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
374화. 두 번째 원영
3개월 후, 밀실 안의 한립은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은 채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전신에 푸른빛이 물결치는 것이 어떤 공법을 수련하는 중인 듯 했다.
한참 후, 두 눈을 번쩍 뜬 그의 안광이 반짝였다. 한립이 두 말할 것 없이 허리춤의 영수대를 낚아채서는 허공으로 날렸다.
“가라!”
웽웽웽웽.
동시에 수천 마리의 삼색 서금충들이 벌떼처럼 날아올라 신속하게 일 장 높이의 거대한 무리를 만들어 그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한립이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몸을 일으키며 기묘한 보법을 밟았다. 입으로는 주술을 외다 돌연 두 팔을 펼치니 푸른 안개가 피어올라 구름처럼 모여 있는 날벌레들을 안에 가두었다.
서금충들의 웽웽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베틀처럼 좌우로 움직여댔다. 그런데도 서로 부딪치는 서금충이 없었으니 그 움직임이 현묘했다.
눈을 부릅뜨고 날벌레 떼를 주시하던 한립이 잠시 후 한 손으로는 수결을 맺으며 다른 한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찬란한 푸른빛에 휩싸여 있던 날벌레 떼가 수직으로 하강해 그를 에워싸고 엄청난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그 미칠 듯한 움직임이 물샐틈없이 그를 감싸 영충 보호막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광경에 한립의 입가에 웃음기가 맺혔다. 하지만 순식간에 미소를 거두며 또 한 번 입에서 기운을 뿜어냈다. 모든 영충들이 한립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푸른 섬광이 터져 나오며 도저히 눈을 뜰 수 없게 되었다.
잠시 후, 푸른빛이 사라지자 삼색 무늬의 고풍스러운 갑옷이 한립의 몸에 걸쳐져 있었다.
이 갑옷은 푸른빛이 반짝이면서도 윤기가 반지르르해 한 눈에도 엄청난 견고함을 자랑했다.
한립의 미소가 짙어졌다. 한손을 들어 갑옷의 표면을 만져보았는데 일반적인 법보와 차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매끄러웠다.
“좋군! 서금충을 응결해 갑옷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은 허천전에서도 했었는데 어령종 수사들이 이미 개발을 해놨다니. 천남 지역에서 영충을 다루는 것으로 이름난 마도 종파답구나. 터무니없는 발상을 현실로 만들어냈어.”
지금 한립의 수행과 깨달음으로 이 정보 비술을 익히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영충을 다루는 비술들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영충을 이용한 다양한 공격 기술에 감탄한 것이다.
특히 이 충갑술은 그가 상상만 하던 것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이전에도 그는 삼색 서금충을 지휘해 도(刀)나 검(劍) 같은 간단한 형상을 만들어 내기는 했다. 하지만 갑옷과 같은 복잡한 물건은 만들어내기가 여의치가 않았었다.
그런데 옥간에 기재된 충갑술 법결을 익히자 겨우 몇 개월 만에 완벽한 갑옷의 형상을 응결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한립은 기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아마 이 충갑술을 고안한 고인은 서금충 같은 강력한 영충은 얻지 못했을 테니 완성된 갑옷은 진짜 보갑에 비해 방어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거기에 영충 자체가 희귀하니 이런 술법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삼색 서금충의 등딱지는 원래도 단단한데 거기에 응결까지 했으니 웬만한 보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금색 서금충을 장악해 갑옷으로 응결할 수 있다면 엄청난 보갑이 될 것이다.
한립은 자신만만했다. 완전히 진화를 마치고 성체가 된 서금충을 상상하니 짜릿했다. 한참 후에야 한립은 평정심을 되찾았다.
충갑을 매만지던 그가 고심 끝에 입에서 다시 영기를 내뿜었다.
충갑이 흩어지며 영충으로 돌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한립의 영수대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한 그가 저물대에서 푸른 옥간을 꺼내 들었다. 신여음이 남긴 바로 그 서책이었다. 두 손으로 옥간을 든 그의 눈이 흐려지며 의식 속에 침잠했다.
앞쪽의 고대진법은 일단 놔두고 바로 가장 마지막에 기재된 현모화영대법의 구결을 찾아냈다. 이 공업은 구결이 난해하고 숨겨진 뜻이 많아 한립은 장장 반년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겨우 절반 정도를 이해했다.
이 공법은 겉보기에는 도가의 일기화삼청과 닮아있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지는 도가 제일의 현묘한 공법이라는 일기화삼청을 살펴볼 기회가 없던 한립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마도에서 신외화신(身外化身)이라 부르는 비술과는 확연히 달랐다. 현모화영대법을 수련해 내면 완전히 독립적인 두 개의 원영을 지닐 수 있게 되는데 하나의 원영이 소실되어도 다른 원영은 생존할 수 있었다.
주가 되는 첫 번째 원영이 사라지면 두 번째 원영도 크게 원기를 상하게 되지만 천천히 보양을 하면 첫 번째 원영으로 거듭난다. 만일 소실되는 것이 두 번째 원영이라면 주가 되는 첫 번째 원영이 받는 영향은 미미하다고 볼 수 있었다.
더욱 한립을 유혹하는 것은 일단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하는데 성공하면 뛰어난 수사의 몸과 융합해 화신(化身)처럼 부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화신을 만들어 두면 본체 밖에 두 번째 존재를 준비해 두는 것과 같았다. 만일 본체가 재가 되어 사라져도 화신이 존재하기에 한립은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
어쨌든 두 개체의 기억과 감정은 같았으니까 복제된 두 번째 원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래 전 제련했던 곡혼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당초 한립이 제련한 소위 살단분신은 그의 원신에서 극히 일부의 의지를 불리해 낸 것이기에 기억과 감정이 담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유의지도 없었다. 마치 최상급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화신인 곡혼은 한립과는 너무 멀리 떨어질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능력을 곧 상실할 테니까.
그러나 현모화영대법으로 만들어낼 화신은 달랐다. 본체와 만 리를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었고 명령과 지시가 없이도 스스로 생각해 행동하고 수련했다. 보통의 수사와도 전혀 차이가 없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한립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계속 익혀가다 보니 결국에는 이 공법의 제약과 약점도 드러났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서 활활 타오르던 의욕에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들었다. 공법을 펼치는 것이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가장 관건이 되는 두 번째 원영 응결부터 문제였다.
보통 원영을 응결해 원영기 수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시간을 들여 단전을 해체해야 한다. 그런데 두 번째 원영을 응결하기 위한 두 번째 금단이 있을 리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다른 원영기 수사의 원영을 차지해 상대의 의식을 지워내고 자신의 의식과 동화를 시키는 것이었다.
옥간에는 원영을 차지하고 상대의 의식을 지워내는데 필요한 법결과 방법이 적혀 있었지만 위험성이 높고 성공확률이 극히 낮았다. 천운이 따라줘서 원영을 확보하는데 성공해도 이후의 과정도 매우 어려웠다.
원영을 강제로 빼앗아 온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동화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자신의 의식이 삼켜질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제련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두 번째 원영으로 화신을 만들고자 한다면 적합한 육체를 찾아내야 한다.
당연히 육체의 본래 수행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가장 좋은 것은 원영기 수사의 육체였다. 그래야 화신이 쓸모가 많을 테니까.
그러나 원영기 수사를 생포하는 일은 죽이는 일보다 훨씬 어려웠다. 특히 상대가 동급 수사라면 더욱 그랬다. 또한 이 현모화영대법에 성공하더라도 화신이 반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한립은 깊은 고민에 빠졌지만 이런 대법을 시도해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일단 성공하면 목숨이 하나 더 생기는 것과 같았으니 말이다!
다만 어떻게 다른 수사의 원영을 빼앗아올지는 생각이 필요했다. 한립이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가 저물대에서 부적과 금제로 뒤덮인 옥함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한립이 어렵게 구속한 지목령영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도 한립은 거의 반나절을 침묵했다. 류미의 설명을 들었으니 그도 이것이 보통 원영기 수사의 원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령종에서 오행령영 비술을 펼쳐 결단기 수사를 원영기 수사로 융합해 내는 것을 보면 실제 원영과 비슷한 면도 많을 것이다.
이걸로도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해 낼 수 있을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이걸 가지고 있어봐야 쓸데도 없는데 한번 시도를 해봐도 손해 볼건 없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걱정되는 것은 이 정체 모를 원영에게 거꾸로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원신은 크게 상하고 어떤 후유증이 남을지 알 수 없었다.
한참동안 옥함을 바라보던 한립이 한숨을 쉬고는 다시 그것을 저물대에 넣어두었다. 이어 손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며 다시 연한 청색의 옥간을 손에 쥐었다.
무턱대고 두 번째 원영 제련을 시도할 게 아니라 일단은 현모화영대법의 구결을 완전히 익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위험성이 큰 만큼 더욱 신중하게 시도해야 했다.
마음을 정한 그는 옥간에 의식을 불어 넣어 법결을 익히는데 빠져들었다.
폐관실이 굳게 닫히고 은월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밀실에서 고요히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거처의 잡무들은 거대 원숭이 꼭두각시들이 맡아 하고 있었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 봄이 시작되나 싶더니 곧 겨울이 왔다.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이날, 한립의 거처로 푸른 빛줄기와 하얀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왔다.
빛이 사라지고 짙은 안개 밖에서 두 명의 낙운종 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발 노인과 려 씨 중년인이었다.
두 수사가 엄청난 규모의 결계를 보고 서로 눈을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려 중년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미리 준비해둔 전음부가 나타나 불꽃으로 변해 금제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그가 고개를 돌려 웃는 낯으로 은발 노인을 보았다.
“한 사제가 저번에 돌아와서는 계속 거처에만 있었나 봅니다.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수련에만 매진하는군요.”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200살의 어린 나이로 원영 응결에 성공할 수 있었겠나. 안타깝구만,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나는 아마 수행의 길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하겠지.”
“사형, 왜 그러십니까. 사형의 나이면 적어도 일, 이백년은 더 살 수 있을 텐데요.”
중년인이 서둘러 그를 위로했다.
“헤헤, 려 사제! 정말 몰라서 하는 말도 아니지 않은가. 지난번에 부상을 입지만 않았어도 일, 이백 년은 거뜬히 더 살았겠지. 이제 그 부상은 거의 나아가지만 원기를 크게 상해 다가오는 끝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네.”
“사형!”
려 중년인이 안색이 변해 무어라 하려는데 노인이 손을 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몸을 사려도 기껏해야 오륙십년이겠지. 이 점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네. 그렇지 않았다면 성급히 한 사제를 우리 낙운종에 영입하고 서둘러 좋은 관계를 닦으려 애쓰지는 않았을 것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상대를 끌어들이고 싶어도 정체와 내력을 철저히 조사한 끝에 제안했겠지. 허나 이제는 내 판단이 옳다고 믿네. 한 사제는 곡절이 있기는 해도 확실히 우리 낙운종에 악의를 지니고 들어온 수사는 아니야.”
은발 노인의 차분한 이야기에 려 중년인이 눈을 크게 떴다.
“사형, 저번에 파견한 제자가 한 사제의 내력을 알아온 겝니까?”
“그래, 스스로는 말을 아꼈지만 이름, 평범한 외모, 월국 출신이라는 실마리를 가지고 몇몇 제자들을 보내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우리 한 사제의 대략적인 출신을 파악해냈지.
내가 말해 줘도 믿기 어려울 거야. 한 사제는 백 년 전에 놀랍게도 월국 황풍곡의 축기기 수사였더군! 게다가 마도와의 전쟁에서 많은 동급 수사들을 죽여 꽤 이름을 날렸던 축기기 수사였다는군.
후에 황풍곡이 전쟁에서 패해 달아나는데, 그 교활한 령호 노괴가 눈이 삐었는지 우리 한 사제를 희생양 삼아 내버렸다는 게야. 그 뒤로 한 사제는 자취를 감추었는데 어딘가에서 고되게 수련을 하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난 게지.
그것도 결단 후기의 고계 수사로 돌아와 우리 낙운종에서 원영에 성공해서 말이야. 아마 공백 기간 동안 어떤 기연을 얻었을 게야.”
“희생양 삼아 내버렸다고요? 허, 누가 알면 크게 비웃을 일입니다. 제 문파의 제자를, 그것도 단시간에 축기에서 원영까지 성공할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할 기재(奇才)를 버리다니.
령호 노괴가 이 사실을 알면 열 받아 펄쩍 뛰지 않을까 모르겠어요.
지금 황풍곡은 구국맹에서 겨우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겨우 그 노인 혼자서 버티는데 어려움이 많지요. 그리고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형님과 비슷한 연배이니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요.”
려 중년인이 냉소하며 령호 노괴를 비웃었다.
“령호 노괴는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지만 양생술(養生術)에 정통하니 수명은 꽤 남았을 게야. 원영기 수사가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풍곡에 당장 큰일이 생길 가능성은 적어지지. 원래 나도 우리 낙운종이 비슷한 일을 겪을까 걱정했네. 내가 가고 나면 사제 홀로 남아 어찌 이곳을 꾸려나갈지!”
“우리가 운몽산 영산을 차지하고 있지만 않더라도 사제로 충분했을 게야. 종파의 세력이 꺾이는 순간 적지 않은 종문들이 우리를 물어뜯으려 달려들겠지. 그래서 원래는 사제에게 내가 떠나면 자발적으로 운몽산을 내주고 본종을 옮기라 당부할 생각이었네. 그런데 지금은 한 사제가 있으니 모든 것이 달라졌지.”
“한 사제가 수련만 하느라 문파의 일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그게 나는 더 마음이 놓여. 절체정명의 위기가 닥치지 않는 한 존재만으로도 낙운종의 다음 천년을 지켜줄 테니까.”
은발 노인이 길게 늘어뜨린 수염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