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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73화 (130/2,000)

# 373

373화. 서리꽃과 푸른 화염

영충이나 영수를 다루는데 필요한 고계 비술은 어령종이 가장 중요하게 지켜온 술법이었다. 만일 이것을 종파 밖으로 유출시킨다면 종문을 배반한 대역죄였다.

아무리 한립의 뜻을 거스르지 말자고 마음을 먹었다지만 이런 요구에는 속이 탈만 했다.

“종문 내부의 공법을 유출하는 것은 혼백을 뽑힐만한 대역죄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만일 제가 선배님에게 관련 비술을 알려드린다면 소녀를 어찌 하실 작정이십니까.”

류옥이 불안한 눈길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내가 원하는 영충의 알과 필요한 공법만 얻고 나면 너는 자유다. 나는 너를 어찌하지 않을 것이야. 다만 어령종으로 돌아갈지 말지는 네가 정하면 된다. 천하가 이렇게 드넓은데 갈 곳이 없겠느냐?”

한립은 마치 별 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이야기했다. 류옥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한참 만에 입가에 쓴웃음을 보였다.

“선배님은 그리 쉽게 말씀 하시지만, 만일 산수가 된다면 소녀는 평생 원영을 응결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제가 이미 선배님의 신분을 알고 있는데 어찌 자유롭게 놓아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내가 맹세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아니면 영충과 공법을 걸고 협박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협박이라뇨?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럼, 어찌 하고 싶으냐?”

“선배님께서 개의치 않으신다면 소녀 선배님의 문하에 들어 제자가 되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류옥이 버들가지 같은 눈썹을 내리며 한립을 응시했다.

“내 제자가 되고 싶다고?”

“예. 선배님의 수행이면 저의 스승님이 되시고도 남습니다. 게다가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선배님의 문하에 들어 얻게 될 비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배님께서 저를 살려 보내주신다고 해도 일평생 어령종 수사들의 추격을 받아 죽게 될 테니까요.”

한립의 손가락이 석회암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어령종에는 스승으로 삼은 이가 없었나보군. 하지만 내 문하에 들어오면 가문에는 어찌 고할 거지?  천도맹과 마도가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잘 알고 있을 터.”

턱을 만지작거리는 한립은 차분하기만 했다.

“소녀 축기부터 결단까지 모두 스스로의 자질과 운에만 기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껏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신 적도 없고요. 저희 가문은 원래도 수사를 얼마 배출하지 못했는데 지금에 이러서는 오직 저만 남았으니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정 그렇다면 내 문하에 드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리 말하건대 난 네 몸에 금제를 걸어둘 것이고 이후 수행에도 별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야. 대신 내 기명제자라는 신분으로 낙운종에 들어와 스스로 수행을 닦는 것은 가능하지. 그렇게 하겠느냐?”

“금제를 걸어두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쨌든 소녀는 이전에 어령종 수사였으니까요. 선배님이 제 안전만 보장해 주신다면 다른 것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죽다 살아난 목숨인데 지도까지 바랄 수는 없겠지요.”

류옥은 한립처럼 오로지 수련에만 정진하는 수사들을 이해했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여인의 시원시원한 결정에 한립이 도리어 조용해졌다. 그의 눈에 이채가 어리더니 결국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조건을 모두 수락한다니 이제 와서 내칠 수야 없겠지. 내일 낙운종의 다른 장로들에게 인사시킬 것이니 이름을 바꾸고 낙운종 제자가 되어라!”

“감사합니다, 선배님!”

류옥은 목숨을 보전한 것을 알고 기뻐하며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일단 깨어난 석실로 돌아가 쉬고 있으면 다시 불러 의식을 금제하는 술법을 시전하고 법력 구속을 풀어주마.”

한립이 손을 저어 그녀를 물리자 류옥이 감사를 표하고 대청을 나갔다. 잠시 후, 대청 구석에서 노란빛이 번뜩이더니 은월이 허공에 뜬 채 나타났다.

“응?  아직도 원형으로 돌아가지 않았어?”

한립이 그녀를 보고는 의아해했다.

“수행이 늘었느니 자연히 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늘었지요. 그런데 주인님, 정말 저 여인을 제자로 들이시려고요?  이전에는 제자를 들이시기 싫어하셨잖아요. 육익상공의 주인이라 그러신 겁니까?  기충을 다루는 술법 정도는 몽인술로 강제로 알아내도 될 텐데요.”

“그래, 육익상공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네 생각에는 건람빙염을 모두 제련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글쎄요. 적어도…….”

은월이 한립의 질문에 멍해져서는 바로 답을 내지 못했다.

“건람빙염 한 오라기를 제련해 내는데 1년이 필요하다고 치면 전부를 제련하는데 적어도 200년이 걸릴 거야. 길어도 너무 긴 시간이지. 그런데 이 육익상공들이 분출하는 한기를 이용하면 이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게다가 건람빙염을 더욱 북돋아 줄지도 모르지.”

담담히 이야기를 마치며 한립은 두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펴자 손가락 끝부분이 각각 하얀색과 남색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눈처럼 새하얀 서리꽃과 푸른빛의 화염이 각 손가락 끝에서 떠올랐다.

“이게…….”

은월의 놀란 목소리를 들으며 한립이 입김을 훅 불어내자 푸른 안개가 분출되어 하얀 서리꽃과 푸른 화염을 감쌌다.

서리꽃과 푸른 화염이 순식간에 별빛처럼 줄어들어 한데 섞이며 낮은 폭발음과 눈부신 빛들이 터져 나오자 푸른 안개 속에서 자줏빛 새가 등장했다. 작은 날개를 퍼덕이며 춤추듯 나는 모습이 아주 날렵했다.

손가락 크기의 작은 자줏빛 새를 보며 한립은 만족스러웠다. 심지어 그의 시선 깊숙이에서는 일말의 흥분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은월, 현골 노마가 펼치던 수라성화를 기억 하느냐?”

“수라성화…… 기억합니다. 귀도성화(鬼道聖火)라고도 불리는 마염이 아닙니까. 만일 당시 현골이 이것을 제련해 냈다면 천하제일은 못되더라도 대적할 자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설마 주인님이 융합해낸 게 바로 그것인지요?  전혀 달라 보이는데요.”

은월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이것은 수라성화는 아니다. 심지어 나도 이 불꽃의 정체를 모르겠으니까. 허나 그 위력은 분명 건람빙염 이상일 것이다. 만일 육익상공이 진화를 해서 더욱 강력한 한기를 내뿜는다면 그것을 이용해 이것을 키워갈 수 있을 게야.

그리고 나중에는 수라성화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나도 무의식중에 육익상공이 내뿜은 한기를 흡수하고는 알아낸 사실이니 운이 좋았다.”

말을 마친 한립이 손끝을 움직이자 자줏빛 화염의 새가 그의 손끝을 두어 번 돌고는 신속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은월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경하 드립니다! 건람빙염만 해도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는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데 이제 새로 융합한 마염을 얻으셨으니 천남 지역을 제패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은월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이니 그 몸짓에 웬만한 사내는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듯 했다.

“천남을 제패한다고?  허튼 소리. 원영 중후기의 수사만 해도 몇 명이나 있을지 알 수가 없으며 노괴들의 품고 있는 비장의 한수는 오죽 많을까. 또 어떤 것이 내 마염과 상극의 속성을 지니고 있을지 알 수 없다.”

한립이 신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세상에 그런 우연이 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 수 없지. 기충방 서열 20위 권 안에 드는 서금충을 그에 한참 못 미치는 서열의 혈옥지주가 억누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를 마주친다면 상황은 급변하겠지. 이 마염 역시 상극인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 거야. 본디 이 세상에서 진정한 무적의 공법이나 보물은 없는 법이니까.”

“주인님은 정말 치밀하고 신중하세요. 그렇다면 여러 가지 승부수를 준비해서 모든 상황에 대비하는 방법 밖에 없겠습니다.”

오랜만에 한립이 말할 맛이 나는지 유유히 이야기를 해나갔다.

“이전에 제자를 받지 않은 것은 수행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줄곧 본적 없이 떠돌아다녔기 때문이기도 해. 제자를 받으면 반드시 짐이 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낙운종에 안착을 했으니 나만의 세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겠지.

수도계에서 개인의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정말 혈혈단신이라면 불편한 점도 적지 않으니까. 최소한 적시에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하기도 하고 말이야.

2년 후에 우국에서 있을 교역회에 대해서도 먼저 통보해 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듯이 말이야. 그럼 미리 준비할 시간을 잃는 셈이지. 그리고 류옥이란 여인은 수행은 높지 않아도 수련밖에 할 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것 같았다. 낙운종에 들어오면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세력을 넓히려 노력하겠지.”

“금신술을 걸어 놓았으니 주인님의 수행을 초월하지 않는 한 일평생 배신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그녀의 세력이 바로 주인님의 세력이 되는 것이지요.”

“알면 됐다.”

은월이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한립이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다 곧바로 철서수에게로 향했다.

아까 한 대 맞고 뻗었던 녀석이 슬금슬금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전의 사나운 기세는 많이 줄어들어 한립을 보는 눈빛에 두려움이 묻어났다.

“내게는 불필요한 영수이지만 가전 되는 영수라 따로 제련할 필요 없이 법기만으로 부릴 수 있어. 물물교환을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물건이야. 네가 교육을 시켜서 영수실에 가둬 놓거라.

이걸로 우국 교역회에서 어떤 진귀한 보물로 바꿔올 수 있을지 기다려보자꾸나. 난 류옥에게 금제를 펼쳐두고 와야겠다.”

한립이 저물대에서 새까만 영패를 하나 꺼내 은월에게 던져주었다.

“존명!”

은월이 영패를 받으며 공손히 답했다. 한립이 바로 대청을 나가버리자 은월이 혼자 남아 영패를 만지작거렸다.

한립의 말을 되새기며 영패를 들어올리자 영패에서 강력한 기운의 노란 빛이 방출되어 철서수가 갇혀있는 보호막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대청이 영수의 처절한 울음소리로 울려대기 시작했다.

* * *

이튿날, 한립이 류옥에게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바로 은발 노인의 거처로 향했다. 당연히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 하지 않고 자신과 인연이 있는 아이라 어령종에서 데려오게 되었고 앞으로 문하에 들여 돌볼 것이라고 밝혔다.

은발 노인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한 사제가 어찌 마도의 구역을 휘젓고 돌아왔나 했더니만 모두 류 사질을 위해서였군. 본 종에 결단기 여수사가 늘어나는 일은 모두가 고대하던 일이네.”

은발 노인은 단박에 류옥의 낙운종 입문을 허락했다. 한립도 이에 만족해 노인과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다가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후, 류옥은 정식으로 이름을 류미로 바꾸고 한립 문하의 첫 번째 기명제자가 되었다.

한립이 친히 그녀의 수련을 지도해 주는 일은 없겠지만 인색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는 바로 법보 두 개와 결단기 수사에게 필요한 요단으로 만든 단약 몇 병을 하사했다.

처음에 류미도 그의 제자가 되는 일이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여겼지만 나중에는 한립의 후한 대접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세상사 새옹지마라고 어령종을 떠나 한립을 사부로 모신 일이 나쁘게만 여겨지지 않았다.

류미가 영민하게 먼저 영충을 다루는 비술을 복제해 한립에게 바쳤고 더불어 육익상공들 역시 넘겨주었다.

한립의 거처를 떠난 그녀는 낙운종 백봉봉에 동굴을 파 거처를 마련하고 낙운종의 고계 수사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은발 노인이 한립의 체면을 보아서인지 그녀에게 백봉봉 부봉주 자리를 내준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봉봉 봉주인 송 수사의 보좌를 맡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한립은 미소를 보였을 뿐이다.

그는 지네 영수들을 손에 넣자마자 예상초를 먹여 기르기 시작했다. 예상초가 서금충에게 효과가 있었으니 분명 육익상공들에게도 비슷한 효험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밀실에 들어가 새로 얻은 영충을 부리는 비술과 신여음이 남긴 현모화영대법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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