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
375화. 남롱후
“허나, 한 사제가 제아무리 기재라 하여도 나이가 너무 어린데 실제 실력이 어떨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중년인이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걱정되는 바를 분명히 했다.
“그 생각은 나도 했네. 수행에만 매진하는 수사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강력한 술법이나 실력을 키울 방법도 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니까. 이런 수사들은 수행이 높아도 일단 실전에 임하면 동급 수사에게 밀리기 마련이지. 비록 내 보기에 한 사제가 그런 부류로는 보이지 않지만 확인을 해보기는 해봐야겠어. 그래서 이번 교역회에는 내가 남아 종문을 지키고 사제가 한 사제와 같이 다녀와야겠네.”
“사형의 말씀은 그럼?”
은발 노인의 표정에 려 중년인이 무언가를 깨달았다. 노인이 빙긋 웃으며 대답을 하려는데 돌연 눈앞의 안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요동치던 안개는 양편으로 갈라지며 입구를 만들어냈다.
중년인과 은발 노인이 바로 입을 다물고 곧바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 * *
3개월 후, 천남 지역에서 백년에 한 번 열리는 최대 규모의 교역회가 천남 북단 우국에서 열렸다.
우국의 모처의 깊은 산 속에는 전천성, 구국맹 총단이 위치한 곳이자 천남지역 유일한 수사들의 성이었다.
이 성에 거주하는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영근을 지닌 수사였다. 원영 중기 이상의 구국맹 노괴들만 해도 예닐곱이 되었다. 겁 없이 이 성에서 나댔다가는 그 자리에서 멸살될 수도 있었다.
이것이 정마 양도는 물론이고 천도맹이나 산수들도 이곳에서는 제멋대로 굴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천남 지역 제일의 교역회가 열리기 한 달 이전부터 주최 측이라고 볼 수 있는 구국맹은 명성이 자자한 거대진법인 상원멸광진(上元滅光陣)을 대부분 해제해 놓고 있었다.
멀리서 오는 수사들은 미리 와서 성내에 머물고 있기도 했고 심지어 성질 급한 이들은 성내의 시장을 찾아 벌써 좌판을 깔아 놓고 거래하기도 했다.
교역회가 정식으로 벌어지는 며칠간은 각종 희귀한 물건이 쏟아지지만 보통 수사들은 엄두를 못 낼 가격이 형성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적당히 원하는 것을 거래하려면 서두르는 것이 좋았다.
적막했던 전천성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끌벅적해졌고 시장은 거의 속세의 범인들이 사는 성을 방불케 했다.
성 내의 유일한 경매소는 구국맹이 운영했고 벌써 진귀한 물건들이 경매에 붙여져 높은 가격에 팔려나가고 있었다.
전천성 전체의 열기가 아주 뜨거웠다.
교역회를 겨우 열흘 앞두었을 때, 수 천리 밖에서 세 갈래의 빛줄기가 성으로 접근했다.
빛이 가시고 보니, 사내 둘에 여인 하나로 이뤄진 무리였다.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푸른 장삼을 걸친 청년 곁에 붙어 있었는데 여인의 표정이 꽤나 다정했다. 다른 한 명은 쪽빛 장삼을 휘날리고 선 중년인으로 기세가 남달랐다.
그들은 당연히 멀리 계국에서 날아온 한립과, 려 장로 그리고 한립의 시첩 인 모패령이었다.
은발 장로는 불미스러운 일을 대비해 낙운종을 지키고 있기로 했다. 그래서 한립과 려 장로가 이곳에 나타나게 되었다.
모패령은 마침 수련에 고비가 와서 폐관을 마치고 나왔다가, 천남 제일의 교역회에 참석한다는 이야기에 한립에게 함께 가도 될지 허락을 구했다.
만일 결단에 실패한다면 백 년에 한번 열리는 이 교역회가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한립은 이번 일정이 위험하지도 않다 여겨 바로 허락해주었다.
먼 거리를 다녀오는데 일행 중에 미녀가 있는 것도 나쁠 것 없었다.
한립과 려 중년인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주변을 지나가던 수사들이 두 사람을 보고는 안색이 달라져 즉시 달아났다. 평범한 수사들이 원영기 수사가 둘이나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길을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모패령은 처음에는 이런 일들이 약간 불편했지만 보다보니 금방 익숙해졌다.
이때 려 장로가 갈 길을 재촉하면서 온화한 얼굴로 한립을 보았다.
“교역회가 전천성에서 열리기 시작한 것은 백 년도 안 되었네. 이전에는 정마 양도에서 주최를 해서 천라국과 풍도국에서 번갈아 열렸지. 그때는 천도맹도 만들어지기 전이었고 구국맹은 또 모란의 법사들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워 이런 잔치를 열 곳이 정마 양도뿐이었거든.
하지만 정마 양도의 세력이 너무 커져 다른 세력이 견제에 들어가면서 저번부터 중립이라 할 수 있는 구국맹이 교역회를 맡게 되었네. 정마 양도가 한방 먹은 셈이야!”
“전천성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천남 지역 전체에서 수사들로만 이뤄진 유일한 성인데, 법사 연합군이 우국을 침략했을 때 이곳 전천성에서 막 결성된 구국맹 수사들이 상원멸광진을 이용해 물리쳤다고요. 그 일전에서 원영기 수사만 해도 여러 명 전사했다니 전황이 처참했을 것 같습니다.”
한립의 관심에 중년인이 미소 지었다.
“하하! 한 사제, 안심하게. 전천성은 절대 사제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폐관을 마치고 난 뒤부터 사제가 좀 달라 보이는군. 수행이 늘어난 것뿐 아니라 어떤 공법을 대성하기라도 한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가.”
“새로운 공법을 수련하는 중이기는 하나 대성하기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들으니 려 사형의 천랑결(千浪決)이야말로 최상급 공법 중에서도 명성이 높다던데 기회가 되면 한번 보고 싶습니다.”
자연스레 미소 지은 한립이 자신을 떠보는 중년인에게 화제를 돌렸다.
“제자들이 허튼 소리를 하고 다니는구만. 내 천랑결은 어찌 보아도 평범한 물 속성 공법에 불과하네. 결단기 수사를 상대하기에는 여유가 있어도 동급 이상의 수사와 싸울 때는 불리하지. 그나마 두 가지 썩 괜찮은 기술이 있어서 지금까지 숨이라도 붙어있는 거네.”
려 장로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의 말을 한립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저번 정마 양도의 습격 속에서 려 장로는 멀쩡하게 빠져 나왔지만 오히려 수행이 조금 더 높은 은발 장로는 중상을 입고서야 달아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썩 괜찮은 기술은 분명 비범한 한수일 것이다. 한립이 대답을 하려다 얼굴이 굳어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자, 무슨 일이 난 것입니까?”
곁에 붙이 서있던 모패령이 호기심에 물어왔다. 이미 한립의 시첩이 되었으니 이전처럼 냉랭할 수만은 없었다.
“어떤 수사 무리가 다가오고 있는데 그 중에는 원영기 수사도 있구나. 보아하니 우리를 향해 오는 것 같다.”
한립이 굳었던 얼굴을 풀고 침착하게 답했다.
“오! 정말 그렇구만. 나보다 빨리 알아차리다니 사제의 의식이 예상보다 더욱 강하겠어. 게다가 전천성 인근에 와서도 의식을 퍼트려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니, 주의 깊고 세심하기까지!”
려 장로가 그를 다시 보았다는 듯 말하자 한립이 그저 웃고 말았다.
사실 그의 강대한 의식이면 일부러 살피지 않아도 이 정도는 자동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 다가오는 수사도 그 거리에서 한립과 려 장로를 발견했으니 그만큼 의식이 강력한 자일 것이다.
한립과 려 장로가 누가 오나싶어 날아가는 속도를 줄였다.
잠시 후, 북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늘 끝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온몸을 금색 투구와 갑옷으로 가린 무사들이 화려하게 치장한 요수 마차를 호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리 앞에는 흰 두루미가 날아다녔고 뒤쪽으로는 궁장 차림의 여인들이 줄을 이어 무슨 왕이라도 행차하는 듯 했다.
모패령이 화려한 행렬에 눈을 크게 떴고, 한립도 속으로는 의아했지만 표정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수도계의 수사라는 자들이 별별 이상한 족속들이 많았고, 특히 원영기에 이르면 성정이 괴이해지고 이상한 짓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조금 놀라기는 했으나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려 장로는 행렬을 보고는 깜짝 놀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롱후! 저 노괴도 교역회를 왔단 말인가.”
그가 한립에게 속삭였다.
“능력은 뛰어난데 성정이 괴이한 인사이네. 한 사제, 각별히 말조심하게. 일면식이 있는 내가 상대함세.”
급히 당부한 중년인이 한립과 허공에 멈춰 서서 공손히 무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려 장로의 긴장한 모습에 한립도 약간의 표정 변화가 생겼지만 굳이 여러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에 모패령도 눈치 있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금색 갑옷의 무사들과 요수 마차가 다가왔는데 한립이 무리의 상황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창을 든 무사들은 용맹하게 생겼지만 그저 축기기 수사들에 불과했다. 한립이 놀란 것은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의 영수 때문이었다.
온 몸에 푸른 비늘로 뒤덮이고 머리에 뿔이 난 이 녀석은 전설상의 기린과 흡사했고, 타오르는 듯한 붉은 날개는 봉황을 닮아 있었다.
마차가 가까워지자 려 장로가 밝은 목소리로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안에 계신 분은 남롱 군후(君侯) 아니십니까? 저는 낙운종 려락이라 합니다. 저번에 군후를 뵈었을 때가 300년 전, 스승님이신 목리 상인(上人)을 따라 나섰을 때였으니.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려 장로가 비굴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적정선에서 인사를 건넸으나 한립은 그가 남롱후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수사를 대하는 것과 비슷했다.
“호, 알고 보니 목리 녀석의 제자였구나. 그때는 결단기 수사였던 것 같은데 300년 만에 원영을 응결하였어! 목리는 그때쯤 세상을 떴다 들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지. 그런데 옆의 수사는 얼굴이 낯선데 누구더냐?”
금빛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지막에 한립을 언급했다.
한립은 듣고도 그저 미소를 보일뿐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려 사형이 곧 금빛 속의 남롱후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나서서 한립을 소개했다.
“군후, 이쪽은 저희 낙운종에 새로 들어온 한립 사제라 합니다. 원영을 응결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요. 그 옆의 모 소저는 그의 시첩입니다. 한 사제, 군후는 내 사부님의 벗이셨네. 인사 나누시게.”
“남롱후를 뵙습니다!”
한립이 소매를 펄럭이며 포권을 했다.
“한립? 이름이 낯선 것이 확실히 새로 원영기에 든 수사인가 보군. 실력이 어떤지 본 후가 시험해 보면 어떤가?”
남롱후는 뜻밖에도 요수가 끄는 마차 안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
“네? 한 사제는 원영을 응결한지 채 몇 년 되지 않았는데, 어찌 남롱 수사의 적수가 되겠습니까. 수사는 원영 중기에 이르렀지 않습니까.”
미소를 머금고 있던 려락의 얼굴이 굳어갔다. 아무리 이 노괴의 성정이 이상하다지만 만나자마자 실력을 시험해 본다니!
“본 후도 영력을 가지고 어쩌자는 게 아니니 걱정 말게. 그저 의식을 겨뤄 보자는 것이지. 막 원영을 응결한 수사 같지 않게 방금 한 수사의 의식이 녹록하지 않던데 어디 그 솜씨를 보고 싶군.”
남롱후의 이 말을 끝으로 요수 마차 위의 금빛이 사라지더니 세 명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 하나와 여인 둘이었다.
사내는 용이 그려진 자줏빛 금포에 머리에는 벽옥으로 만든 관을 쓰고 가슴까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꽃처럼 화사한 여인들이 새하얀 궁장을 입고는 그의 품에 기대 있었다.
사내가 당연히 남롱후였고 양 옆의 여인들은 십중팔구 그의 시첩과 같은 부류일 것이다. 여인들은 축기기 정도의 수행에 부드러운 살결과 유려한 선을 지녀 아주 고혹적이었다.
“농담이시지요. 한 사제의 의식이 강한 편이기는 하나, 의식을 겨루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인데 어찌 함부로 대결을 하겠습니까.”
려락이 정말 조금 다급해져서 그를 어려워하던 것도 잊고 바로 상대의 제의를 거절했다.
“흐흐, 려 수사 뭘 그리 급하게 구나? 한 수사 본인이 대결을 원할지도 모르는 것을.”
남롱후가 냉소하며 한립에게 시선을 돌렸다.
“게다가 만일 한 수사가 내 호의를 거절한다면…… 여긴 이미 전천성을 기준으로 천 리 내이니 ‘강제거래’의 규칙이 적용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