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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81화 (138/2,000)
  • # 381

    381화. 맹세와 선택

    전천성 내부에서 금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둔술을 펼칠 수 있는 이들은 구국맹 집법사들 뿐이었다.

    그들은 전천성에서 이뤄지는 교환회의 질서유지를 담당하고 있었다. 손화가 자연히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얌전히 공수를 한 채 물러났다.

    그러나 가슴이 뛰는 것을 주체하진 못했고 부적 조각을 쥔 손도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이때 은빛이 가시고 누런 머리의 노인이 나타났다. 결단 중기의 노인의 의복 에는 금실로 검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이게 바로 집법사의 표시였다.

    노인은 방금 한립이 방출한 엄청난 기세를 감지하고 멀리서 날아오는 길이었다. 분명 원영기 수사의 기운이라는 것은 알아챘지만 맡은 바 책무가 있는지라 어쩔 수 없이 온 것이었다.

    그가 길가에 가만히 서 있는 한립을 향해 포권을 했다.

    “저는 전천성 집법사인 무비라 합니다. 선배님께서 어찌 화가 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도움이 될 일은 없을지요.”

    원영기 수사를 앞에 두었으니 자연히 대우가 극진할 수밖에 없었다.

    “별 것 아니다. 그저 길을 가던 중에 여기 가게 주인이 우리 낙운종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기에 다시 한 번 들어보고자 했을 뿐이지.”

    뒷짐을 지고 선 한립의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 여기 주인장 놈이 헛소리를 한 모양입니다! 너희 셋은 감히 선배님께 무례를 범해?  당장 사죄를 드리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사정을 들은 노인은 골머리가 아파왔다. 종파의 명성에 관한 일은 크게 키울 수도 대충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라 중재하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입바른 소리를 한 마디 하고는 당장 엎어져 세 사람을 향해 호통을 쳤다.

    한립이 즉시 기세를 거두자 세 사람이 벌벌 떨며 땅을 기듯이 일어났고 주인이 사색이 되어서는 말했다.

    “서, 선배님 제가 말실수를 한 것입니다. 절대 귀 종에 무례를 범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방금 저 수사 분이 망가뜨린 화운부 값도 받지 않을 것이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말에 한립의 안색이 펴지기는커녕 더욱 어두워졌다.

    “뭐라. 설마 내가 푼돈을 아끼고자 여기 서있다고 여기는 것이냐. 일단 네 부적이 정말 대사의 걸작인지 확인하고 이야기 하자꾸나. 만일 진짜라면 내가 낙운종 제자를 대신해 배상하겠다. 허나, 아니라면…….”

    “아, 아닙니다! 확인하실 것도 없이 이 부적은 싸구려 부적입니다. 모든 것이 소인의 죄이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주인이 그나마 머리가 있어 한립이 목함 안을 확인하기도 전에 스스로 죄를 인정했다. 그 소리에 한립은 말없이 옆에 서있던 집법사를 잠시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얼른 허리를 굽힌 채 말했다.

    “선배님, 제가 책임지고 이 버릇없는 놈에게 중벌을 내릴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그렇다면 네가 처리 하거라. 나도 이런 사소한 일에 낭비할 시간은 없으니. 손화, 가자꾸나!”

    말을 마친 한립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손화 옆에 나타났다. 눈을 찌르는 듯한 노란 빛이 번쩍이고 두 사람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노인은 이를 보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는 주인과 직원들을 보며 냉랭히 꾸짖었다.

    “셋은 날 따르거라! 이번 일은 가볍게 넘길 수 없을 것이다.”

    그 소리에 세 수사가 울상이 되어서는 뒤를 따랐다.

    * * *

    모처의 인적이 없는 건물 뒤에서 한립과 손화가 노란 보호막 속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제 부적을 꺼내 보거라.”

    한립이 의미심장하게 손화를 보고 있었다.

    “예, 사조님!”

    손화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손으로 부적을 바쳤다.

    반쪽짜리 부적을 받아 훑어본 한립이 한 손을 뒤집자 놀랍게도 또 다른 반쪽 자리 부적이 나타났다. 손화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가 두 부적 조각을 맞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부적 조각의 찢어진 면이 완전히 맞았다.

    손화는 마음 속 일말의 걱정까지 날려버린 채 한립을 향해 다시 한 번 예를 올렸다.

    “손화,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러나 한립은 손에서 불똥을 튀어 두 부적 조각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손화는 흠칫 놀랐지만 바로 안정을 되찾았는데 그 모습에 한립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정말 네가 손이구의 후손인 모양이구나. 허나 그리 서둘러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를 건 없다. 일단 넌 손이구의 몇 대 손이더냐?”

    한립이 느긋하게 묻는 소리에 손화가 고민할 새도 없이 바로 답했다.

    “소인 선조의 제 7대 손입니다.”

    “당년 손이구가 맹세하기를 손 가는 대대손손 나를 주인으로 모시겠다 하였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 그간 내가 천남 지역에 있지를 않았지. 그러니 너희 손 가는 진정으로 내 종복이었던 적이 없다. 나도 너희 가문을 비호해 주지 못했고. 너도 수도계에 들어왔으니 그때의 맹세를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네 선조와의 한 때의 정을 생각해 네게 두 가지 선택권을 주겠다.”

    “첫 번째는 내가 그냥 네게 약간의 선물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약이나 법기 같은 것을 줄 수 있겠지. 그 뒤로 우리의 인연은 끝이다. 두 번째는 네가 선조의 맹세를 지켜 나를 주인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면 난 네 몸에 금제를 걸어 배신하지 못하게 하고 어쩌면 위험 할지도 모를 일들을 시킬 수 있겠지. 다만 그 보상으로 네 수행이 늘도록 지도를 해줄 것이며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움을 주겠다. 네 자질이 너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결단도 가망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한쪽 입 꼬리를 올린 한립이 느긋이 말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손화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너무 갑작스런 제안이라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참 후 손화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사조님, 저는…….”

    “너무 서둘러 답하지 말거라.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으니 교환회가 끝난 후 낙운종에 돌아가서 내게 답을 주면 된다. 심사숙고 해보고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따져본 이후에 내 거처로 찾아 오거라.”

    “존명! 사조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손화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지 급히 한립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난 다른 일이 있으니 여기서 부터는 알아서 가거라.”

    한결 온화한 얼굴로 말을 마친 한립이 노란 빛과 함께 다시 사라졌다. 그러나 손화는 당장 자리를 뜨지 않고 묵묵히 서서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동안 한립은 이미 자신이 머무는 누각 앞에 당도해 있었다.

    한립이 누각에 들어섰을 때 1층의 대청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던 모패령이 바로 그를 맞이했다. 맑은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키는데 옷섶을 여미는 자태가 아름다웠다.

    한립이 손을 저어 그녀가 고개를 들게 했다.

    “앞으로는 내가 없을 때는 기다릴 것 없다. 교환회 기간에는 데리고 다니기 어려우니 알아서 돌아다니고. 이 영심배 한 쌍 중 하나를 지니고 다니다가 위험에 처하면 언제든 영력을 불어 넣으면 된다. 즉시 보호막이 생성되는 것은 물론이고 천리 밖에 있더라도 내가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공자!”

    모패령의 옥 같은 얼굴이 일순 붉어지더니 옥패를 받아 바로 허리춤에 찼다. 한립이 그녀에게 방으로 돌아가 쉬라 분부하고 자신도 누각의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모패령은 2층으로 올라가는 한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허리춤의 옥패를 쓰다듬었는데 얼굴에 심란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2층에 있는 침실로 들어간 한립은 바로 침상에 앉아 눈을 감고 가부좌를 했다. 하지만 겨우 한 시진 정도 휴식을 취하고는 창밖의 밤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때가 되었으니 찾아 가 봐야겠지.”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조용히 누각을 빠져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오늘 다녀갔던 건물 앞에 다시 서 있었다.

    대문 위에 정룡각이라는 금빛 글자가 보이자 한립은 안을 힐끗 보고는 바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정룡각을 찾아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잘 지키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이제 막 약속한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가 누각에 들어서자마자 한쪽에서 빛이 피어오르더니 천정 진인이 낮에 본 모습 그대로 탁자 뒤에서 웃고 있었다.

    “제가 먼저 만나자 청하고는 늦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진인을 기다리게 만든 것 같아 송구합니다!”

    차분히 예의를 차린 한립이 한 손을 털자 누각의 대문이 굳게 닫혔다. 천정 진인이 미소를 보였다.

    “낮에 빈도에게 수중에 혼석이 더 있다고 하셨는데, 사실 인지요?”

    눈을 가늘게 뜬 것이 약간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한립이 대답할 것 없이 한 손으로 저물대를 스쳤다. 그러자 바로 낮에 꺼냈던 수정과 비슷한 크기의 푸르스름한 수정이 나타나 엄청난 음기를 발산했다.

    “수사의 말이 정말이었습니다 그려. 이런 품질의 혼석이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빈도와 전부 교환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영석이든 재료든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보시지요!”

    천정 진인도 한립이 지닌 혼석을 확인하고 나서는 동요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천정 진인. 제가 혼석을 꺼낸 것은 자연히 거래할 마음이 있어서겠지요. 그러나 그 전에 분명히 해둬야 할 문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한 모가 만족한 만한 답을 주신다면 이 혼석은 그냥 드리겠습니다.”

    한립은 그대로 들고 있던 혼석을 상대에게 던져 주었다. 천정 진인이 얼떨결에 혼석을 받고는 놀라했지만 한참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씀씀이가 대범하십니다! 보아하니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군요.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대답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도 뜸들이지 않고 묻지요. 수사께서는 경정의 행방에 대해 아시는지요. 교환회에서 경정을 언급할 때 수사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정의 행방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다. 다만 불확실하기에 교환회에서는 말씀드리지 않았지요. 그래도 알고 싶으시다면 말씀 해드리겠습니다.

    천정진인이 의아해 하지 않고 바로 답을 주었다.

    “틀린 정보라 하여도 일단 들어보고 싶군요.”

    “사실 제게 소식을 듣지 못해도 며칠 후면 수사도 알게 될 이야기입니다. 제가 경매소를 주관하는 벗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교환회 기간 동안 경정이 경매에 오를 수도 있다더군요.

    다만 경정의 주인은 아무래도 다른 물건을 대가로 물물교환을 하고자 하는 것 같고, 아직 경매에 내놓을지 말지 확실히 정하지는 않았다고 하더이다. 허나 일단 경정이 경매에 나오면 검술 공법을 익히는 문파들은 가산을 털어서라도 구입하려 할 테니 수사에게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겠지요!”

    “3,000년된 적정지가 십만 영석에 거래될 정도이니 경정처럼 수천 년 만에 거래되는 물건은 값이 천정부지겠습니다. 만일 경매에 오른다면 가격은 더욱 오를 것이고요.”

    기뻐하던 한립도 쓴웃음을 보였다.

    아무리 그가 지닌 자산이 만만치 않다지만 수도 가문 전체의 자산보다는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천정 진인께서 미리 정보를 주셨으니 미리 준비를 할 수는 있겠습니다. 혹시 경정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십니까?”

    “구체적인 정보는 모릅니다. 다만 구국맹 원영기 수사이며 현재 서문 밖의 어느 작은 산에 기거한다는데 찾으려고 들면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늙은 도사가 길게 늘어뜨린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경정에 관해서는 되었고 이제 혼석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천정 진인께서 가르침을 주시지요.”

    “무슨 뜻입니까?”

    자비롭게만 보이던 도사의 얼굴이 달라져서는 눈빛에 경계심이 어렸다.

    “수사를 속이지 않지요. 한 모도 약간이나마 괴뢰수를 익힌 데다 어떤 고대 수사가 남긴 동굴에서 상고시대 꼭두각시의 잔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잔해 석에는 혼석이 섞여 있었지요.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혼석은 바로 고대 수사들이 꼭두각시를 제련할 때 쓰는 재료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혼석을 매입하는 수사는 분명 상고 시대의 괴뢰술을 익히고 있겠지요. 만일 제 말이 맞다면 수사께서 제게 약간의 가르침을 주시기를 청하는 겁니다.”

    한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도사를 뚫어져라 보았다. 말을 하면서도 경계심을 높여 혹시 상대가 화가 나 급습을 하는 상황을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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