모두가 그를 경계하게 만든 것이다.

“그럼 수사는 올해 300살도 안된 겁니까?”

구석에 앉아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기이하다는 듯 물어왔다.

“왕 문주께서는 과찬이십니다. 저는 이제 막 원영을 한터라 원영 후기를 말하기는 너무 이르지요.”

한립이 대충 넘어가며 내부에 모인 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왕선 외에도 그 옆에 선 절세미녀 역시 결단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왕선과 나란히 서있었지만 표정에 동요가 없는 것이 평범한 여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듣기로 월국 제일의 수도 가문이었던 연 가는 마도 침공 당시 바로 귀령문에 귀의했고, 가솔 중 천영근의 자질을 타고난 연여언을 완선에게 시집보냈다고 했다.

‘그럼 저 여인이 연여언? ’

나머지 여섯 수사는 모두 원영기 수사로 특히 백의를 입은 수염 없는 노인은 남롱후와 마찬가지로 원영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한립이 그를 자세히 살피다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송곳에 찔리는 듯 모골이 송연해졌다. 마치 그의 서늘한 시선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속으로야 크게 놀랐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노인이 그것을 보고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때 남롱후가 먼저 한립에게 자리를 권했다. 한립은 거절하지 않고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 묘한 눈빛으로 완선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귀령문 소주는 놀라긴 했으나 왕천고와 함께라 긴장을 풀고 있었는데 그 눈빛을 보고는 다시 경계심을 높였다.

당시 비슷한 경지였던 자가 하루아침에 원영기 수사가 되어 나타나다니 너무 열 받으면서도 속이 상했다. 다만 연여언의 경우 한립을 보기는 했으나 아무런 표정이 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한립은 이후로는 두 사람 쪽으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남롱후가 모두를 모았으니 앞으로 나서서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에 모인 수사들께서는 여러 종파로 나뉘어있지만 모두 굉장히 강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요. 그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을 모신 이유입니다. 몇몇 분들은 이미 이 모임의 이유를 알고 있으시겠지만 다른 분들을 위해 상세히 설명 드리지요. 이야기를 다 듣고 함께 해주실지 결정해 주시면 됩니다. 본 후는 절대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헤헤, 다른 분들이야 그렇다 치고. 귀령문 저 완배들은 왜 참석한 것이오?  설마 두 사람의 의식이 우리와 동급이라도 된다는 뜻이오?”

왕천고 맞은편에 앉은 무표정한 수사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별로 좋지 않은 기색으로 왕천고를 주시하는 것이 좋은 관계는 아닌 듯 했다.

“룡 수사, 저 둘은 비록 수행은 낮지만 비술을 익혀 서로의 의식을 합칠 수 있는 신통력을 지녔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지요. 이 정도 의식을 지닌 수사를 찾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다른 분들도 태생적으로 자질이 뛰어났다거나 특수한 공법을 익히고 강력한 법보를 지녀 이런 강대한 의식을 지니게 된 것 아닙니까. 본 후는 쓸 데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외다.”

“그렇다면 제가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시지요.”

무표정한 얼굴의 룡 수사가 대답을 하고나자 다른 이들이 남롱후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이 자리에 여러분들을 초대한 이유는 같이 모란 초원에 다녀오고자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모란 초원?”

“……!”

남롱후의 말에 대부분 수사들이 깜짝 놀랐고 한립도 안색이 달라졌다.

“남롱 형,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정말 모란 초원을 간다는 겁니까?”

무표정한 얼굴의 룡 수사가 미간을 좁혔다.

사실 다른 이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오랜 세월 살며 무수히 많은 풍파를 견뎌왔기에 마음을 안정시키고 남롱후의 말을 기다렸다.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모란 초원에 간다고 해서 모란족을 침략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저 백 리 정도 들어가 모란 초원의 가장자리만 스쳐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듣기로는 그간 모란인들이 세를 키워서 언제라도 다시 병력을 일으킬 수 있다 했는데 변경이야 말로 가장 위험 지역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와 동급의 법사들이 몇 명이나 모여 있을 지도 모르고요. 법사들이 법보가 부족해서 그렇지 수행이나 공법은 절대 우리에 못 미치지가 않아요. 거기다 영술에 정통하고 합공에 능하니 만일 발각이라도 되면 무사히 달아나기 어려울 겁니다.”

무표정한 수사는 정말 모란 초원을 꺼리고 있었다.

“모란의 법사들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라고 모르겠습니까?  당년 본 후가 원영기 법사와 사흘 밤낮을 싸울 때 그 자의 수행이나 법보는 나만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를 어찌하지 못하고 3일을 끌었지요.”

남롱후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모란 초원에 가려는 이유가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남롱 형이 이런 위험을 감수할 리 없을 테니까요.”

왕천고가 돌연 웃으며 모두의 주의를 환기했다.

“허허, 그래도 황 형이 본 후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다들 혹시 창곤상선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는지요.”

“창곤상선이라면 5,000년 전 힘으로 정마 양도를 제압했던 천남의 광인(狂人)이 아닙니까?”

한 마디도 없던 노부인이 창곤상선의 이름에 이채를 띠었다.

“태부인의 말씀 대로입니다. 정마 양도를 휩쓸었던 그 미치광이 말입니다. 누구 한 사람 정식으로 인정한 적은 없지만 실력으로는 천남 제일의 산수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요. 끝을 알 수 없는 신통력으로 천남을 종횡무진해서 당시 정마의 1인자로 불리던 정도맹 맹주나 마도 합환종의 대장로도 감히 그 자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자를 언급하는 것은 이 일과 연관이 있어서겠지요?”

완천고의 물음에 남롱후가 진중하게 답했다.

“흐흐, 그러합니다. 이번에 모란 초원에 가려는 이유가 바로 당시 창곤상선이 세상을 뜨기 전에 공들여 만들어 놓은 비밀 동굴 때문이니까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 자는 모두의 공분을 사 여러 수사들의 협공 속에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을 텐데요?”

노부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남롱후가 빙긋 웃으며 말을 하려는데 바로 원영 중기의 수염 없는 백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창곤 상선은 그렇게 죽지 않았습니다. 포위망을 좁혀오는 수사들의 이목을 피하려 꼭두각시로 만든 자신의 화신 두 개를 자폭하게 하고 어마어마한 술법을 펼쳐 자리를 피했지요.

그때 공격에 참여 했던 수사들조차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일전을 통해 원기가 크게 상한 그는 수년간 두문불출 했고 이렇게는 원기를 회복할 수 없다 판단하고는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합니다. 나와 남롱 수사도 그가 죽기 전에 남긴 글을 발견하고서야 알게 된 내막이지요. 그는 실종된 기간 동안 놀랍게도 추마골을 털었는데 결국에는 그가 추마골에서 살아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추마골에서 살아 돌아오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노부인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이들도 다들 크게 놀라는 중이었다. 다들 속으로 이 정보가 진짜일지 가늠하느라 한동안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모란 초원과는 무슨 상관입니까?  설마 상곤상선이 추마골에서 얻은 보물을 거기다 두었다는 소리입니까?”

까무잡잡한 수사가 냉소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병 수사의 추측이 맞습니다. 창곤상선이 남긴 정보에 따르면 그는 추마골에서 몇 년을 지내고는 나오자마자 세상을 뜨게 됩니다. 이전의 부상 때문인지 아니면 추마골에서 중상을 입어서인지는 알 수 없지요.

그러니 추마골에서 많은 보물을 가지고 나왔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 해도 당시 산수 제1인자였으니 본래 지닌 물건들도 평범할 리가 없겠지요. 게다가 수많은 수사들의 이목을 숨기고 달아난 수법은 특수한 공법이나 법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보물들이면 모란 초원에 잠시 다녀올 만 한 충분한 이유가 되겠습니까?”

남롱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원영기 수사가 함께 움직인다면 아무리 법사라 해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 오면 각자 포위를 뚫고 달아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이 정도 위험도 감수하지 않겠다면 그냥 돌아가시면 되겠습니다. 저와 남롱 수사가 다른 수사들을 수소문해 낼 테니까요. 다만 한 가지 결정하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백의 노인이 차분한 얼굴로 덧붙였다. 다들 두 수사의 말에 머뭇거리는데 한립이 웬일로 질문을 던졌다.

“잠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수사께서 보물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어째서 의식이 강력한 다른 수사들을 모으셨는지요.”

“한 수사께서 묻지 않아도 이야기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우리 둘만으로 보물을 가져 나올 수 있었다면 자연히 모두와 나눌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요. 일전에 몰래 모란 초원에 잠입했을 때 아주 은밀하게 숨겨져 있기는 했지만 창곤상선이 남긴 정보를 통해 동굴의 위치를 찾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동굴 밖에 기묘하기 이를 데 없는 상고 시대의 진법이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둘이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도저히 깰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천남으로 돌아와 온갖 경전을 뒤져보니 이미 실전 되었다고 알려진 상고 시대 금제인 태묘신금(太妙神禁)이었습니다.”

“태묘신금! 10대 금제 중에 하나 아닙니까?  그게 펼쳐져 있다고요?”

왕천고는 크게 놀랐다. 태묘신금을 안 들어 봤으면 몰라도 이 금제에 대해 알고 있는 수사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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