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
376화. 강제거래
“강제거래요? 무슨 말씀입니까?”
려락은 불길한 예감에 안색이 변했다.
“별 건 아니고, 모 소저와 한 수사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서로 은애하는 사이겠지? 내게도 두 애첩이 있으나 조금 질려서 말이야. 그들과 한 수사의 시첩을 교환하고 싶은데 어떠한가.
내 두 애첩의 자색도 결코 뒤지지 않으니 강제거래의 조건에 맞고. 한 수사가 만일 거래를 원하지 않으면 바로 나와 의식을 겨뤄보는 거네. 이기면 자신의 시첩도 지키고 내 애첩들도 데려갈 수 있지.”
남롱후의 시선이 모패령의 몸을 서늘하게 스치고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려락은 그 소리에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모패령의 아름다운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려 사형, 강제거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강제거래는 주최 측이 원영기 수사들을 겨냥해 만든 규칙이네.”
“한 사제도 알다시피 어떤 세력도 함부로 원영기 수사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지. 그건 교역회를 주최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네. 그런데 이렇게 큰 교역회에서 분명 일종의 알력 다툼이나 충돌이 발생하기 마련이지 않겠나.
만일 원영 이상의 수사라면 진압하면 그만이지만 원영기 수사들이 그러면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게지. 그래서 이런 특수한 규칙들을 만들어 원영기 수사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게 하였네. 강제거래란 그 중에서도 가장 드물게 쓰이는 규칙이기는 하네만.”
려 사제가 설명을 해주면서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교역회 전후 기간 동안 개최지 천리 내에서 원영기 수사끼리 거래를 할 때, 한 쪽이 가격을 제시하고도 교환이 성사가 되지 않으면 이 규칙을 쓸 수 있어.
쌍방이 수행이나 실력으로 대결해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네. 하지만 이 규칙은 무척 제한적이지. 강제거래를 제안한 이는 이겨도 거래를 할 뿐 어떤 다른 이득을 취해서는 안 되고 쌍방은 서로를 다치게는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죽여서는 안 된다는 제한이 있어.
이를 어길시 주최 측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살하지. 그러니 정말 필요한 물건이 있거나 상대의 수행이 분명히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고 판단하지 않는 한 아무도 이런 짓을 쉽게 하지는 않네. 이득은 없고 원한만 쌓는 바보 같은 일이라서 말이야.”
시첩은 분명 거래의 대상이 되긴 했다. 마도나 사파 류의 수사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그런 유행이 돌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상대는 강제거래의 조건을 완전히 만족했다. 아마 구국맹 집법수사를 불러와도 이 대결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일로 한립이 죽을 걱정이야 없었지만 아직 교역회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봉변을 당하게 생겼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다만 모패령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려도 없었다. 그저 거래를 수락하면 비슷하게 아리따운 미녀 둘을 얻을 테니 손해는 아니구나 생각했다.
한립과 모패령은 함께 려락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한립은 침착했지만 모패령의 마음속은 후회와 걱정으로 가득했다.
교역회에 이런 규칙이 있는 줄 알았다라면 절대 한립에게 함께 데려와 달라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남롱후에 대해 몰랐지만 상대의 시첩들이 하는 양을 보니 한립의 곁에 있을 때처럼 순결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심지어 여인을 물건처럼 교환하는 사내라니.
모패령이 이를 악물었다.
“어떤가? 한 수사, 그냥 거래를 하겠나, 아니면 나와 대결을 해보고 거래를 하겠나?”
남롱후가 요수 마차 위에서 꼼짝을 않고 긴장감을 고조했다. 일순 주위가 고요해졌고 려락과 모패령은 물론 남롱후 곁의 두 시첩들조차 한립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립이 턱을 문지르더니 피식 웃어 보였다.
“의식대결이야 가능하지요. 저도 원영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수사들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지 알아보고 싶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요행히도 제가 이긴다면 군후의 애첩들은 되었습니다.
그저 남롱 수사가 굳이 의식 대결을 고집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그냥 제가 눈에 거슬렸다거나 정말 제 시첩에게 한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는 안 되겠지만요.”
흔들림 없는 한립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말에 남롱후는 눈에 이채를 띠었고 다른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어 그저 상황을 지켜보았다.
“좋네, 그러지!”
남롱후가 침묵하다가 한립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의 위엄 넘치는 얼굴이 진중해졌다.
“공자…….”
모패령은 한립이 대결에 응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됐다. 겨뤄보면 그만이야.”
“한 사제, 조심 또 조심해야하네. 그리고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패배를 인정하게. 이 사형이 바로 나서 대결을 저지할 테니.”
려락이 한숨을 쉬며 당부하자 한립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요수 마차 위의 남롱후는 벌써 품속의 시첩들을 밀어내고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한립도 몸에 푸른빛이 흐르더니 쏘아져나가 허공에서 그를 마주보았다.
본래 강제거래 규칙에는 구국맹 집법수사가 참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쌍방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면 없어도 그만이었다.
“어찌 하여 수사가 의식 대결을 고집하는지는 모르나. 군후의 용의가 정말 궁금해집니다.”
서로 다섯 장 거리에 진입했을 때에서야 한립이 멈춰서는 차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총명한 인사인 것 같군. 진짜 이유를 알고 싶다면 일단은 대결에서 나에 못지않은 의식을 선보여야 할 것이네. 조금 전 나를 훑던 수사의 의식이 생각보다 강력하지 않았다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네. 원영 초기와 중기의 차이는 그만큼 크니까 말이네.”
남롱후가 냉랭히 웃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저 시첩을 내줄 의향이 없으니 수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생각하고 임하지요.”
느긋한 언사와 달리 한립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의식의 기세는 엄청났다.
“어디 해보게!”
남롱후는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함을 치며 동시에 의식을 방출했다. 두 수사 사이에서 마치 육안으로 보일 듯한 무형의 기운들이 부딪쳐 폭음을 내었다. 맹렬한 돌풍이 불어 곳곳을 휩쓸었다.
이 모습에 남롱후도 흠칫 놀라 의식의 방출 정도를 몇 배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폭음이 끊이지 않으며 돌풍이 희뿌연 기류를 형성해 두 수사를 감싸니 둘의 신형이 모호해졌다. 이어 공중에 있는 듯 없는 듯 두 개의 그림자가 생성되었다.
“의식 화형(化形)? 어찌 이런 일이! 한 사제의 의식이 이렇게나!”
밑에서 결전을 지켜보던 려락이 상황을 지켜보다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의식 화형이요? 그럼 공자께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그야 나도 모른다. 보통 의식 화형은 원영 중기 수사들이나 보이는 능력인데……. 한 사제가 익힌 공법이 의식에 특화되어 있는 것인가? 분명 그럴 게야. 그러니 이런 강력한 의식을 지니고 있겠지.”
“그럼 공자께서 이길지도 모른다는 말씀이군요!”
“그건 또 다른 이야기지. 같은 원영 중기 수사라도 능력에 차이가 있으니까. 남롱후는 이미 300년 전에 원영 중기에 이르러 아마 중기 최고봉에 다다랐을 것이다. 사제가 이런 노괴물을 이기는 것은 어렵겠지!”
모패령은 막 생겨나던 희망이 사라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때 허공 위의 폭발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돌풍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번에도 려락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허! 믿을 수가 없구만. 한 사제가 밀리지 않고 있어!”
노인의 말에 모패령이 다시 크게 기뻐하며 무언가 질문을 하려했다. 그러나 하늘 위에서 갑자기 눈을 찌르는 섬광과 함께 엄청난 괴성이 들려왔다. 본래 어둑하게 주위를 휘감던 돌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수십 장 아래 있던 려락과 모패령 또한 이 흉흉한 돌풍의 영향권에 들었다.
“이런!”
려락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모패령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양 팔을 교차하자 남색 보호막이 떠오르며 두 사람을 감싼 것이다.
그 찰나 맹렬한 돌풍이 보호막을 때렸다.
퍽!
그 결과 이상한 충돌음이 들리며 돌풍에 맞은 보호막이 요(凹) 자를 그리며 움푹 들어가 버렸다.
돌풍이 분산되어 보호막 양측으로 흩어졌기에 보호막은 금방 다시 원형을 회복했다. 이제야 려락이 남색빛을 거두어 보호막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머지않은 곳에 있던 남롱후의 무사들도 숙련된 몸놀림으로 금빛 창을 들어 거대한 금빛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방패가 요수 마차까지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하얀 돌풍이 지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빛 보호막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돌풍의 남은 여력에 고스란히 당한 무사들과 여수사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려댔다.
요수 마차에 남아 있던 궁장 여수사들은 그나마 요수 마차의 금제로 인해 멀쩡했지만 기겁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광경에 모패령이 숨을 들이마시며 한립의 신형에 넋을 놓았다.
곧이어 허공에서 남롱후가 등장했고 그를 감싸고 있던 금빛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의 수하들에게 날아들었다. 금빛에 감싸인 이들이 비명을 멈추고 다시 본래의 안정을 되찾았다.
크게 놀라기는 했으나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
해야 할 일을 마친 남롱후가 다시 한립을 보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상당한 의식을 방출했는데 상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아마 자신처럼 여력을 남겨두고 대결에 임했을 것이다.
남롱후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던 간에 한립은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대결은 여기까지 인지요? 더 이어나가다가는 힘에 붙일 뻔 했습니다.”
“허허! 한 수사, 너무 겸손합니다. 공법은 몰라도 의식으로는 절대 본 후의 하수가 아니겠어요. 이번 대결은 여기서 그만 하죠. 안 그랬다가는 서로 의가 상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남롱후도 한립이 예를 차리는 김에 표정을 풀고 말했다.
달라진 어투에 한립이 작게 미소 지었다. 원영기 수사들의 세계에서도 실력이 곧 지위인 것이다.
남롱후는 의식 대결을 하며 한립이 막 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의식이 이리 강대하니 그가 찾던 조건에 부합했다. 이제 그가 도움을 청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한 수사의 의식이 본 군후에 못지않으니 대결을 청한 진짜 이유를 알려 주겠습니다. 수사의 말대로 다른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지요. 허나 이곳에서 말하기는 어려우니 이 옥간에 적힌 곳에서 교역회 사흘째 되는 날 다시 만납시다. 다른 수사들도 소개를 시켜주고 아주 중요한 소식을 공유하겠소.”
그리고는 저물대를 스쳐 작은 옥간을 쏘아 보냈다. 려락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한립이 의외의 말에 조금 놀랐으나 손을 뻗어 자신의 기운으로 옥간을 잡아채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남롱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옥간의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저물대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 모습에 남롱후가 화를 내기보다는 웃음을 터트리며 금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요수 마차의 금빛이 다시 왕성해 지더니 화살처럼 전천성 방향으로 쏘아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