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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372화 (129/2,000)
  • # 372

    372화. 류옥

    한 달이 지나서야 한립은 드디어 계국의 거처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한 시름을 내려놓은 그가 어령종 여인을 거처에 두고는 인근 봉우리에 기거하는 모패령을 살피러 갔다.

    그녀가 여전히 폐관 수련 중인 것을 확인하고 만족한 한립은 낙운종 장로들을 찾아가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은발 노인과 중년인이 한립의 귀환을 반기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한립이 귀령문 제자 몇 명과 마염문 결단기 제자들을 멸한 것을 듣고는 걱정하는 대신 큰 소리로 격려했다.

    아마 이전에 정마 양도가 그들을 암습한 일에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특히 은발 노인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 비술을 펼치느라 원기를 크게 상하고 아직까지 완쾌하지 못해 더욱 통쾌해 했다.

    그들의 태도에 안심한 한립이 한담을 나누다 거처로 돌아왔다. 이제 처치 곤란한 미녀를 어찌 할지 생각할 차례였다.

    * * *

    류 여인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낯선 얼굴에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등이 석실의 돌 벽에 닿고서야 제대로 확인을 하니 이십 대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일어났으면 저를 따라 주인님께 가시지요.”

    “주인님이 누구죠?  여기는 어디고요.”

    류옥이 순간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해 머리가 아파왔다. 은월이 여유만만하게 상대의 늘씬한 몸을 훑어보며 웃었다.

    “하하, 저를 따라 가보면 자연히 알 일입니다. 다만 이곳은 계국의 운몽산이니 수사도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는 아시겠지요!”

    “계국, 운몽산?  그럼 천도맹의……,”

    “역시 총명하시네요. 이곳은 천도맹의 낙운종이 맞아요. 소저 서두르시죠,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은월이 눈을 빛내며 침착하게 재촉했다.

    “그래요! 소녀도 선배님을 뵙고 싶으니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의 여인도 평범한 수사는 아니기 때문에 얼른 놀란 기색을 감추었다. 은월이 미소 지으며 사뿐사뿐 석실을 나서자 백의 여인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두 여인이 잇달아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한립은 돌 의자에 앉아 맑은 눈으로 대청 중간의 거대한 보호막을 보고 있었다. 안에는 영수 한 마리가 거칠게 머리를 들이 받고 있었는데 흙 속성의 금제도 짙은 노란색의 보호막도 돌처럼 굳게 버텨냈다.

    류옥이 자세히 살피니, 몸통은 푸른 소 같았지만 등은 비늘껍질로 이루어지고 네 개의 은색발굽을 지닌 철서수(鐵犀獸)였다.

    이런 영수는 상고시대의 만황이종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도계에서 아주 보기 드문 희귀 영수에 속했다.

    얼마 전 멸문 당한 원무국 부 가에서 조상대대로 이런 철서수를 전승해오고 있다 들었는데, 듣기로는 힘이 거의 결단 중기 수사에 맞먹는다고 했다.

    ‘설마 이 영수가? ’

    생각해보니 눈앞의 인물이 부 가 전체를 멸문시키고 이 영수를 강탈한 듯 했다. 류옥은 이런 원영기 수사의 수중에 떨어진 자신의 앞날이 어둡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한립의 젊은 외모를 보고 약간 의아했다. 남자 수사는 젊음을 유지하는 공법을 익히는 경우가 드물어 보통 원영기에 이른 수사들은 중년 이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은월이 공손히 한립 앞에 섰다.

    “주인님, 어령종 수사를 데려왔습니다.”

    “그래, 물러가 보거라.”

    “예!”

    은월이 물러나자 류옥은 불안한 마음으로 한립에게 예를 올리고는 고분고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립은 냉랭히 그녀를 훑고는 시선을 보호막 속의 철서수에게 돌렸다.

    그가 손끝을 튕기자 가느다란 번갯불이 튀어나와 보호막을 투과해 영수의 몸을 내리쳤다. 철서수가 벼락을 맞은 듯 비명을 지르며 털썩 쓰러지더니 다시 일어날 줄을 몰랐다.

    한립의 일격에 강대한 영수가 쉽사리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류옥은 얼굴색이 달라졌지만 곧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만 한립의 의식에는 그녀의 심장 박동이 한층 빨라진 것이 분명하게 감지되었다. 시선을 다시 류옥에게 주며 차분히 물었다.

    “수사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째서 나를 뒤쫓았지?  귀령문과 마염문 수사들이 나를 찾는 것은 알겠지만 어령종은 건드린 일이 없는 것 같은데.”

    한립의 물음에 류옥이 잠시 주저하더니 붉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배님께서 저희 어령종의 지목령영을 구속하고 계셔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뒤쫓게 되었습니다. 실례를 하였다면 완배의 모자람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소녀도 그저 명을 받아 움직였을 뿐입니다.”

    류옥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원영기 수사가 금방 알아챌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혼을 헤집는 술법을 동원하면 그들이 알아내지 못할 정보는 없었다.

    그녀는 의식에 손상을 입어 백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목령영?  그 녹색의 기이한 원영을 이르는 것이겠지!”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그가 포획했던 소인 형상의 원영을 떠올렸다.

    “예, 바로 그것입니다. 이 령영은 본래 저희 어령종에서 천신만고 끝에 제련해낸 귀중한 것입니다. 변고가 생겨 령영이 달아났는데 그것을 선배님께서 구속하신 것이지요.”

    류옥은 쓴웃음을 보였다.

    “제련해냈다고?  조그마한 것이 손속이 매섭더구나. 마주친 수사가 내가 아니었다면 수도계에 이것을 당해낼 자가 거의 없겠더군.”

    한립의 차가운 시선에 류옥이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순간 난처해졌다. 다행히 한립이 그녀의 새하얀 얼굴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 내가 령영을 데리고 있는 줄 알았지?  게다가 그렇게 빨리 나를 추적해 내다니. 령영에 무슨 조취를 해놓은 것인가?  그랬다면 분명 내 의식에 걸렸을 텐데.”

    “령영에는 어떠한 금제도 걸려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저와 다른 한 명의 동문 사저가 일종의 특수한 비술을 익혀 원거리에서도 지목령영의 대략적인 위치를 감지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거리제한이 있기에 십여 만리 이상 떨어지면 저와 그 사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류옥은 사실을 숨기지 않고 한립의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하며 관련된 정보를 이야기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의 진위에 상관없이 눈치 빠른 그녀의 처세에 만족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물음에는 류옥도 안색이 달라졌다.

    “너희 어령종이 고생스레 이런 령영을 제련해 냈다면 분명 이유가 있어서겠지. 내게 그 용도가 무엇인지 들려주겠느냐?”

    류옥의 얼굴에 주저하는 기색이 떠올랐지만 그의 한기어린 시선을 보고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목령영은 아주 특수한 기능이 있습니다. 나무 속성 영근을 지닌 수사가 특수한 공법을 수련한 후 지목령영과 융합을 하면, 스스로 원영을 응결할 필요 없이 이것으로 원영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원영기 수사에 필적하는 수행과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어차피 지목령영의 비밀을 누설했으니 어령종에 돌아가도 좋은 꼴을 당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원영기 수사도 미인이라고 봐줄 위인은 아닌 듯하니 일단은 눈치를 보며 위기를 대처해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바로 원영기 수사에 필적하는 수행을 지니게 되는 공법이 있었다니. 정말이라면 너희 어령종은 벌써 마도를 일통하고도 남았을 텐데 어찌 겨우 합환종 아래에 있는 것이지?  무슨 제약이 있는 것이더냐?”

    솔직히 한립은 여인의 이야기에 화들짝 놀랐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며 중요한 사항이 있는지 확인했다.

    “선배님의 말씀대로 령영은 대량으로 제련해 낼 수 없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령영의 배양 과정의 어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제련 재료 또한 극도로 희소하고 죽음을 앞둔 종파 내의 장로들의 협조가 있어야 시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열댓 번 시도해도 성공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융합대법을 시행하려면 다섯 가지 각기 다른 속성을 지닌 령영을 모아야 합니다. 한 속성이라도 부족하면 바로 오행이 채워지지 않아 융합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희 어령종도 지금까지 각종 령영을 모아왔지만 겨우 예닐곱 개에 불과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드물게 출현하는 것은 금속 속성 령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수십 년 전에 겨우 금속 속성 령영을 제련해내면서 종파 내에서 즉시 10명의 결단기 수사를 선발해 관련 비술을 수련하게 했지요. 모든 조건이 갖춰지면 저희 중 다섯 수사를 뽑아 융합 의식을 시행할 예정이었습니다.”

    류옥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야기해 나갔다.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로 한립은 이야기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령을 피워 원영기 수사가 된다고 해도 분명 진정한 원영기 수사와는 다를 것이다. 부족한 점이 있겠지.”

    융합령영의 대법은 그로 하여금 금단을 대신하던 살단을 떠오르게 했다. 물론 령영을 배양해 내는 것이 그것보다야 훨씬 어렵겠지만.

    “맞는 말씀이십니다. 전부는 알지 못하나 원영기 수사처럼 오랜 수명을 누리지는 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저 결단기 수사의 수명을 사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런 비술을 행하면 진정으로 원영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더는 조금도 수행에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로움도 많지만 폐단도 함께 공존하는 비술인 게지요.”

    이왕 이야기를 꺼낸 거, 여인은 마음먹은 김에 아는 대로 전부 털어놓았다. 이제 와서 말을 아껴봐야 달라질 것도 없었다.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한립은 드디어 지목령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제혼과 비슷하게 수사가 제련해낸 영물이었다. 다만 령영들은 수사의 원신마저 잡아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흉악무도했다.

    한립이 갑자기 류옥이 어안이 벙벙해질 만한 말을 꺼냈다.

    “네가 부리는 육익상공(六翼霜蚣)들이 대단하던데 어디선 난 것이냐. 네 수준으로는 이런 상고시대의 영충을 데리고 있기 어려웠을 것인데. 동문 사숙이나 사조들이 탐내지 않던가?”

    “이 영충을 아시는군요! 소녀, 버려진 상고시대 수사의 동굴 거처에서 영충의 알을 얻었습니다. 본래 죽은 줄 알았는데 가지고 돌아와 부화를 시도해 보니 운 좋게도 몇 마리가 태어났지요.

    그러나 종문의 어르신들이 말하기를 상고시대의 이종인 육익상공은 성체가 되면 능력이 무한하나 기르기가 무척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직 유충에 불과한 이것들을 굳이 탐내지는 않으셨습니다.”

    류옥이 조금 놀란 목소리로 답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대가 육익상공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유충이라 그의 눈에 찰만한 수준의 영충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원영기 수사들이 천 년을 넘게 살 수 있다지만, 육익상공 같은 영충은 기르는데 드는 시간과 노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류옥이 이상하게 여기자 한립은 그녀에게 가슴이 뛸만한 제의를 했다.

    “난 네 육익상공에 아주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을 단시간 내에 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 그래서 말인데,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나?”

    “무엇이든 그저 분부만 내려 주시지요.”

    “육익상공들의 성장을 도울 테니 영충이 알을 낳으면 반드시 내게 주어야 한다. 또한 어령종에 영충을 다루는 고유의 술법이 있다 들었는데 그것도 알려 주면 좋고.”

    “영충을 다루는 술법을요?”

    미소를 머금고 있던 류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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