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7
377화. 다시 만난 동자
려락이 사라지는 남롱후에게 인사를 하고는 즉시 달려왔다. 다른 원영기 수사가 이렇게 했다면 불만을 품었겠지만 그의 성격을 잘 아는 려 장로는 그저 쓴웃음을 짓고 만 것이다.
한립도 표표히 하늘에서 내려왔다.
“공자, 괜찮으십니까?”
다시 안정을 되찾은 모패령이 한립을 보자마자 발그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오직 한립만이 담겨 있었다.
순식간에 남롱후라는 자를 상대해낸 한립의 위력을 직접 목도하자 마음에 파문이 인 것이다.
“그저 정신력을 소모했을 뿐이니, 괜찮다.”
그는 내색은 안 했지만 갑자기 더욱 살가워진 모패령의 변화를 눈치 챘다.
“사제,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니. 괜히 나만 애를 태웠구만!”
옆에서 한참 혀를 차던 려락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는 말했다. 이제까지의 미묘한 거리감도 전부 사라졌다.
“숨기다니요, 그저 묻지 않으시니 굳이 드러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럼 이제 가실까요. 방금 의식 돌풍의 기운이 많은 수사들의 이목을 끌었을 겁니다.”
온화한 한립의 말에 려락도 주저 없이 찬성했다.
“다른 수사들의 주목을 받아 봐야 좋을 것 없지! 어서 전천성으로 가세!”
“이곳이 전천성이군요.”
한립이 산비탈에 서서는 몇 리 밖의 거대한 성채를 보고 있었다.
“어떤가? 이렇게 큰 석성은 처음이겠지. 구국맹에 수차례 증축을 해서 지금의 규모가 된 것이네. 천남에서 제일 큰 성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거라고. 게다가 성곽 전체를 이런 거암기석들로 쌓아 놓은 성은 여기뿐일 게야.”
옆에선 려락이 감탄어린 시선을 보내자 한립이 그의 말에 실소했다.
거대한 성이라면 어디 난성해의 천성성에 비하겠는가! 그 성은 진정 거대했다. 전천성도 백 리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천성성에 비교하면 별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전천성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걸어 다녀야 하는 점이 답답하긴 하지!”
“구국맹도 어쩔 수 없었겠지요. 고계 수사가 이처럼 많이 모이는데 다들 하늘을 날아다니면 관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규칙이 우리 같은 원영기 수사에게는 형식적인 것 아닙니까. 정말 날아오르려 한다면 이 정도 금제로는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사제가 이리 관대한 성품인 줄 몰랐네. 그럼, 가세!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수확이 있을 테니까.”
남롱후와의 의식 대결을 마친 한립을 려 사형은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대하며 살갑게 굴었다. 이를 의식한 한립이 미소 지었다.
세 수사가 산비탈에서 내려와 거침없이 전천성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전천성 인근이라 사방팔방에서 수사들이 떨어져 내려 길을 걸어가니 장관이었다.
한립과 려락은 공연히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벌써부터 본래의 수행을 숨기고 모패령과 비슷한 축기 수준으로 행세했다.
이렇게 세 사람이 나란히 열 장 정도 높이의 성문을 걸어 들어갔다.
성문 앞을 구국맹 집법수사들이 지키고는 있었지만 한립과 려락에게서 전혀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전천성 안으로 들어가자 줄줄이 늘어선 석조건물들이 이어졌다. 그 사이로 돌길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었고 지나다니는 수사들도 꽤 많았다.
“일단 거처를 정함세. 그래도 다른 수사들처럼 객잔을 찾아 묵을 필요는 없네. 원영기 수사들을 위한 귀빈용 누각이 마련되어 있거든.”
려락이 전천성에 한번 와본 적이 있기에 앞장서서 안내했다. 한립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니 모패령과 함께 중년 수사의 뒤를 쫓았다.
세 수사는 여러 거리를 지난 끝에야 하얀 빛의 장막 앞에 도착했다. 그 뒤로 그윽하게 고아한 누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각자 독특한 양식과 아름다움을 지닌 건물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는 다른 수사들은 누각을 보며 부러움과 경외감을 드러냈지만 감히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분분히 멀어져갔다.
“여길세. 이 금제는 원영기 이상의 수사만 열 수 있네.”
려락이 한 손가락을 들어 빛의 장막을 가르자 손끝에서 남색빛이 일렁였다.
츠륵.
하얀빛의 장막이 마치 그의 손에 잘리듯 열렸고 신형이 흔들거리더니 려락은 벌써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한립도 입을 벌려 푸른빛을 내뿜으니 하얀 장막과 만나 일장 크기의 입구를 만들어냈다. 그가 한 손으로 모패령의 허리를 잡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모패령이 그에게 기대서는 얼굴을 붉혔다.
그가 손쉽게 금제를 깨고 들어오는 모습에 려락이 눈을 빛냈지만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느 누각이든 원영기 수사라면 제자를 대동하고 거주할 수 있네. 하지만 누각 밖에 금제가 있는 경우에는 이미 머물고 있는 수사가 있다는 뜻이니 다른 곳을 골라야하지. 그런데 원영기 수사라고 또 다들 이곳에 머물 지는 않는다네. 몇몇 노괴들은 성 밖에 따로 거처를 마련하거나 굳이 객잔을 찾기도 하니까.”
려락이 설명하며 몇몇 누각들을 가리키는데 과연 그것들은 이미 금제가 펼쳐져 빛나고 있었다.
“사제! 우리 이웃하는 누각 두개를 골라 머물기로 하세. 그래야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살피기 쉬울 테니.”
려락이 오륙 장 밖의 누각 두 채를 가리켰다.
“사형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한립이 몇 초간 누각을 살피고는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려락이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인근 누각의 하얀 보호막이 갑자기 갈라지며 작은 인영이 걸어 나왔다.
그가 한립 등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먼저 말을 붙였다.
“어? 려 형 아니십니까?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뽀얗고 부드러운 살결에 어린 사내아이 같은 모습을 한, 운몽산 삼 파의 성지에서도 보았던 화룡 동자였다.
검은 눈동자가 또렷한 아이의 시선이 한립과 모패령에게 닿더니 꽤나 놀란 얼굴을 했다.
화룡 동자의 비상한 기억력에 따르면 20년 전에도 한립과 모패령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한눈에 한립이 검술대회 순위권에 들었던 제자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다만 지금의 한립은 일반적인 은닉술로 수행을 감춘 터라 동급 수사의 눈에 원영기의 수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허허허! 남 수사셨군요. 우리보다 더 먼저 와있었으면서 놀랄 게 뭡니까. 그렇지, 이쪽은 우리 낙운종에 새로 들어온 한 장로라 합니다. 한 사제, 남 형은 본 적이 있겠지.”
려락도 잠시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멈칫하다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고는 서로를 소개를 시켜주었다.
“알고 보니 한 수사가 귀 종의 신임 장로였군요. 남 모가 그때는 눈이 삐었나 수사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화룡동자가 려락의 소개에 쓴웃음을 지으며 은근슬쩍 그때의 일을 물었다.
“영안수의 위명을 듣고 궁금한 마음에 그때는 한 모가 실례를 하였습니다. 너무 탓하지는 말아주시지요.”
상대의 화법에 휘둘릴 한립이 아니었다.
“이미 수사가 낙운종 장로가 되었으니 추궁할 일도 아니지요! 그러나 저러나, 마침 잘 만났습니다. 막 몇몇 안면이 있는 수사들과 만나려던 참이었어요. 두 분도 같이 정룡각에 가서 교환회 구경이나 하시죠. 운이 좋아 괜찮은 물건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화룡동자도 털털한 성격인지 손을 내저으며 예전 일을 털어버렸다.
“이렇게 빨리 교환회가 열리는 군요. 허허, 저희가 아주 적시에 도착했습니다. 한 사제, 원영기 수사들이 여는 교환회는 그리 많지 않으니 꼭 가봐야 하네. 어떤 좋은 물건을 놓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야.”
려락이 크게 기뻐하며 한립을 향해 신중이 일러주었다.
“모두 려 사형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그저 온화하게 화답했다.
한립과 려락이 화룡동자를 따라 하얀 장막을 벗어났고 모패령은 누각에 남았다.
“정룡각은 제가 구국맹에서 알고지내는 친구의 것인데, 이 친구가 아주 사교적이라 정마 양도는 물론이고 우리 쪽 수사들과도 왕래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교환회도 주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막고자 안에 들어가면 가면을 써서 서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화룡 동자가 맑은 목소리로 교환회에 대해 설명하자 려락이 생각나는 바가 있어 놀라 물었다.
“남 형이 말씀하시는 수사가 설마 천정 진인입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조건을 걸 리가 없을 텐데요. 천정 진인은 이런 일에 나서는 것을 꺼려한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웬 일로 교환회를 다 주도한답니까?”
“헤헤, 려 수사도 천정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 친구가 성가신 일을 꺼리는 것은 맞지만, 아무래도 뭔가 급히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잘 구해지지 않아 이번 교환회를 연 것 같더군요.”
“오,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됩니다.”
담담한 표정의 한립은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이렇게 한담이 오가다 보니 어느덧 세 수사는 옥처럼 새하얀 누각 앞에 도착했다.
3층의 누각은 적당한 크기였고 고풍스런 문 앞에 금색으로 글씨가 적힌 편액도 걸려 있었다.
‘정룡각!’
“여깁니다. 들어가시죠!”
화룡동자가 다른 두 수사를 향해 웃으며 말하고는 먼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누각의 대문에 들기 전 별 생각 없이 안을 살피려던 한립이 멈칫했다.
안은 마치 평범한 주루라도 되는 듯 먹고 마시는 손님들로 가득해서, 몇몇 점소이들이 바삐 움직이며 상을 차리고 빈 그릇을 치우고 있었다. 게다가 문 한 쪽에 만석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글귀까지 걸려 있었다.
“천정 이 노인네가 또 이런 환술로 장난이나 치고 말이야! 어휴!”
화룡동자가 중얼중얼 거리더니 이런 광경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계속 걸어 들어가 버렸다. 한립도 그 말을 듣고 의식을 이용해 안을 다시 살펴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그를 뒤따랐다.
세 수사 모두 완전히 안으로 들어서자 방금 전까지 있었던 수많은 손님들과 점소이들, 떠들썩한 소리와 음식 냄새가 거품처럼 녹아 사라졌다.
한립이 의식으로 살펴보아도 텅텅 비어있었고 은은한 회색의 안개만이 나부꼈다. 누각 1층에는 이제, 낡은 나무 탁자와 푸른 기름등 그리고 회색 도포를 걸친 인자한 얼굴의 도사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얼굴에 한껏 웃음을 띠고는 세 수사를 보고 있었다.
“남 형이 와준 것도 반가운데, 려 수사까지 모셔 오다니! 그런데 이 분은 늙은이가 눈이 침침해져서 그런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설마 새로이 원영기에 든 수사입니까?”
회색 도포의 도사가 세 수사를 열정적으로 맞이하자, 놀랍게도 금방 경계심이나 거리감 따위가 옅어지고 일말의 호감이 생겨났다.
“천정 형,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을 둘이나 데려왔다고 문전박대 하지는 않겠지요?”
“그럴 리가요? 이곳은 누구나 환영하는 곳입니다. 게다가 려 수사와는 오래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인 걸요. 그런데 이쪽은…….”
웃으며 답을 하면서도 늙은 도사의 시선이 한립에게서 오래 머물렀다.
“저는 낙운종의 한립이라 합니다. 원영기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천정 진인께 많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한립이 먼저 앞으로 나서서 포권을 했다.
“아, 려 수사의 동문이었군요! 끌끌, 한참 어려 보이는데 앞날이 창창하겠습니다 그려.”
도사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한립을 칭찬했다.
“그만 하면 됐고. 다른 이들도 거의 다 도착해 있을 테니 보러 갑시다.”
화룡동자는 천정 진인과 확실히 교분이 깊어 보였다. 서로 말을 함에 기탄이 없었던 것이다.
“휴, 남 형 성격이 그리 급해서야. 다른 분들은 거의 다 오긴 왔습니다. 아마 성질 급한 이들은 벌써 거래를 하고 있을지 모르지요. 여기 가면입니다. 남 형도 줄까요?”
천정 진인이 두 손을 펼치자 흰빛무리가 두 개 생겨나며 흑단목을 조각해 만든 가면 두 개가 나타났다. 가면에 복잡하게 새겨진 주술과 문양만 봐도 평범한 가면은 절대 아니었다.
“흥! 이런 몸뚱이를 누가 몰라보겠습니다. 환술로 가려봐야 누가 속기나 하겠어요?”
화룡동자가 볼을 부풀리며 울적하게 말했다.
“그도 그렇긴 합니다. 그럼, 세 분은 이제 들어가시죠. 이 노인네는 조금 있다 합류하겠습니다.”
나부끼던 안개가 사라지고 그 안에서 계단이 나타나 2층으로 통했다. 화룡동자가 거침없이 탁자를 지나 계단으로 걸어갔다.
려락과 한립은 그래도 천정 진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